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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35화 (35/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35화

    유안에게는 이르커스가 모르는 과거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유안이 모르는 이르커스의 과거가 고작 12년 내외라면, 이르커스가 모르는 유안의 과거는 400년이었으니까.

    물으면 뭐든 쉽게 답해 주고, ‘나 때는 말이다……’ 라며 묻지도 않은 옛날이야기를 늘어놓는 것 같다가도, 유안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이르커스는 유안이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떻게 예카리나를 만나게 되었으며, 어떤 이유로 영생 저주에 걸렸는지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중앙 분수대가 고향이라고 하던데.”

    “고향?”

    “그래. 진담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트리스탄은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르커스를 향해 억울하다는 듯 머리만 벅벅 긁었다. 분명 유안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읊는 것뿐인데도 어쩐지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기 감시하지 말래.”

    “…….”

    “너한테 전하라더라. 안 말해 줄 거니까 괜히 자기 과거 캐내려 들지 말라고.”

    한유안은 이르커스에게 굉장히 물렀다.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 내쫓겼을 말과 행동도 이르커스가 하면 어느 정도 봐줬다. 업어 키운 피보호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르커스가 뭔가 캐물으려고 하거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보인다 싶으면 이렇게 밀어내기를 반복했다. 틈은 있는 대로 줘 놓고,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면 슬쩍 발을 빼는 꼴이 여간 영악한 게 아니었다.

    “내가 느끼기에 대현자는 그냥 널 가지고 노는 거야.”

    트리스탄이 하품을 하며 이르커스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이르커스가 유안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눈치를 스튜에 말아 먹은 트리스탄조차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명명백백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 짝사랑은 가망이 없었다.

    400살 넘은 불멸의 대현자와 아직 자기 입지도 제대로 다지지 못한 3황자 사이의 사랑? 대충 들으면 로맨틱하겠지만, 세세히 따져 보면 안 될 이유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러니까 그냥, 대현자가 네 보호자인 거에 만족해. 그것만으로도 넌 충분히 운이 좋은 거다.”

    맞는 소리였다. 트리스탄은 헛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긴 했으나, 드래곤 슬레이어의 유일한 제자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게 맞는 말도 많이 했다. 사람이 좀 허술해 보여서 믿음이 안 갈 뿐, 따져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르커스는 유안이 제 보호자가 된 것이 서로에게 행운보다는 불운이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르커스가 마법을 조절하지 못해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유안이 이르커스를 꾸짖거나 버렸더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을 터였다.

    하지만 유안은 이르커스를 꾸짖는 대신 안아 주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그때부터 이르커스는 유안이 어디까지 자신을 용인하는지를 재단하기 시작했다.

    한유안은 마음이 약했다. 본인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지난 인연에 수도 없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기에 이르커스는 유안이 왜 그토록 자신과 거리를 유지하려는지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한유안은 겁을 먹고 있었다.

    유안은 이르커스 로베인이 자신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이르커스의 죽음을 봐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그러니 그에게 영생은 저주일 수밖에 없었고, 이르커스는 그 저주를 끝낼 수 있는 가능성 높은 희망이었다.

    이르커스는 의뢰자에게 아처볼드의 목을 가져다준 대가로 얻게 된 정보를 떠올렸다.

    유안과의 계약을 파기할 수만 있다면, 유안은 이르커스가 죽을 때까지 결국 이르커스의 옆을 지켜 줄 것이다. 희망이 눈앞에서 사라져도 그 희망을 박살 낸 이가 제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용서해 버리는 게 유안이니까.

    한유안은 그런 족속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저주에 걸렸고, 그래서 400년이나 살게 된…… 대현자라는 칭호를 가지고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

    “계속 유안을 감시해 줘.”

    “내 말을 지금까지 뭐로 들은 거냐. 너,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안 들키면 되잖아.”

    “말이 쉽지. 상대는 대현자라고.”

    “할 수 있으면서.”

    이르커스는 엄살을 피우는 트리스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감시해 달라는 부탁을 거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르커스를 보며 트리스탄은 혀를 찼다.

    “몇 년 지켜봤는데, 너 점점 미쳐 간다.”

    “내가?”

    “그럼 누구겠냐? 조심해. 광증은 약도 없어.”

    참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이르커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잔뜩 툴툴거리며 방을 나서는 트리스탄을 친절하게 배웅해 주었다.

    이러나저러나 트리스탄은 이르커스의 부탁을 들어줄 터였다. 트리스탄은 이르커스의 검술 스승이었고, 유안을 제외하면 이르커스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르커스는 의자에 기대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유안과 오랫동안 함께 지낸 길버트조차도 유안이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로베인 제국으로 흘러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한유안은 마치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사람처럼 살아온 흔적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알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기만 한다. 이르커스는 유안의 검은 눈을 떠올려 보았다. 평소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처음 발견했을 땐 온전한 기쁨으로 물들었던 그 눈.

    뒷조사로 알아낼 수 없다면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유안이 직접 제 감정과 과거에 대해서 털어놓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마침 이르커스는 유안에 대해서라면 꽤 인내심이 좋은 편이었고, 몇 년 정도는 유안의 침묵과 비밀을 순순히 지켜볼 의향이 있었다.

    ????????????

    마탑 새끼가 왜 황궁에 있지?

    요즘 내 소일거리는 황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황궁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나 황궁으로 출근하는 귀족들의 신경 줄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새파랗게 어리고 마음도 여린 중생들은 내가 조금만 주위를 알짱거려도 일에 집중을 못 하고 온갖 실수를 저질렀다. 그 꼴을 보는 게 퍽 유쾌했다.

    물론, 일부러 괴롭히는 건 아니었고 그냥 뭐…… 어린애가 혼자 죽을 고비 넘기며 구르고 구른 황궁이 어떤 곳인가 정찰해 본 것뿐이었다. 하하. 애 안 돌보고 모질게 군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해라, 인간들아.

    시대가 바뀌어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황궁 구조는 내가 황궁 마법사로 일할 때랑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구조 한 번 바꾸려면 대대적인 공사를 해야 하니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지만, 좀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게을러터져서 국정 운영은 어떻게 한대? 나 때는 말이야…… 비밀 통로 보안 유지한답시고 숨 쉬듯이 구조를 바꾸고 그랬다, 이 말이다.

    이 근성 없는 놈들은 13대 황제가 쓰던 비밀 통로를 21대 황제가 즉위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궁 놈들이 나랏돈으로 월급 루팡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가 아는 비밀 통로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대로 있냐고. 하나 정도는 막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이걸 굳이 친절하게 황궁 쪽에 알려 주면서 너희 일 똑바로 안 하냐고 신경질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따지자면 나한테는 잘된 일이었으니까.

    마탑의 쥐새끼를 발견한 것도 비밀 통로를 배회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황제가 쓰는 집무실과 정원을 잇는 통로 사이를 거닐며 ‘이 머저리 새끼들 보수 공사도 제대로 안 해 놨네……’라는 생각을 한창 하고 있을 때, 꽤 큰 규모의 마나의 흐름을 감지했다.

    나름대로 비밀스럽게 이동하려고 애를 쓰고 있긴 했지만, 내가 방 안에 처박혀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놈들의 비밀스러움은 그렇게까지 은밀하지 못했다.

    이래서 마법으로 암살을 못 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다. 역으로 말하자면 나 역시 발각될 위험이 크다는 소리였다. 별거 아닌 마법 하나라도 잘못 쓰면 반역이랍시고 기사단 데리고 우르르 몰려올 거 아냐.

    가지고 들어온 마도구 중에 마나 제어를 도와주는 물건이 있던가? 나는 내가 챙겨 왔던 마도구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쭉 떠올려 봤다.

    쓸 만한 마도구가 없으면 나는 내 마법 실력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체술을 써 가며 적을 상대해야 했다.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해야 한다니……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마법 쓰면 안 다칠 수 있는 일을 괜스레 몸을 써서 처리하려고 들면 꼭 사달이 났다.

    마도구의 필요성을 생각하며 비밀 통로를 벗어나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건 마탑주 앙헬이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저 정도 규모의 이동 마법을 수식 전개나 마도구의 도움도 없이 훅훅 쓰는 놈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르커스나 나, 마탑주 정도는 돼야 다수를 데리고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 마나를 그만큼 대량으로 쓸 수 있을 만한 인간이 한정적이니까.

    저 인물 목록에서 이르커스랑 나를 제외하면 남는 건 마탑주 앙헬뿐이다. 저놈과 나는 심지어 구면이었다.

    오래 살다 보면 나를 죽이려는 적들이 발밑에 산처럼 쌓인다. 적만 쌓이면 다행이지, 온갖 또라이들이 생의 한순간을 알뜰살뜰 장식해 준다. 나 심심하지 말라고 예카리나가 하늘에서 거지 같은 놈들을 보내 주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거지 같은 놈 중에서도 마탑 놈들은 내게 아주 특별했다. 그놈들은 나를 무슨 신처럼 여겼다. 대륙의 주교인 엘리오스교보다 나를 더 믿었다.

    아버지가 가끔 읽던 무협지 속 천마가 된 기분을 일시 체험하게 해 주는 놈들이 바로 이 마탑 놈들이었다. ‘마’ 자 돌림이라고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대륙에 널리 설파된 엘리오스교를 내버려 두고, 구교인 헤누스교도 아닌 나를 숭배한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이비잖아.

    이 사이비 집단은 어떻게든 내게 찾아와 제자로 받아 달라고 하는 건 기본이고, 신체 일부라도 잘라 가서 실험 재료로 이용해 보고 싶어 하는 건 덤이었다.

    광신도들이 왜 소름 끼치는지 마탑 놈들을 보면 딱 이해가 갔다. 이래서 사이비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그토록 컸던 거구나. 그리고, 왜 누군가를 종교로 삼으면 안 되는지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가 그 신앙의 대상이 되고 보니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이코 사이비 마탑 놈들의 대빵이 바로 앙헬이다.

    앙헬은 새파랗게 젊어 보이는 외양과 달리, 100살이 넘은 능구렁이 새끼였다. 하얗게 센 백발을 제외하면 겉으로는 20대 초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대륙 인간 평균 수명의 두 배는 더 산 괴물이 들어 있다.

    마침 또 앙헬의 주요 연구 분야가 불로불사였다. 이놈은 정말 나처럼 되고 싶어 했다. 저 나이 먹도록 인생에 질리지 않고, 더 오래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만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른 마탑 놈들이 최선을 다해 실용 마법이나 공격 마법을 만드는 동안, 앙헬은 자기 젊음을 유지할 비약 레시피 같은 거나 고안했다.

    그 레시피 연구가 마탑에서 제일 후원을 많이 받게 된 덕에 마탑주 자리까지 올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진시황을 증오하게 된 내 입장에서는 소름 끼치는 미친놈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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