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29화
이런 뇌물 수수 방식이 안 통하는 인간이 열에 하나 정도 있기 마련인데, 그게 테리즈 펄번일 줄은 몰랐다.
“에델라이드는 안 돼.”
“왜? 가업을 이어야 해서? 가업은 그냥 잇고, 겸사겸사 황제 측근도 해 보라니까?”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네가 남쪽 숲 전부를 카만에 넘겨주겠다고 해도 내 손녀를 로베인으로 보낼 수는 없다.”
테리즈 펄번은 속물이다. 이 명제는 참이다. 테리즈는 돈을 좋아한다. 적당히 부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된 뒤로는 젊은 시절의 신념도 스스로 꺾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결국 어디 한군데가 무뎌진다는 뜻이니, 딱히 비판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다.
테리즈 같은 인간들은 내 기준으로 늘 포섭하기 쉬운 상대였다. 적당한 대가를 제시하면, 그게 뭐가 됐든 쉽게 팔아넘기곤 했으니까.
당시 이르커스의 위치를 팔아넘길 생각을 했던 테리즈라면, 어마어마한 착수금에 손녀인 에델라이드를 몇 년 정도는 내게 빌려줄 거라고 생각했다.
남의 나라 가서 생활하는 게 고생스럽기는 하겠지만, 에델라이드는 어디 가서 쉽게 객사할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마법사는 아니더라도 테리즈를 닮아 충분히 강했고, 마녀들만큼이나 고집도 셌다. 이제 에델라이드는 테리즈의 보살핌이 필요 없는 성인이었다. 오히려 보살핌이 필요한 쪽은 늙은 테리즈였다.
“위험할 일 없을 거야. 에델도 가고 싶어 할걸? 아닌 척해도 모험을 즐기는 편이잖니.”
“황궁 정치가 모험은 아니지. 그리고 에델은 지금 나이트 펠로우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다.”
“네가 죽을까 봐?”
“그래.”
“참 각별한 조손 지간이야. 넌 늘 에델에게 엄격했는데, 에델이 어떻게 널 그렇게 따르는지 놀랍기만 할 뿐이다.”
에델라이드는 테리즈처럼 야망 있는 장사꾼이었다. 파는 게 물건이 아니라 정보라서 그렇지, 어떤 사업을 벌여도 대성할 만큼 똑 부러지고 기백이 넘쳤다.
물론 아직 속세에 물들지 않았던 시절의 테리즈를 그대로 빼다 박았으니, 자신과 닮은 할머니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테리즈가 운영하는 나이트 펠로우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에델라이드에게 운영권이 계승될 예정이었다.
제국에 소속된 정보 길드와 접선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나는 황궁 뒷 정치의 일환으로 카만의 정보 길드인 나이트 펠로우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기 수장인 에델라이드를 이르커스 옆에 붙여 두는 작업이 필요했다.
에델라이드는 이르커스를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내가 테리즈의 건강을 주기적으로 점검해 주기 때문에 예전처럼 이르커스에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에델라이드처럼 똑똑한 아이가 이르커스의 심복이 되어 주면 내가 죽은 뒤에도 정보전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참 아쉬운 일이었다.
“늙은 몸으로 오래 사는 건 고통의 연속이지. 가끔은 에델이 널 데려와서 내 수명을 늘린 게 원망스러울 때가 있어.”
“네 명줄 긴 걸 왜 또 내 탓을 하고 그러니? 넌 툭하면 남 탓이라니까.”
“미련이 생기잖아.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에델을 보고 있으면 내 죽음 이후를 걱정하게 돼. 그때가 되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일 텐데 말이다.”
“죽음이 두렵나?”
“너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아마 죽음을 두려워할 거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 수 없고, 남은 사람들의 미래 역시 알 수 없으니까.”
인간의 정이라는 건 때때로 이렇게 무서웠다. 테리즈도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조금만 두드려 보면 에델라이드를 로베인 제국의 황궁으로 보내는 게 큰 이득이라는 걸 알 터였다. 테리즈는 그런 셈에 밝은 사람이니까.
그런데도 자기 핏줄이라는 이유로 제 옆에 두고 손해를 감수하려는 게 우스웠다. 자기 가족을 이토록 아끼는 사람이 한때는 모든 걸 희생할 각오로 혁명을 꿈꿨다니, 이 얼마나 거짓말 같은 일인가.
“난 내 손녀를 사랑해. 내가 죽은 뒤에도 에델이 좋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지.”
“대다수가 그렇지. 자기 핏줄을 아끼지 않는 경우는 드무니까. 인간도 결국 한낱 짐승에 불과하고…….”
“묻고 싶은 게 있어, 유안.”
“뭔데?”
“너, 이르커스를 사랑하니?”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테리즈 눈에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보였던 걸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테리즈 펄번은 대현자를 원망하는 데 반평생을 쓴 인간이기 때문에, 나에게 어떤 인간적인 부분을 기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스운 질문을 하는구나.”
“죽기 위해 아이를 돕는다는 네 말은 어딘가 모순돼 있어.”
“영생 저주에 대해서 네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걸 테지.”
“아니. 그 저주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네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거다. 넌 지금 죽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 내가 너보다 덜 살기는 했어도, 이 정도 구분은 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었단다.”
“그럼?”
“넌 네가 죽은 뒤, 남은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잖아. 지금의 내가 그러하듯이.”
나는 정말 죽고 싶다.
이건 절대 불변의 진리다. 400년쯤 산 인간이 더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건 정말 큰 문제다. 4세기 동안 그 난리를 겪어 놓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거니까.
삶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죽음이라는 명언도 있는데, 그 가장 큰 선물 받기 싫다고 땡깡 부리기에는 내가 아직 제정신이었다.
그러니 이르커스의 등장은 내게 구원과도 같았다. 이르커스는 높은 확률로 황제가 될 인물이었고, 나를 죽여 줄 만한 주인공이었으며, 기꺼이 (조금 질문과 의심이 많기는 했지만) 나와 마법 계약을 맺었다.
“백번 양보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애정은 맞겠지. 너는 지금 이르커스에게 너무 많은 정을 주고 있어. 너답지 않은 일이야.”
“내가 에델라이드를 데려가겠다고 한 것 때문에 지금 나를 비난하려는 거니?”
“그 문제와는 별개다. 이건 죽기 전에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충고지.”
“…….”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존재가 인제 와서 사람들이랑 몇 년 섞여 살았다고 제대로 사람 구실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넌 정말 대단한 머저리야.”
지금 내가 이르커스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는 건, 선물처럼 나타난 희망을 향해 투자하는 것에 불과하다.
정을 준 건 사실이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예카리나가 다윈에게 한 것처럼 뭐든지 다 퍼 주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 줄 생각은 없었다.
“넌 네 감정을 인정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해.”
“…….”
“네 고집 때문에 너희 둘 다 분명히 힘들어질 거다.”
나는 이런 류의 말들을 잘 알고 있었다. 여러 번 들어 봤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 동급생의 ‘트럭에 치여 죽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나, 예카리나의 ‘너도 언젠가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었다.
테리즈의 저 말은, 일종의 예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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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은 결국 포섭에 실패했어.”
“정보 길드가 꼭 나이트 펠로우여야 할 필요는 없잖아.”
“널리고 널린 게 정보 길드니 그거야 그렇지.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상대를 옆에 두는 게 낫잖니?”
“에델라이드 펄번을 믿어?”
“못 믿을 건 또 뭘까. 에델은 네가 천재라는 걸 직접 겪어 본 몇 안 되는 사람인데.”
이르커스는 연습용 목각 인형을 향해 검을 휘두르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아처볼드의 암살 의뢰가 무사히 해결된 뒤로 이르커스는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사춘기 시기의 흔한 감정 기복이라고 생각해서 며칠 더 방치해 봤지만, 여전히 눈에 띄게 기운이 없었다.
“요즘 무슨 일 있니?”
“아니.”
“아닌 것 같은데. 마지막 의뢰 이후 내내 우울하잖아. 일은 무사히 끝났다고 했으면서…… 숨기지 말고 털어놔 봐.”
“…….”
“넌 날 못 속여. 난 네 얼굴만 보면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안다고.”
“당신이?”
“그래.”
내 말에 이르커스가 웃었다.
검을 휘두를 때 거치적거릴 법도 한데, 내가 선물한 반지 형태의 마도구를 여전히 끼고 있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내가 5년간 열심히 내 방식대로 키운 게 자기인데, 어떻게 모른다고 확신한단 말인가. 이 세계에서 이르커스를 가장 잘 아는 인간은 확실히 나였다.
“당신이 날 위해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내 기분을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
“왜, 너무 고마워서?”
“아니.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건지, 죽기 위해서 그러는 건지 헷갈려서.”
당연히 죽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이전처럼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이르커스는 내 말에 더 이상 상처 받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내가 죽겠다고 말할 때마다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예전 같았더라면 이르커스의 기분 따윈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좀 신경이 쓰였다. 애가 사춘기일 때는 원래 보호자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법이니까.
“네 곁에는 앞으로 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생길 거다.”
“그렇겠지. 당신이 백방으로 손쓰고 있으니까.”
“그중에 나보다 더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이르커스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긍정도 부정도 없는 얼굴이었다.
천천히 내게 다시 등을 보인 이르커스는 연습용 목검을 목각 인형을 향해 다시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움직임에 날이 서 있어, 목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당신이 언젠가 이 순간을 후회했으면 좋겠어.”
검 휘두르는 소리에 묻혀, 이르커스의 나직한 목소리는 꼭 꿈결에 들리는 말소리처럼 작게 들렸다.
나는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고 삼켜 들었지만, 이르커스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차마 되물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