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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32화 (32/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32화

    “대현자는 확실히 위험인물입니다.”

    “그 외 3인은?”

    “신분을 위장하고 있지만, 카만의 붉은 매 용병단이더군요. 규모가 큰 곳은 아닙니다만…… 주축이라고 할 만한 단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 명 중 한 명은 마법사이고요.”

    “몇 년 감감무소식이더니, 바깥세상에서 기묘한 세력을 잘도 구축해서 돌아왔네. 참 아쉽단 말이야. 도망치게 두지 말고 어떻게든 꺾어 놨어야 했는데.”

    라단타는 제 말에 어깨를 흠칫 떠는 젊은 귀족을 바라보았다.

    은근히 드러낸 악의에도 위축되는 이가 있다는 게 우스웠다. 로베인 제국의 1황자이자 황태자인 라단타 아그니엘 로베인 주변에는 젊은 애송이들보다는 나이 든 능구렁이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아, 멜킨 경을 위해서 조금 순화해서 말할 것을 그랬나?”

    “……아닙니다.”

    “1황자. 스스로의 품위를 깎아내리는 말은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소.”

    구렁이 열두 마리는 삼킨 게 틀림없는 흰 머리칼의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멜킨 경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조부님 말씀을 받들어야지. 제 언행에 불쾌함을 느낀 이가 있다면 사과드립니다. 나이가 들어도 이런 자리는 익숙지 않아, 늘 이런 실수를 하게 되더군요.”

    라단타의 조부이자 황가의 외척 세력인 베첼 공작은 귀족파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였다. 그는 마흔이 넘은 시절부터 자신의 딸을 황비로 만들었고, 이르커스를 제외하면 살아남은 유일한 황실의 핏줄을 손주로 두었다.

    이젠 나이가 들어 노쇠한 탓에 그가 가진 야망도 조금 쇠락했을 뿐, 그는 제가 누리고 있는 것을 늙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는 이였다.

    라단타는 제 조부를 향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라단타 아그니엘 로베인은 베첼 공작의 저 음습한 성격을 똑 닮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정치에는 일절 뜻이 없는 황비와 다르게 베첼 공작의 손주인 라단타는 교묘한 솜씨로 사람을 찍어 누르고 괴롭히는 걸 좋아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허수아비처럼 굴면서, 뒤로는 제 조부의 속을 썩여 가며 형제들의 목을 쳐 버리는 것을 즐겼다.

    “3황자가 돌아온 것으로 다들 걱정이 많으신 건 알겠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기쁩니다.”

    “1황자께서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실종된 줄 알았던 형제가 무려 대현자를 모시고 제 발로 걸어 들어왔는데 기뻐할 일이지요. 이르커스도 형제가 아닙니까. 비록 반쪽짜리라고 하더라도.”

    가까이 있어야 암살 시도라도 쉽게 하지.

    라단타는 굳이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현자라는 거대한 장애물이 이르커스의 뒤에 버티고 서 있더라도 결국 황궁을 장악하고 있는 쪽은 자신이었다.

    “황제로부터 인정받았다곤 하나, 정통한 핏줄이 아닌 데다 궁내에는 세력이랄 것도 없으니 실상 큰 위협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옳은 소리입니다. 그렇게 정당성을 따져 대는 황제파 놈들이 저희와 대적하겠답시고 3황자에게 붙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붙고 싶어도 그럴 만한 명분이 없으니까요.”

    “문제는 대현자죠. 대현자가 3황자의 뒷배가 되었다는 것.”

    “황궁 마법사들이 벌써 소란스럽더군요. 공식적으로 대현자의 입궁을 알린 적이 없음에도…….”

    여기저기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불로불사, 남쪽 숲의 대현자 유안. 대현자는 칩거 기간이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륙 내 최고의 유명 인사였다.

    언젠가 기필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간은 불로불사의 존재를 오랫동안 선망해 왔다. 실존하는 불멸자는 마탑뿐만 아니라, 신전조차도 눈독을 들이는 상대였다.

    그러니 대현자가 조금만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한다면 내내 중립을 지키던 귀족들이나 황궁 외 세력들 역시 쉽게 이르커스 쪽으로 몸을 돌릴 게 뻔했다.

    “대현자를 이쪽으로 회유할 방법은 없겠습니까?”

    “들어 보니 3황자의 마법 스승이라고 하더군요.”

    “오, 엘리오스시여……. 그러니 3황자에게 마법 구속구가 전혀 안 먹혔던 것이군요.”

    “애초에 3황자의 모친이 마녀였으니 마법적 재능은 타고났을 겁니다.”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3황자가 아무리 세력이 없더라도 마법 구속구도 통하지 않는데, 위험하지는 않을지…….”

    “조사해 보니 입궁 전까지 용병 생활도 꽤 했습니다. 마법뿐만 아니라 검술 실력도 수준급이더랍니다.”

    라단타는 수군거리는 귀족파 수장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간악한 자들이었다. 베첼 공작처럼 저와 핏줄로 이어지지 않았으니, 상황을 지켜보다가 세력 구도가 기울면 얼마든지 박쥐 새끼처럼 상대편으로 넘어가 버릴 이들.

    이런 정치판에는 영원한 내 편도, 적도 없다. 악수하며 서로의 등에 비수를 꽂고, 물에 빠트리는 척하며 먹을 것을 던져 주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저렇게 달뜬 얼굴로 로베인 제국의 미래를 논하는 이들 중에 실제로 제국의 이익을 생각하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장 눈앞의 손익만을 중시하는 놈들이니, 라단타에서 이르커스로 세력이 기울어진다 싶으면 언제 어떻게 줄을 갈아타야 할지나 고민할 족속들이었다.

    “대현자는 정말 불로불사일까요?”

    말 한마디로 작은 소란을 잠재운 후, 라단타는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승계 싸움은 언제나 혈투였고, 한 번 얻은 자리를 지키는 건 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현자의 등장이 제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걸 이들에게 보여 줘야만 했다.

    대현자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스승과 제자라는 사이가 핏줄보다 깊지야 않겠지만, 끊어 내기 어려운 것은 분명해 보였다.

    황궁 기사단이 이르커스를 데려가기 위해 남쪽 숲으로 찾아갔을 때도 대현자는 로베인 제국과 노골적으로 척을 지면서까지 이르커스를 보호했다.

    그간 남쪽 숲에 칩거하며 마법 연구를 제외하면 대륙 정세에 관심 하나 보이지 않았던 대현자가 이르커스 하나 때문에 제국에 불쾌감을 드러낸 건 확실히 이상했다.

    “불멸자가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이 필멸자를 도와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현자에게 어떤 목적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없을 리가 없겠죠. 아무리 인간보다는 신에 가까운 존재라곤 하나, 대현자도 결국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라단타는 이르커스의 면면을 떠올렸다.

    마녀인 모친을 닮아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그 얼굴은 머릿속에 그리는 것만으로 속이 뒤틀리게 만들었다.

    정통한 핏줄도 아니면서 형제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하다. 이르커스의 존재는 라단타에게 항상 위협을 안겨 주었다.

    역시 한참 어렸을 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도망치는 것을 붙잡지 못해 방치하고 내버려 두었더니 손대기 껄끄러운 상태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르커스의 모친이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려 사는 것을 포기하고 황궁을 떠난 이후로, 어린 이르커스에게 내밀어진 도움의 손길들을 전부 잘라 낸 건 라단타였다.

    라단타는 다른 형제들처럼 쉽게 죽어 주지 않는 이르커스가 정말 싫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존재는 언제나 그의 심사를 꼬이게 만들었으니까. 죽일 수 없다면 철저히 고립되어 말라비틀어지기를 바랐건만.

    “이르커스와 대현자가 평범한 사제 관계인지 알아볼 필요성은 있겠습니다.”

    “……예?”

    “대현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기사 단장이 그러길 두 사람 사이가 퍽 애틋해 보였다던 걸요. 3황자는 퍽 어여쁘게 생겼으니 의심이 들 수밖에요.”

    “하지만…….”

    “착각들 마세요. 불멸자이긴 해도 대현자도 그저 인간입니다.”

    신격화된 존재에 흠집을 내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심증만 존재하고 물증이 없으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어떤 돌도 계속해서 두드리면 무너지고, 흠집이 나기 마련이다. 없던 일도 황궁 사용인들의 입을 몇 번 거치고 나면 살이 붙어 증거가 된다.

    라단타는 대현자의 명예를 바닥으로 떨어트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회유하여 제 편으로 만들 수 없다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없애 버려야 한다. 판을 뒤흔드는 조커는 애초에 카드 패에 섞이지 않게끔 빼 버리는 것이 옳다. 다 이겨 가는 판에 변수를 줘선 안 되니까.

    일단, 대현자와 이르커스가 붙어 있지 못하게 판을 짜야 했다. 개별로 상대하는 것도 힘든 존재들이 뭉쳐 있으면 전혀 승산이 없었다.

    “멜킨 경.”

    “예? ……아, 예.”

    “마탑에 연통을 넣어 보시겠습니까?”

    한창 자기들끼리 대현자의 위대함에 대해 열을 올리던 귀족들이 일제히 라단타를 돌아보았다. 베첼 공작은 그 옆에 앉아, 제 손주가 무슨 말을 더 꺼낼지 담담히 기다렸다.

    베첼 공작이 생각하기에 제 손주, 라단타는 대단한 걸작이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어리광이 심한 손녀인 마리아와 다르게 생각이 깊고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제 형제들을 죽이고 나서도 자연스럽게 없던 일로 묻어 버리지 않았나. 그런 아이가 내내 칩거해 왔던 대현자 하나 치워 버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죽이지는 못해도, 이 판 위에서 몰아낼 지략 정도는 있을 테다.

    “라디, 어쩔 생각이냐?”

    “무엇을요?”

    “대현자 말이다.”

    “저런, 공작님께서도 참……. 이런 고상한 자리에서 너무 친근하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실례했군. 대현자 화두가 계속 이어지다 보니 이 늙은이가 잠시 어떤 자리인 줄 잊었나 봅니다.”

    가문을 위해서라지만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돕고 있는 제 조부에게도 간교하게 구는 자다. 베첼 공작은 저를 오만하게 대하는 라단타를 보며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제 손주에게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성군은 되지 못하더라도 황제가 될 자질은 충분한 아이였다. 마법사는 될 수 없을지언정 혈통도 심계도 이르커스보다 몇 배는 뛰어난 아이였다.

    “무슨 생각이라……. 뭐, 제게 무슨 혜안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전 아직 공작님에 비하면 애송이에 불과한 것을요.”

    라단타의 잘 다듬어진 손끝이 회의실의 대리석 테이블을 툭, 툭,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저 대현자를 가장 필요로 할 곳에 연락 한번 넣어 보려는 것이지요. 마탑은 언제나 대현자를 존경해 왔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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