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31화
“이야, 역시 황자로 태어나고 볼 일이다.”
“야, 우리 애 침대에 네가 왜 누워? 뒈질래?”
“아니, 이르도 가만히 있는데 왜 대현자 당신이 난리야?”
나는 장정 세 명이 누워도 자리가 남을 만큼 넓은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리는 트리스탄을 발로 밀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르커스가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난리를 치는 거 아냐. 나는 이르커스의 어깨를 꽉 붙잡고 네 침대에 아무나 못 올라가게 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놨다.
“애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누구? 이르커스가?”
“그럼 네가 착하겠니? 야! 호위로 따라왔으면 너희 다 방 밖으로 꺼져! 경비를 서야 할 거 아니니, 경비를!”
이르커스가 착하다는 내 말에 트리스탄을 비롯한 다른 두 놈도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저게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이었다.
트리스탄도 뭐라고 입을 벙긋거리며 항변하려는 모양새였지만 들어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아무렴 저놈들보다 내가 이르커스를 봐도 몇 개월은 더 봤는데, 쟤네보단 잘 알았다.
붉은 매 용병단 3인방은 결국 더 구시렁거리는 대신, 입이 댓 발 나온 채로 방을 나갔다. 명색에 대현자가 저렇게 잘 속아서 어쩌냐는 비난 섞인 투덜거림이 우스웠다.
내가 속긴 뭘 속아. 이르커스 같은 어린애가 감히 나를 어떻게 속인단 말인가?
어른들이 착한 애를 칭찬하고 바른길로 이끌어 주진 못할망정 애 착하다는 소리에 의뭉스럽다는 표정이나 짓고 있다니. 세상 꼴 잘 돌아간다. 이 꼴 보기 전에 역시 뒈졌어야 했는데.
나는 트리스탄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침대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이르커스가 그 옆으로 우물쭈물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이르커스의 팔을 잡아당겨선 같이 침대 위로 눕혔다.
“내가 아무나 못 올라가게 하라고 방금 말했는데, 또 가만히 있지.”
“……당신은 아무나가 아니잖아.”
“그럼 뭔데?”
“나한테 필요한 사람.”
“영특하긴. 내 말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 좀 봐.”
“틀린 말 아니니까.”
이르커스와 오래 알고 지낸 건 맞지만, 이렇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누워 본 건 처음이었다.
남쪽 숲의 아틀리에에서 함께 지낼 때도 이르커스에게 따로 방을 내주었고, 캐러벨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방만큼은 따로 썼다.
각방 사용에 별다른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다. 각자 사생활이 있고, 공간도 충분한데 굳이 들러붙어 지낼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남쪽 숲이나 카만이나 내 입장에서는 경계해야 할 만한 지역이 아니기도 했고.
“나는 바로 옆방에 있을 거야.”
“같은 방을 쓰는 건 싫어? 그편이 더 효율적이잖아.”
“황자님이랑 내가 어떻게 같은 방을 쓰니? 이 각박한 신분제 사회에서.”
“그 신분제 사회에서 내가 황자인데.”
“무슨 추잡한 소문이 날 줄 알고. 옆 방이면 족하다.”
하지만 황궁은 얘기가 다르다.
이르커스는 정식 데뷔탕트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미성년이었다. 물론 웬만한 성인들보다 성숙한 구석이 있어 나도 가끔 이르커스가 정말 갓 태어난 인간이라는 걸 까먹기는 한다. 열일곱이면 진짜 어린 건데, 이르커스는 귀엽지 않게 앳된 구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인간의 겉모습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르커스의 알맹이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내가 시키는 대로 살다가 인성 버린 어린애였다.
이런 어린아이에게는 여전히 강한 보호자가 필요한 법이다. 길버트가 들었다면 ‘그거 좀 억지 아냐?’ 라고 비난의 말을 던졌겠지만, 이곳은 남쪽 숲의 아틀리에가 아니라 로베인 제국의 황궁 안이기 때문에 길버트의 나뭇가지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은 내가 정말 위험할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넌 애야. 애들은 원래 풀어 놓으면 어디로 튈지 몰라서 위험해.”
“그런 것치곤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잖아.”
“네가 다칠까 봐 걱정하겠니? 네가 수틀리면 눈치 안 보고 여기저기 개 박살을 낼까 봐 걱정하는 거지. 에휴, 어쩌다 너처럼 착한 애가 나 같은 스승을 만나서…….”
“사고 치지 말라고 하면 안 그럴게.”
“그래. 여기저기 박살 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넌 얌전히만 있으렴. 손에 피 묻히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말을 해.”
“과보호가 틀린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
“트리스탄, 그 새끼가 뭘 안다고.”
이르커스의 눈썹 끝이 아래로 축 처졌다. 마주 보고 누운 채여서 그런지 시무룩해진 표정이 눈에 너무 잘 들어왔다. 혼내려고 한 건 아닌데, 괜히 어린애 기를 죽인 꼴이 됐다.
과보호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다. 나는 지금 이르커스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이르커스에게 알짱거릴 미래의 황궁 인물들의 수명을 연장해 주고 있는 거다.
이르커스는 조지게 강하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 내가 이르커스랑 일대일로 붙어도 한 번에 제압할 자신이 없을 만큼.
살아온 세월의 차이가 있으니 당장은 내 승리를 확신할 수 있지만, ‘상처 없이 이르커스를 제압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답은 ‘아니’였다. 공격 마법 몇 개 때려 넣어야 하니, 이르커스랑 싸우게 되면 대륙 3분의 1 정도는 날려 먹을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내가 죽은 후에도 황제로 사는 데 문제없게끔 자연스러운 즉위를 도모하기 위해 낙뢰 안 치고, 패륜 안 저지르며 황궁까지 들어왔는데 그런 재해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르커스가 그럴듯한 명분도 없이 남을 공격하거나 죽여 버리면 수습하기가 어려워진다. 뭘 패고 박살 내도 소속이 없는 내가 하는 게 낫지. 이르커스는 소속도 신분도 너무 확실했다.
지금 나이에도 이 정도인데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면 애가 얼마나 강해지겠는가? 아무리 판타지 소설 주인공이라지만 이 정도면 밸런스 붕괴였다. 마법사랑 마녀 개체 수 조절해서 세계관 밸런스 조정하면 뭐 하냐. 주인공이 세계관 와작와작 씹어 먹는 먼치킨인데.
그래서 풀어 두면 걱정이라는 소리가 나온 거다.
딱히 세계를 멸망시킬 계획도 없고, 대륙을 통일할 욕심도 없으며, 죽는 거 말곤 대단한 걸 바라지도 않는 나조차도 걸어 다니는 핵폭탄 취급을 받았다.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가 언제 어디서 공격 마법을 어떻게 쓸지 모르니 걸어 다니는 자연재해쯤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한 개인이 강함의 평균치를 지나치게 많이 넘어 버리면 두려움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르커스도 자신의 강함을 안다면 몸을 좀 사릴 필요가 있었다. 인간은 실수로 쓴 마법 한번 잘못 맞으면 죽는 연약한 생물이다.
이르커스에게 ‘살인은 나빠!’라는 인식이 명확하게 박혀 있을 때는 이런 강함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르커스는 암살 의뢰를 쿨하게 받아들일 만큼 사람을 죽이는 일에 무뎌지게 되었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인간성을 버릴 줄도 알게 되었다.
이건 내 탓이다. 내가 그렇게 키웠으니까.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애가 백자면 뭐 하냐? 내가 먹물인데.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지만, 난 교육에 더럽게 소질이 없었다.
“아니다. 자잘한 사고는 쳐도 되는데, 수습되는 사고로 쳐.”
“어디까지가 수습할 수 있는 건데?”
“일단, 마법은 웬만하면 쓰지 마. 말싸움에서 못 이길 것 같으면 그냥 다 못 들은 척하고.”
“그리고?”
“누가 나한테 시비 털어도 네가 참으렴. 검도 웬만하면 뽑지 마. 살인내면 안 된다. 살인만 아니면 된다고 팔다리 부러트리고, 번개 꽂고, 이러는 건 더 안 돼.”
“당신은…… 하면서.”
“너랑 내가 같니? 난 대현자고 넌 3황자인데? 억울하면 네가 400년 살아서 대현자 하렴.”
황제를 협박해서 황궁에 들어온 이상, 이르커스와 나는 이제 정치판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됐다.
아마 졸개에 불과해 보이는 (그래도 바깥에선 용병 단장인데) 트리스탄은 다들 신경도 안 쓰겠지.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조차 안 할 것이다. 정치판은 검을 얼마나 잘 쓰나보다 혀를 얼마나 잘 놀리는지, 얼마나 비겁해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정치에 익숙하고 정보전에 도움이 될 만한 에델라이드를 챙겨 오지 못했으니 거의 모든 정치 싸움은 내가 맡게 될 터였다. 나도 비겁한 걸론 어디 가서 지지 않는다.
이르커스는 너무 착해서 정치같이 간악하고 교묘한 속임수엔 재능이 없다. 표정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애인데, 그런 힘든 일을 어찌 시킨단 말인가. 트리스탄은 내 반응에 그냥 제자를 향한 콩깍지라고 혀를 찼지만, 그래도 내가 스승인데 도리가 있지.
문제는 이런 정치판이 절대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국회만 떠올려 봐도 이 사실은 금방 깨달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회에서 무협지 찍는 게 정치인데, 안 그래도 차별 끝내주는 이 판타지 세계에서는 어떻겠는가? 내가 대현자라는 사실보다 내 검은 머리랑 검은 눈이 껄끄럽다는 인간이 한 트럭인데.
“너 욕하는 놈들은 몰래 한두 대 족쳐도 되는데, 나 욕하는 놈들은 그냥 내버려 두라고. 알겠니?”
내가 욕먹는 건 사실 당연하다. 그간 온갖 인사들이 남쪽 숲에 찾아와서 자기 나라 전쟁 도와달라고 할 땐 얼굴 한번 안 비추던 대현자 새끼가 갑자기 실종됐던 3황자의 스승이랍시고 깜짝 출현한 거니까.
칩거하고 살던 대현자가 갑자기 권력에 미쳐, 3황자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섭정이라도 할 모양이라며 수군거릴 미래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정치적인 비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온갖 모욕이 섞인 인신공격이 따라붙을 것이고.
내 머리 색과 눈 색은 기본이고 불분명한 소속과 출신에 불멸자라는 특성까지 싸잡아 물고 늘어질 게 안 봐도 뻔하다. 세월이 아무리 지났어도 인간은 참 한결같다. 역사를 배우면 뭐 하는가? 싹 다 잊고 헛짓거리를 반복하는데.
물론 안 그런 놈들도 있겠지만,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나를 물어뜯으려는 놈들이 태반일 것이다. 고상한 척은 조금 하겠지. 하지만 광견이 고상한 척해 봐야 개라는 근본이 변하진 않는다.
“왜 대답이 없지?”
별로 어려운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닌데 이르커스는 내 충고에 이렇다 저렇다 답이 없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건 덤이었다.
나는 이르커스가 미간을 구기지 않도록 손을 뻗어 미간 사이를 세게 문질러 닦았다. 고개를 뒤로 젖혀 피할 법도 한데, 이르커스는 붉게 변한 미간 사이가 아프지도 않은지 그 상태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빌미로 공격하려 드는 인간을 눈감아 주지 못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네.”
“…….”
“다 알고 있으면서.”
……아이 씨, 진짜.
사춘기 애들은 정말 어디로 튈지 짐작이 안 된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모르겠니? 나, 400년 살았는데? 그만큼 살고도 타인이 가진 감정 하나 눈치채지 못하는 건 대현자가 아니라 대바보다. 두꺼비도 백 년 넘게 살면 영물 되는데 인간이라고 다를까.
나는 미간을 문지르던 손을 쫙 펴서 이르커스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어, 내게서 멀리 밀어 버렸다.
“내가 알긴 뭘 알아.”
“유안.”
“난 아무것도 몰라.”
눈새 짓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어차피 이르커스가 나이를 먹고, 옆에 자기랑 비슷한 시간 선을 살아가는 미남미녀들을 보고 나면 지금 나에게 향한 애정은 그저 동경으로 남을 것이다.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오리가 정신 못 차리고 구애하는 거에 마음이 흔들렸다간 불멸자 인생이 조져지는 수가 있었다.
나는 지금 나 죽는 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못 죽으면 얘 죽는 걸 봐야 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 알고 있잖아.”
손바닥에 이르커스의 미약한 숨이 닿았다.
“아니, 몰라.”
“…….”
“너와 내 위치를 잊지 말렴.”
지금 이 정도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이 얄팍한 관계는 서로에게 해악만 끼치게 될 터였다.
얻는 건 없고, 손해만 나는 관계를 길게 맺을 수는 없다. 최대한 오래 함께하다가 괜찮은 이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적정 거리를 지켜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방인이고, 이르커스는 주인공이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불멸자고, 이르커스는 필멸자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태어났고,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이게 우리를 위한 최선이야. 알겠니?”
이르커스가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손바닥엔 얕은 숨결이 느껴졌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자색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