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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33화 (33/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33화

    “누가 내 욕하나.”

    귀가 간지러웠다. 누가 내 뒷담화를 아주 신명 나게 하고 있나 본데.

    그런데 적이 너무 많아서 정확히 누가 날 씹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50년쯤 전에 마도구 만들어야 한다고 내가 원석 갈취해 갔던 드워프 놈들이 지금까지 나 욕하고 있나? 아니면 역시 남쪽 숲의 나무 정령들인가? 그도 아니면 테리즈나 에델라이드일 수도 있었다.

    “뭐 궁에 들어오기만 하면 바쁘게 움직일 줄 알았더니 천하태평이로군, 대현자.”

    “할 게 있어야 하지. 이 정도로 세력이 없는데 뭘 하겠니? 좀 둘러보니까 아주 이 새끼 저 새끼 할 거 없이 다 라 뭐시기 편이더만.”

    “그건 그렇소만. 뭔 시종들까지 우릴 역적처럼 여기는 게 여간 마음에 안 들어.”

    “이르커스 걔가 정치질을 못 해서 그래.”

    할 일이 산더미인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물론 할 일 많아도 안 하고 늘어져 있어도 되는 나와 트리스탄과는 달리, 이르커스는 황궁에 입궁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바빠졌다.

    입궁 후부터 내가 이르커스를 못 끼고 살 줄은 알았지만, 어째 애가 용병 생활한다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닐 때보다 얼굴 보기가 더 힘들었다.

    황궁 예절을 배워야 한다고 아침 일찍부터 이르커스를 납치하듯 데려가는 황궁 교사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뭐야……. 내가 기본적인 건 다 가르쳐 놨는데 왜 맨날 부족하다고 그래?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러냐고. 내가 보기에 이르커스는 아주 귀티가 좔좔 흐르는데, 남들 눈에는 아닌 모양이다.

    툭하면 품위가 없다는 말로 애한테 면박을 주는 건 물론이고, 자기들보다 몇백 년은 이르게 황궁 생활한 나한테도 겁도 없이 이르커스에게 황궁 예절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잔소리를 늘어놨다.

    이런 식으로 적의를 드러내니 오히려 대처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금만 더 노골적이고 교묘하게 굴어 주면 안 될까? 그럼 나도 깽판 치기 좋잖아.

    하지만 나는 그냥 웃는 얼굴로 살인낼 것 같은 이르커스를 황궁 교사의 손에 순순히 들려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괜히 내가 ‘너 뭐니? 너희 나보다 오래 살았어?’ 하고 맞받아쳤다간 이르커스가 사고를 칠 것 같았다.

    “1황자가 생각보다 인망도 좋고, 머리도 잘 굴리던데. 안팎으로 평판이 이리 좋은 놈은 내 또 처음 봤소.”

    “하…… 원래 판타지 소설 악역은 그냥 개 나쁜 새끼여야 밑도 끝도 없이 후려갈길 수 있는 건데.”

    “뭐라는 거요?”

    “넌 몰라도 돼.”

    라 뭐시기…… 그래, 라단타 어쩌고는 내 생각보다 영리한 자였다.

    그러니까, 좋게 말하면 영리하고 나쁘게 말하면 능구렁이 스무 마리는 삼킨 놈이었다. 수완이 얼마나 좋은지 황궁 전체가 자기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이르커스랑 나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새파랗게 어린놈인데,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을 보면 ‘저 사실 인생 2회차입니다’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간교했다.

    라단타는 지금까지 자기 형제 둘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렸다. 살인이라는 걸 들키지도 않았다. 심증만 있을 뿐 증거도, 자백도 없었다는 소리다.

    죽은 이들의 사인은 독살이나 암살이 아니었다. 하나는 병으로 죽였고, 다른 하나는 사고사로 죽였다.

    증거 하나 안 남기고 사람을 묻어 버릴 수 있다는 건 권모술수에 대단히 능하다는 것이다. 일을 벌였을 때 꼬리를 잘라 수습하고 입 다물어 줄 손속들도 여럿 있다는 것이고.

    심지어 그냥 귀족도 아니고 황녀와 황자를 황궁 안에서 그렇게 죽인 뒤, 고발 한번 없이 넘어갔다는 게 참 신경 쓰였다. 귀족 대다수가 1황자에게 줄을 대고 있다는 반증이니까. 혹시나 하고 라단타의 출신을 알아보니, 황비의 출신 가문인 베첼 공작가가 외척 세력 역할을 톡톡히 해 준 모양이었다.

    “뭐, 이복형제라고 해도 자기 형제인데 피도 눈물도 없이 죽이려는 거 보면 그냥 개 나쁜 새끼인 게 맞는 것 같기도.”

    “원래 황궁은 그러잖소. 그래도 자기 친동생은 안 죽였던데. 막내 황녀.”

    “이름이 마리아였나?”

    “그래. 자기 친동생은 안 죽인 걸 보면 인륜을 알기는 아나 보지.”

    그건 아마 인륜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 황녀가 황위 싸움에 방해가 안 돼서 안 죽인 걸 텐데.

    정말로 사이가 좋아서 안 죽였을 가능성은 적었다. 같은 어머니 아래에서 태어난 어린 막내 황녀는 살려 뒀다가, 추후 다른 왕국에 외교용으로 시집보내거나 자기 측근에게 인질용으로 넘기거나 하겠지.

    순수하게 생각하기에는 내가 너무 썩은 꼴을 많이 봤다. 인륜이니 뭐니 지껄이는 트리스탄이 이런 부분에선 전혀 도움이 안 될 거라는 확신도 덩달아 들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들어온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저쪽이 잠잠하다는 건 좀 이상하긴 하네.”

    그래도 아주 머저리는 아니군.

    황제는 우리를 마지 못해 황궁에 들여 주긴 하였으나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아주 간이 작은 새끼였다. 자기 아들이 몇 년 만에 돌아왔는데 연회를 베풀지는 못할망정 우리를 궁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두고 다른 곳에 인사 한번 안 시키다니.

    아마 황제도 불안하긴 할 것이다. 내가 언제 저벅저벅 알현실 한가운데로 걸어와서 ‘야, 왕관 내려놓고 유배나 좀 가라’ 같은 소리를 하진 않을까 겁날 테니까.

    난 진짜로 정정당당하게 황위를 건 비열한 정치질에 가담할 생각인데 조금 억울했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해 봤자 어차피 믿어 주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이래서 사람이 착하게 살면 손해를 본다.

    “움직이곤 있겠지. 날 향한 암살 시도가 없는 건 사실 좀 칭찬해 줄 만하네. 내가 불로불사인 거 뻔히 알면서 암살자 보내고 그랬으면 머저리라고 통탄할 뻔했잖니.”

    “당신은 불로불사여도 이르커스는 아니니까 암살자가 올 만도 한데.”

    “이르커스한테는 이미 한 번 왔었어.”

    “그래? 왜 난 몰랐지?”

    “그건 네가 무능하기 때문이야.”

    “뭐요?”

    “경비 서라고 데려왔더니 음식이나 축내고.”

    황궁에 입궁한 당일에 암살자가 찾아오긴 했다. 저쪽에서도 예의상 한번 떠보기는 해야 하니 안 보낼 수는 없었겠지.

    나한테 말고 이르커스한테 간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르커스는 입궁 환영 기념으로 자신을 찾아온 암살자를 죽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죽이지만’ 않았다.

    “첫날 이후로는 안 보내더라. 본인들도 손해라고 생각했겠지.”

    암살자를 보낸 곳이 명확하니 신문할 생각도 없었고, 설령 암살자가 자백하더라도 증거가 불충하니 고문할 생각도 없었다.

    이르커스는 그래서 암살자를 그냥 보내 줬다. 사지만 멀쩡하게 붙여서 보내 줬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백치로 만들어서 보낸 놈들에게 도로 반송한 것이다.

    나는 그 꼴을 보고 진짜 기함했다. 애가 죽이지 말라니까 더한 짓을 저지르네? 이 자식 이거 인간성을 버리라곤 했지만, 너무 한 무더기로 가져다 버린 거 아냐?

    이르커스가 저지른 꼴을 보고 충격 받아, 경매장에서 강탈해 온 총을 허겁지겁 개조했다. 마법 못 쓰게 해야지. 진짜 저놈한테 누가 마법 압수시켜야 해.

    총이라고 안전하진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사람 백치로 만드는 것보단 총으로 부상 입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총에 마탄까지 알뜰살뜰 장전해 둔 뒤,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앞으로 암살자가 찾아오면 백치로 만들지 말고, 그냥 이걸 쏴서 잡아.’

    ‘……이 총은 또 어디서 났어?’

    ‘비밀이다, 인마.’

    이르커스는 내가 준 총을 불만스럽게 살펴보긴 했지만, 결국 안 받을 거면 말라는 내 윽박지름에 휘말려 총을 챙겼다.

    검보다 부피가 작고 숨기기 쉬우니 호신용으로도 적합했다. 고도로 발달한 마도구라 마탄을 써도 일반 마법처럼 바로 티가 나지도 않고.

    아무튼, 내 입장에서는 이르커스가 더 비인간적으로 행동하기 전에 브레이크를 이것저것 걸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황제가 개 짜증 나는 건 사실인데, 남의 애 맡아서 인성을 버려 놓은 게 조금 미안해질 정도였다. 미안하다. 나도 애가 이렇게 자랄 줄 몰랐지. 콩나물로 키운 줄 알았는데, 키워 보니 대마초지 뭐야.

    “그래서, 세력은 어떻게 모을 거요?”

    “고작 일주일 지났는데 넌 뭐가 그리 성급하니?”

    “아니, 너무 답이 없어 보이니까 그렇지.”

    “답이 없기는. 네가 보는 눈이 없는 거란다.”

    이미 내가 들어온 것만으로 황궁의 판세는 뒤바뀌었다.

    불로불사인 대현자를 뒷배로 둔 3황자. 사생아라는 혈통이 좀 걸리긴 하지만 황제로부터 적통 황자로 인정을 받기는 했고, 소문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마법도 검술도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런 인물의 등장은 반군 기질을 품은 놈들에게는 언제나 희망의 싹이 되기 마련이다.

    “조만간 입질이 올 거야. 가만히 기다리다 보면 알아서들 물 거거든.”

    직접 나서는 건 너무 품격 없어 보이니까, 걔네가 더 못 기다리고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지켜보는 게 좋았다. 대어가 낚일 때까지 줄을 드리우고 기다리는 것처럼.

    허겁지겁 나서서 삐끼처럼 ‘너, 내 편이 될래?’ 하고 성급하게 움직이는 건 오히려 급박해 보여서 마이너스였다. 뭔가 있는 것처럼 굴면서 안 움직여 줘야 몸이 달은 변절자들이 ‘저 이런 놈인데 한번 받아 주십쇼’ 하고 넙죽 굴러들어오는 거다.

    “이게 무슨 낚시요? 입질이 오게?”

    “너 같은 바보가 뭘 알겠니.”

    나는 입이 잔뜩 튀어나온 트리스탄의 뒤통수를 툭 밀쳤다. 내 생각보다도 머리가 상당히 비어 있는지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놈이 용병 단장으로 일하면서 이제껏 사기 한번 안 당하고 살아온 게 참으로 용했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놈은 애한테 뭘 가르친 걸까?

    내가 이런 애들을 데리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죽는 거 한번 더럽게 힘들다. 남들은 잘만 죽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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