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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34화 (34/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34화

웃기는 소리지만, 나이를 이만큼 먹기 전엔 한국이 조금 그리웠다. 한국에서 거주한 기간보다 이펜하임 대륙에서 지낸 시간이 더 길었음에도 그랬다.

원래 사람에게는 귀소 본능이 있어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소리도 있지 않던가.

불멸자가 이후에도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는지 연구해 보곤 했다. 헛짓거리라는 걸 알면서도 한 100년은 그 짓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200살이 넘는 순간부터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가끔 현대 문명의 이기만큼이나 부모님이 그리웠지만, 내가 이 나이 먹고 돌아간다고 해도 부모님이 살아 계실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살던 한국이 맞을까? 나를 기억하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살아 있기는 할까?

사실 돌아갈 방법도 없었다. 진짜 별짓 다 해 봤는데 소용없었기 때문이다.

따지자면 이세계 트립인 동시에 책 빙의니, <이르커스의 서>가 완결 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지만, 나의 문제는 <이르커스의 서> 완결이 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1권만 읽는 버릇이 이래서 나쁘다. 중간은 다 생략하더라도 17권을 들춰 보기라도 해야 했는데.

깔끔하게 한국 복귀를 포기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 얼굴도 흐릿하게만 떠올랐다. 그냥 부모님과 친구들이 내 죽음에 지나치게 충격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감상만이 남았다. 나는 여기 잘 살아 있으니까 (심지어 죽지도 못하는 상태니까) 그곳에서의 내 죽음에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그러니 한국 서울의 모 산부인과를 제외하면…… 내게 남은 고향은 바로 이 로베인 황궁 정원의 중앙 분수대였다.

비밀 통로를 하나씩 뒤적이며 돌아다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황궁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황궁이나 왕궁 설계하는 놈들도 참 박 터지게 살았을 것이다. 이렇게 온갖 곳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 은밀하게 설계하는 것도 일일 테니까.

지친 무릎 관절을 쉬게 해 줄 요량으로 정원에 비치된 나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앉아 앞을 보니, 내가 이세계 트립당해 처음으로 처박혔던 중앙 분수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분수대도 참 오래 버틴다. 내가 여기 온 지 4세기가 지났으니, 황궁 놈들이 아무리 공무원이라고 대충 살아도 구조 개편을 서너 번은 했을 텐데 그때마다 안 밀리고 살아남은 것 아닌가.

별것도 아닌 구조물에 불과하지만 저 오래된 중앙 분수대가 새삼 반가웠다. 황궁 마법사 때려치우고 나간 뒤로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세세한 장식들만 바뀌었을 뿐, 내가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와 큰 틀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분수대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왜 하필 여기 위로 떨어졌을까? 역시, 트럭에 치이고 이세계 트립당할 때 창조주와 대면 이벤트가 존재했어야 시작점이라도 조절할 수 있었을 텐데.

바쁘게 지나다니는 황궁 시종들이 몇 시간째 정원 벤치에 앉아서 넋을 놓고 분수대를 바라보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시종들 일하는 데 방해되게 왔다 갔다 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내가 이렇게 물멍을 때리고 있는 건 처음 봤을 것이다.

나는 너무 노골적으로 흘긋거리는 어린 시종 하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 시종은 마치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펄쩍 뛰며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누가 보면 내가 무슨 메두사인 줄 알겠다. 눈 좀 맞췄다고 돌이라도 되는 줄 아나? 저렇게 잽싸게 피하게.

“야, 너 이리 좀 와 봐.”

그 시종을 향해 선량한 학생 삥 뜯는 일진 무리처럼 손을 까닥였다. 정말로 삥을 뜯을 생각은 아니고, 조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저…… 저요?”

“그래, 너.”

내게 지목당한 시종은 갑자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저렇게 겁을 먹으니 좀 미안했다. 한편으론 아무리 내가 대현자라고 해도 ‘어라, 사람이다. 죽어!’ 하고 막 마법을 날리진 않는데 왜 저렇게 놀라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부르면 좀 빨리 와라. 너, 내가 딱 보니까 나 막 훔쳐보고 그러던데. 할 일 없어서 그러는 거 아냐? 뭐 이렇게 바쁜 척을 해.”

하긴, 나도 한참 어릴 때 갑자기 죽지 않는 생명체가 와서 ‘너 이리 좀 와 봐’라고 했으면 당황스럽기는 했을 테다.

시종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내게 순순히 다가왔다. 역시 어느 세계나 계급과 무력이 깡패다.

“어우, 진짜. 황궁 마법사 시절 나와서 자꾸 개 꼰대처럼 말하게 되네. 꼽 주려는 거 아니고, 뭐 물어보려고 부른 거니까 고개 들렴.”

“예? 예…….”

“다른 게 아니라 최근에 이 중앙 분수대에 사람 떨어진 적 없니?”

“……사람이요?”

시종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나를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바라보았다.

얼굴 한가득 ‘뭐라는 거야?’라는 표정이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나 이후로 이세계 트립당한 불행한 현대인은 없는 모양이었다.

4세기가 지나도록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간이 나뿐이라는 사실이 조금 억울하게 느껴졌다. 하긴…… 누가 수능 전날 <이르커스의 서> 같은 17권짜리 장편 정통 판타지 소설을 들춰 보겠냐고.

“됐다. 가라.”

아무것도 모르는 시종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저거 진짜 대현자 맞아?’ 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나는 다시 중앙 분수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그간 툭하면 몇 년씩 잠들고, 인간 사회에 관심을 싹 끄고 산 탓에 잊고 있었던 향수병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나 진짜 왜 이러고 살고 있냐…….”

그때 <이르커스의 서>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평범하게 영어 단어나 외우고 시험장 가다 죽었더라면…… 요절했을지언정 영생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 이렇게까지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을 느낄 필요도 없었을 텐데.

밤이 깊을 때까지 중앙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그 오래되고 낡은 분수를 바라보았다. 대충 잊고 살았던 인간성과 감수성이 돌아오는 기분은 언제 느껴도 최악이었다.

????????????

“야, 너 왜 나 감시하니?”

이거 참. 모르는 척하기도 쉽지 않다.

나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긴 했으나 노골적으로 따라붙는 트리스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것들이 진짜. 이르커스 호위하라고 붙여 놨더니 로버트만 이르커스를 따라가고 트리스탄은 날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용병 단장이라는 새끼가 월급을 날로 먹으려고 해?

“잠깐. 마법 멈추쇼. 나도 다 이유가…….”

“이유는 무슨. 유언은 남기게 해 주마.”

“아, 멈추라니까! 난 카만에 사자 같은 와이프가 기다리고 있소.”

저놈에게 딸린 가족만 없었어도 머리칼을 죄다 쥐어뜯어 놨을 텐데.

얼굴도 모르는 트리스탄의 부인, 이졸데를 생각해 녀석을 대머리나 고자로 만드는 잔악무도한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대신 몇 대 좀 쥐어 패긴 했다.

“진짜 어이없네. 뭐가 불만이야, 너. 갤런이 부족했니?”

“아니. 아이 씨, 그만 좀 때립시다. 진짜.”

“어디서 큰소리야. 뭘 잘했다고. 그럼 뭔데. 이르커스가 너보고 나 감시하래?”

“…….”

“……이런 미친. 진짜? 왜? 나 뭐 잘못했니?”

거짓말과 담을 쌓은 게 분명한 트리스탄은 융통성 있게 넘어갈 만한 떠보기 질문에도 바로 발이 걸렸다.

역시 옆에 한네만이 없으면 트리스탄이나 로버트나 사기당하기 딱 좋은 놈들이다. 붉은 매 용병단 망하게 하려면 한네만 하나만 빼돌려도 되겠다.

“내가 혹시 자기 배신하고 라단타 뭐시기한테 붙을까 봐?”

“당신이? 1황자 면상 보니까 당신 눈에 안 차서 안 될 것 같던데.”

“그걸 아는 놈들이 왜 날 감시하냐고.”

“그야 나도 모르지. 난 그냥 이르커스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까.”

거짓말은 더럽게 못 하는 주제에 꼴에 의리는 있었다. 아마 내가 몇 대 더 쥐어 패도 이르커스가 날 감시하라고 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일절 발설하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이런 걸 보면 미래에 정말 이르커스에게 도움이 될 인사라는 생각이 들어 뿌듯한 마음이 드는 한편, 돈 준 건 난데 고용주가 누구인지도 못 알아보는 무뢰한이라는 생각에 열도 뻗쳤다.

트리스탄에게 낙뢰라도 한번 쳐 줄까 하다가 그냥 기운이 쭉 빠져서 한숨을 푹 쉬었다. 정원 벤치에 털썩 주저앉자, 트리스탄이 내 눈치를 살살 보면서 곁으로 불쑥 다가왔다.

“거, 요즘 왜 분수만 쳐다보고 있소?”

이건 트리스탄이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이르커스가 궁금해하는 것일 테다.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안 쳐다보고 있는데?’라고 빈정거리려다, 이르커스의 처연한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곤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기가 내 고향이라서.”

“중앙 분수대가?”

“그래. 내 첫 시작점이 여기거든.”

트리스탄이 전혀 이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확실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 사람은 어디서나 태어나지만, 황궁 중앙 분수대에서 태어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 것이다.

“이번에 죽으면 전부 끝이었으면 좋겠어.”

“대현자, 당신은 이해가 안 가는 말을 너무 많이 해.”

“그냥 이해하지 말고 들어, 그럼.”

“그게 무슨 대화요? 내가 무슨 목각 인형도 아니고.”

“눈치는 목각 인형보다 못하잖니.”

아니라고 신경질을 부리는 트리스탄을 세워 두고 나는 실실 웃으면서 작게 덧붙였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웃을 일이라곤 하나 없는데도.

“너, 이르한테 지금 하는 대화도 다 일러바칠 거지?”

“……사람 참 무안하게 만드네.”

“그럼 이 얘기도 해 줘.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말라고. 내 과거는 400년짜리고, 너 같은 감시 붙여 봐야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트리스탄의 미간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꼭 못 들을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이르커스도 아니면서 더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대현자, 그럴 거면 이르한테 잘 대해 주지라도 마쇼.”

“신경 꺼.”

“사람이 잔인해도 정도가 있지.”

“세상엔 말해 줄 수 없는 과거도 있는 법이야.”

이르커스가 아무리 캐물어도 내가 다른 세계에서 죽은 이후, 이 세계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다.

너는 사실 내가 읽었던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고, 내가 아니었어도 황제가 됐을 거라는 말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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