대현자는 죽고 싶어 36화
앙헬은 자기 관심 연구에 너무 열정적인 나머지 나만 보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우물쭈물하며 말도 못 붙이던 놈이 한동안 연구한답시고 마탑에 틀어박혔다가 나와서부터는 팔 하나만 잘라 달라며 나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냥 쫓아만 다녀도 사이코라고 생각했을 텐데, 실험하게 팔을 잘라 달라고 하면서 쫓아다니는 걸 보고 있자니 진짜 미친놈 같아서 더욱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기척을 지우고 앙헬을 비롯해 마탑 마법사 몇 명이 포진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 고유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어느 동네에서나 떵떵거리는 게 마탑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굳이 이 황궁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건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마탑주님, 제국의 황위 싸움에…….”
“아마…… 않을 거야.”
“하지만…… 이러다가 실패로…… 하면.”
도청하고자 마법을 쓸 수도 없고, 거리를 좁히자니 들키기 딱 좋았다.
나는 정원의 키 큰 고목 뒤에 선 채 마법사와 마탑주가 나누는 대화를 주워들었다. 문장들이 드문드문 끊겨 들리는 게 귀에 거슬렸지만, 제대로 들으나 마나 1황자가 황위 싸움을 위해 마탑 놈들을 끌어들인 게 틀림없었다. 내 대항마 용도로 마탑주까지 불러들인 거겠지.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한 놈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마탑은 로베인 제국 소속이 아니다. 제국의 황제가 마탑에 의뢰를 넣는다고 하더라도 자기 연구 바쁘다는 이유로 싸가지 없이 거절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마탑주까지 직접 행차했다는 건 1황자 라단타 놈이 마탑에게 엄청나게 혹할 만한 조건을 제시했다는 의미였다.
그때, 앙헬과 눈이 마주쳤다. 꽤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앙헬은 정확히 날 찾아냈다. 몽골의 후예라도 되는지 참으로 시력이 좋았다. 시력보다는 마나 흐름에 의존해서 나를 찾은 걸 테지만.
“대현자.”
“너, 눈 왜 이렇게 좋아?”
“대놓고 보이게 서 계셨잖아요?”
“내가?”
마나가 아니라 시력으로 찾은 건가? 아무튼, 눈치 빠른 놈들은 딱 질색이라니까.
이처럼 마탑주 앙헬은 눈치가 좋았다. 역시 오래 산 놈들은 별수 없다. 저 자식이 황궁 안에 돌아다니고 있는 한, 가지고 있는 마도구를 다 뒤져서라도 기척을 숨길 만한 물건을 찾아내야만 했다.
저놈은 안 그래도 직감이 좋은데 나 한정으로 위치 파악도 끝내주게 잘했다. 살아 있는 내 전용 GPS 같은 거라고 할까.
“징그러운 새끼. 그 거리에서 잘도 알아보네.”
“제가 대현자님을 이 정도 거리에서 못 알아볼 리가 없죠.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강녕은 얼어 죽을. 야, 황궁은 왜 왔니? 마탑 요즘 한가한가 봐?”
“그 말씀, 마탑 연구동에 갇힌 마법사들이 들으면 피눈물을 흘리겠는데요.”
이런 식으로 대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들켰으니 그냥 뻔뻔하게 알은척하기로 했다. 인제 와서 얼굴 숨기고 ‘저 대현자 아닌데요?’ 하고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인간 중에서는 그나마 또래라고 할 수 있는 (다시 생각해 보니 약 300살 차이를 또래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 앙헬이 뺨을 붉히며 내가 말을 걸어 줬다고 좋아하는 모습이 정말 꼴 보기 싫었다. 백 살 넘은 영감이 어디서 소년 행세야?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게 센 머리와 다르게 앙헬의 새파란 두 눈은 노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청년의 것에 가까웠다. 나도 남들 눈엔 보기엔 제법 동안으로 보이겠지만, 저놈에 비하면 분명 현숙하다는 소리를 들을 터였다.
나는 혀를 차며 여기 왜 왔냐는 내 질문을 은근슬쩍 넘기는 앙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내가 다가오는 걸 다 보고 있었으면서도 피하지 않고 발길질을 당하는 놈이 어이가 없었다.
“너, 1황자가 불러서 왔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 새끼 이거 맨날 신처럼 추앙할 땐 언제고 내 앞에서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네.”
“하하. 대현자님께서는 속세의 모든 문제에 자유로우신 분이지만, 마탑은 아무래도 그렇지 못해서.”
“나이 처먹더니 말만 더럽게 잘해.”
“대현자님께 칭찬까지 받고…… 제가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나 봅니다.”
“뒈질래? 나보다 먼저 죽기만 해 봐.”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놈이 죽는다는 소리를 하지? 100살 조금 넘어 놓고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불로불사 연구한다는 놈이 이렇게 패기가 없으니까 예카리나가 죽기 전에 기합으로 성공시킨 영생 저주 같은 건 시도도 못 하는 거다.
“뭐, 마탑도 사정이 있다니까 캐묻진 않을 건데.”
“정말요?”
“그래. 내가 너희 일 하나하나 신경 써서 뭐 하니? 그런데, 하나는 명심해라.”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황궁 안에 있으면 사실 곤란한 게 아주 많았다.
앙헬 정도면 내가 어디서 무슨 마법을 쓰는지 금세 파악할 수 있으니 안 그래도 어렵던 은밀 행동에 더더욱 제약이 걸리는 건 물론이고, 마음 편하게 황궁을 헤집고 다니는 것도 어려워진다. 살아 있는 GPS가 달린 셈이니까.
거기다 얘네가 우리 편이 아니라 1황자 편이면 더 곤란하다. 나도 저놈들이 마법 쓰고 다니면 금방 인지할 테지만, 나는 한 명이고 쟤네는 여러 명이잖아. 원래 싸움은 어떻든 간에 다구리 치는 쪽이 이기는 거다.
“내 제자 건드리면 마탑 박살 낸다.”
그러니까, 일단 나도 선빵을 좀 갈겨 놔야지.
“그거 좀 질투 나네요. 제자를 그렇게 아끼시는 분이 왜 마탑 소속 마법사들은 왜 다 거절하시고.”
“마탑 애들은 좀 바보잖아.”
“그보단 대현자님이 대충 설명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보통 사람은 덧셈과 뺄셈 배우고 나면 곱셈이 나오길 기대하지, 그 이상이 나올 거라고 생각을 안 하니까요.”
“닥치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앙헬의 이마를 손끝으로 툭 밀어냈다. 이 자식은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이마까지 맞았는데도 뭐가 좋은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언제 봐도 영 꺼림칙한 놈이었다.
“3황자만 안 건드리면 되는 거죠?”
“그래.”
“그럼 다행이네. 마탑의 목표는 3황자가 아니거든요.”
“목표가 뭔데?”
“당연히 대현자님이죠.”
앙헬이 내내 가만히 내려 두었던 제 손을 뻗어 자신의 이마를 밀친 내 손을 콱 움켜잡았다. 악력이 강하지 않아 얼마든지 비틀어 빼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이 미친놈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듣기 위해 가만히 서 있었다.
“대현자님만 얻을 수 있다면 마탑은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손 안 놓으면 너 오늘로 불로불사 연구 못 하고 죽는 줄 알아라.”
“하하…… 이 손이라도 하나 잘라 갈 수 있으면 정말 정말 좋을 텐데.”
어쩌다 지하철역 출구 근처에서 피켓 들고 불신 지옥을 외쳐야 할 사이비 놈들이 판타지 세계에도 있게 된 걸까?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다른 손으로 앙헬의 정수리를 세게 갈겼다. 뭐라는 거야. 사이비는 물렀거라.
????????????
“라단타 놈이 마탑을 고용했다.”
“이야, 대단한 놈일세. 돈이 옴팡지게 많나 보지? 마탑주가 직접 오고.”
“돈 대신 대가로 날 넘기기로 한 모양이던데.”
“당신을?”
“그래. 마탑 놈들이 날 워낙 좋아해서.”
좋아하는 정도면 다행이게? 맨날 팔다리 하나만 잘라 달라고 애걸복걸하고, 그것도 안 되면 제자로 받아 달라고 앞 구르기 하고 물구나무서는 놈들인데.
내 말에 귀나 후비는 트리스탄과 달리, 이르커스는 표정이 안 좋아졌다. 추가로 트리스탄과 항상 세트로 같이 다니는 마법사 한네만의 표정은 이르커스보다 훨씬 더 나빠졌다.
“저 하네만? 한네만인가 하는 너희 용병 단원 표정은 왜 저래? 쟤 혹시 마탑 출신이니?”
“눈치 좋네. 마탑 출신 맞소.”
“어떻게 마탑에서 나왔대? 걔들, 한번 발 들인 마법사는 자기들이 내쫓지 않는 이상 마탑에서 못 나가게 하는데. 야, 너 이리 좀 와 보렴.”
붉은 매 용병단의 트리스탄과 로버트는 성격은 좋았지만, 솔직히 좀 바보였다. 특히 단장이라는 트리스탄 놈은 기가 찰 정도로 순진해 빠졌다. 그 검술 실력을 가지고도 용병단 크기를 못 키우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냉담하게 말하자면 트리스탄은 보험 사기당하기 딱 좋은 인간이었다. 나사가 헐겁다 못해 한두 개 빠져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런 트리스탄의 오른팔인 로버트 역시 성격은 참 착했지만, 눈치가 더럽게 없었다. 옆에서 자기네 단장이 사기당할 위기에 처하면 같이 하하 호호 웃으면서 두 배로 사기당할 놈이었다.
그나마 트리스탄의 왼팔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사 한네만은 트리스탄이나 로버트보다 사정이 좀 나았다.
대단한 천재라고 할 수도 없고 마법적 재능도 별로지만, 문서를 훑는 능력이나 조건이 좋지 않은 계약을 가려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마 트리스탄이 생각 없이 물어 오는 별의별 임무 및 의뢰들은 한네만의 손에서 거름망처럼 한 번씩 걸러져 단원들에게 분배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황궁으로 굳이 셋이나 데리고 들어온 붉은 매 용병단 중에서 내가 제일 쓸 만하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 단장인 트리스탄이 아니라 한네만이었다.
트리스탄이나 로버트가 강하긴 하지만, 무력으로 따지자면 우리 이르커스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수준은 아니었다.
위급 상황에 대한 대비와 이르커스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서 둘을 호위로 달아 놨을 뿐이지, 그 외에는 이 검밖에 쓸 줄 모르는 용병들을 마땅히 써먹을 곳이 없었다. 나는 지금 무력으로 반란하러 황궁에 들어온 게 아니니까.
하지만, 한네만은 얘기가 다르다.
에델라이드를 데리고 오지 못한 이상, 한네만을 이용해서 에델라이드에게 맡기려고 했던 정보 수집 업무 같은 것들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마탑 놈들이 황궁에 기어들어 오고 한네만이 마탑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