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30화
카만 왕국만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사실 로베인 제국도 싫어한다.
역시 나는 무정부주의자인 것 같다. 아니면, 인간들의 국가 체계에 진절머리가 나 버린 평범한 불멸자거나.
제국에 대해서도 썩 좋은 기억이 없었다. 예카리나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이었고, 그 이후에 황궁 마법사로 살다가 13대 황제에게 목이 잘렸을 때는 예카리나의 죽음에 비할 만큼 끔찍했다.
그래도 여기로 떨어질 때 제일 먼저 발 디딘 곳이 황궁 호수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알게 모르게 고향 같은 느낌이 있긴 했다.
내 진짜 고향은 한국 서울의 모 산부인과일 테지만, 여기서는 일단 첫 시작지가 로베인 제국이니까.
“이야, 황궁도 오랜만이다.”
“황궁 마법사로 일한 적 있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게 언제 적 얘기니? 세기가 다른데.”
“늙은이 티 내기는.”
붉은 매 용병단의 용병 단원인 로버트가 모는 마차에는 총 네 명의 인간이 타고 있었다. 나와 이르커스, 그리고 트리스탄과 다른 용병 단원이자 마법사인 한네만.
물밑에서 포섭해 둔 인원이 더 있기는 했지만, 동행하는 사람은 정말로 믿을 수 있을 만한 이들로만 골랐다.
테리즈의 건강과 나이트 펠로우의 계승을 위해 캐러벨에 남아야 한다는 에델라이드를 끝까지 설득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이 정도 인원이면 황궁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기에는 충분했다.
이르커스의 열일곱 살 생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드디어 황궁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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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인사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설마하니 황제 알현보다 먼저 감옥 구경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괘씸한 새끼들을 어쩌면 좋지? 역시 황궁에 불을 지르고, 황제의 목을 자른 다음 억지로 왕관을 이르커스의 머리 위에 씌우는 게 더 나은 일인지 아닌지를 좀 고민해 봐야 하나.
마음만 먹으면 검을 겨누며 건방지게 구는 기사들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첫 황궁 입성 이벤트부터 큰 사고를 칠 순 없었다. 들어오자마자 불 지를 거였으면 이르커스가 열두 살일 때 벌써 저질렀지.
“신분이 증명될 때까지 잠시 구금하겠습니다.”
약 5년 전에 남쪽 숲 입구에서 봤던 중년의 기사 단장은 아직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나이를 더 먹어 허세가 잔뜩 낀 중년 남성의 얼굴은 참으로 꼴 보기 싫었다. 기사단장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내 손목에 마나 제한 구속구를 채웠다.
이 구속구, 개발한 거 나인데……. 그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나 이르커스처럼 대단한 마나 양을 보유하고 있는 인간에게는 소용없는 물건이었다. 제어기가 마나 총량을 못 버티기 때문이다. 그냥 무거운 팔찌 정도라고.
마법사가 아닌 트리스탄과 로버트한테도 마나 제한 구속구를 채우는 게 우습기도 했다. 딱 봐도 저 둘은 검사지 마법사가 아닌데, 대현자 일행이라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꼴이 웃겼다.
“내 머리 색이랑 눈 색으로 신분 확인이 안 되는 건 또 오랜만이네.”
“…….”
“너희 그냥 우리 엿 먹이려고 붙잡아 두는 거 아니니?”
물론 정치는 원래 쇼맨십이니 이놈들이 이러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남쪽 숲으로 들어가 실종 처리됐던 3황자가 제 발로 다시 황궁에 걸어 들어왔으니, 이미 권력을 잡고 있던 놈들한테는 내쫓은 바퀴벌레가 죽지도 않고 다시 돌아온 것 같을 터였다.
“한 시간 줄게.”
하지만 왜 내가 감옥에 구금되는 건지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빡친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기껏 이르커스 데리고 고향 방문했더니 냉대 받는 입장이 됐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나는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는 기사 단장과 그 뒤에 열을 맞춰 서 있는 기사들을 향해 오른손을 쭉 뻗었다.
고작 오른손 하나 뻗은 것뿐이고 마나 운용은 하지도 않았는데 검을 빼 드는 기사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전에 나를 한 번 상대해 본 기억이 있는 놈들이다 보니, 내가 또 검을 터트리기라도 할까 봐 느슨하게 검을 쥐고 있는 꼴이 같잖았다.
“한 시간 안에 황제가 여기로 안 오면, 오늘 황궁 불타는 거다.”
마치 천 원 줄 테니 2천 원짜리 빵을 산 다음에 3천 원 남겨 오라는 뉘앙스였지만, 알아서 쫄아 붙은 상대에게는 그럭저럭 잘 먹힌 것 같았다.
나는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더니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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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커스의 아버지이자 현재 21대 황제인 중년 남자는 생각보다 평범한 얼굴이었다.
준수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그간 초절정 미남 황제들만 보다가 빛나는 금발 말고는 그저 그런 훈남형 황제를 보니 실망이 컸다. 어떻게 저 얼굴에서 이르커스 같은 미소년이 태어났는지 유전학의 신비를 밝혀내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 모계 쪽이 엄청난 미인이었겠지. 이르커스의 어머니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예카리나의 후손일 테니 안 봐도 미인일 것 같기는 했다.
“그쪽이 대현자로군.”
“그래. 내가 대현자다.”
따지자면 이건 진짜 학부모 면담 같은 거였다. 나는 이르커스의 스승이고, 저쪽은 이르커스의 아버지니까.
하지만 황제는 내게만 관심을 보일 뿐, 내 뒤의 용병단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기 아들인 이르커스에게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이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보통 높은 자리에 올라가 권력을 차지한 놈들은 대다수가 또라이다. 이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못했어도 내 지난 세월이 증명해 주는 진리였다.
자기가 누리는 게 너무 좋아서 황제 자리를 천년만년 유지하고 싶어 또라이가 되는 경우는 흔했고, 국가 운영 한번 잘해 보겠다고 기를 쓰고 돌아다니다가 정신이 나가 폭군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황제는 앞서 말한 그런 종류의 또라이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놈은 그냥 기분파 또라이였다. 혁명을 일으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놈들이 아니라, 태생부터 황족 핏줄이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황제가 되는 인간 중에는 이놈 같은 부류가 많았다. 몸은 나이를 먹는데, 정신 연령은 높아지질 못해서 늙은 얼굴로 애 같은 짓거리를 벌이는 놈들.
“아들이 반갑지는 않은가 봐? 몇 년 만에 봤는데도.”
“아무리 대현자라고 해도 황제에게 격 없이 말하는 걸 허락한 적은 없을 텐데.”
“불만이야?”
“무엄하군.”
“상사가 이러니까 기사단장들이 다 똑같이 말을 하지. 야, 난 너 말고 다른 황제들한테도 다 반말했어.”
내 반격에 황제의 주름진 미간이 팍 구겨졌다. 안 그래도 나이를 먹어 못남을 숨길 수 없는 평범한 얼굴이 구겨지자, 그걸 보고 있는 내 기분도 덩달아 나빠졌다.
이르커스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황제와 매한가지로 이르커스 역시 제 아버지를 향해 살가운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딱 이 순간만 보고도 이 부자가 예전에 어떤 사이였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 저 황제는 자기 기분과 지위 같은 것에만 신경을 쓰지, 낳아 놓은 자식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한 적이 없을 게 분명했다.
“3황자는 몰라도 대현자, 당신 같은 위험인물을 궁 안으로 들일 수는 없어.”
“내가 협박했던 거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니? 참 쪼잔하다.”
“……3황자는 받아 주지. 그 뒤에 있는 인간 셋도.”
이건 명백한 축객령이다. 그러니까, 자기 아들이랑 자기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만한 놈들은 안으로 들여 줄 수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나는 도로 남쪽 숲으로 꺼지라는 뜻이었다.
이르커스야 혼자 둬도 알아서 잘 황제가 될 테지만, 그럴 경우 황제 즉위까지 긴 시간이 소요될 게 뻔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이르커스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것도 문제였다.
“뭘 잘 모르나 본데…… 이르.”
황제는 자기 아들이 먼치킨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짐작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이르커스가 힘을 숨긴 적은 없겠지만, 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마나 양만 넘쳐 나는 어린애에 불과했으니까.
나는 내 부름에 가까이 다가온 이르커스를 황제 앞에 세워 주었다.
극적인 부자 상봉의 순간을 연출할 때가 왔다. 여기서 기선 제압하고 들어가야 좋은 방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낼 수 있게 될 터였다. 이런 냉기 도는 감옥이 아니라.
“네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사람들이 좀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죽여?”
“미쳤니? 얘가 어디서 패륜을 배워 와서…… 온건한 마법으로 해. 공격 마법 금지야.”
“……알았어.”
이놈들은 여기서 나만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마법만 쓰고 검은 안 다루지만, 이르커스는 마법도 쓰고 검도 다룬다. 게임식으로 클래스를 나눠 본다면 마검사라는 소리다. 게다가 마법도 검술도 모두 수준급이었다. 마녀의 후손이니, 이런 구속구가 무용지물인 건 두말 할 것도 없었고.
이르커스는 별 불만 없이 내가 시키는 대로 구속구를 찬 채로 기상 변화를 일으켰다.
처음 가르쳤을 때는 함박눈 대신 진눈깨비를 흩날리더니, 이제는 빛 하나 잘 들지 않는 감옥에 새하얀 눈발을 날리는 게 제법 수준급이었다.
나는 제 아들에게 구속구 따위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막 깨달은 황제와 그 뒤의 기사들을 바라보며 왕세자 낳은 후궁처럼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쩔지? 내 제자다?’라는 의미가 포함된 표정이었다.
“이래도 너희가 나 없이 3황자를 잘 돌볼 수 있겠니?”
어림도 없을 것이다. 이르커스는 사실 내 조기 교육 실패로 인해서 나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되었으니까. 이래서 교육이 중요하다는 거다.
나는 이르커스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언제 또 키가 자랐는지, 이전까지만 해도 엇비슷했던 눈높이가 살짝 더 높아져 있었다.
이젠 ‘돌본다’는 표현에는 어패가 있겠지. 이르커스는 어느새 청소년이라기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외양이었다. 성장이 빠른 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앳된 티가 전혀 없었다.
내리는 눈발 속에서 이르커스가 천천히 고개를 젖혀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르커스의 보라색 눈은 언제나 올곧게 나를 향해 있었다.
“이르커스한테는 내가 필요해.”
황궁에서 내쫓기지 않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내가 내뱉은 그 빈 쭉정이 같은 말은 꼭 저주처럼 들렸다.
나는 마녀가 아니라서 저주 같은 건 할 수 없는데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