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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28화 (28/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28화

    “이쪽은 트리스탄이야. 우리 용병단 단장님이고.”

    “안녕하쇼.”

    “그리고, 이쪽은 제 마법 스승님이에요. 남쪽 숲의 대현자…….”

    “유안이다. 귀찮으니 그냥 대현자라고 불러.”

    붉은 매 용병단의 용병 단장이라는 트리스탄은 내 상상보다는 평범한 외형을 한 중년이었다.

    그나마 눈에 띄는 거라곤 안대를 찬 오른쪽 눈 정도였다. 이르커스처럼 화려하게 생기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봐 왔던 수많은 용병처럼 얼굴이나 몸에 인상적인 흉터가 남아 있지도 않았다.

    “혹시, 배우자 이름이 이졸데야?”

    나는 트리스탄을 만나면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던 질문이나 던졌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유일한 제자라고 해서 뭐 하나라도 특별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너무 평범해 보이니 김이 탁 빠졌다.

    내가 지금보다 아주 조금 더 젊었을 때, 그때는 이종족 중에 나랑 동년배가 있었다. 이제는 멸종 위기 종족이 된 드래곤이 바로 그 동년배였다.

    드래곤 슬레이어 놈들이 인간한테 피해 간답시고 드래곤들을 죄다 토벌해 버려서 드래곤의 개체 수가 줄어든 건 물론이고 평균 수명도 반 토막 나 버린 탓에, 블랙 드래곤 중 최연장자였던 놈이 그나마 나와 연령대가 가장 비슷했다. 다른 놈들은 일찍이 뒈졌거나 헤츨링 시기를 갓 벗어난 어린애들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 블랙 드래곤도 드래곤 슬레이어 손에 죽기는 했다. 레어 짓는다고 마을 하나 쑥대밭으로 만들 때부터 그럴 것 같기는 했는데, 정말 자는 사이에 목이 잘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 그때는 기분이 좀 이상했다. 대현자 슬레이어는 왜 없는 건지 심란해진 건 덤이었고.

    드래곤들도 참 답이 없어서, 자기들이 왜 다른 종족을 하나하나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태어날 적부터 약육강식이 머릿속에 싹 입력된 고지능 맹수들이니 인간과 입장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인간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드래곤은 드래곤 중심적으로 사고하니까.

    “초면에 남의 배우자 이름은 왜 묻는담. 오래 살면 원래 다들 그래요?”

    “나만큼 오래 산 인간이 나밖에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일단 나는 그래. 궁금하면 물어봐야지, 뭘.”

    “대현자쯤 되면 남의 아내 이름도 맞추고 그러나 보네.”

    <이르커스의 서> 작가도 별수 없는 한국인이었을 테니 트리스탄 하면 이졸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거거든. 마치 아서와 랜슬롯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기네비어를 떠올리는 이치와 같다.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에는 또 ‘난 대현자니까’라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이르커스도 이쯤 되니 ‘만능 답변 대현자는 전부 다 알아’ 식의 대답을 믿지 않는 것 같았지만, 별수 없었다. 일일이 내가 과거에 평범한 인간이었던 시절에는 다른 세계에서 살았는데, 그 세계에서 이 세계를 창작한 것 같다는 소리를 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대현자에서 미치광이로 전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긴가민가했지만 아무튼 우리 이르가 로베인 제국의 3황자라는 소리는 들었소.”

    “‘우리’ 이르?”

    “우리 이르지, 그럼 남의 이르요? 얘도 용병단 소속으로 5년이나 지냈는데. 이제 신입 소리도 안 듣는단 말이오.”

    “5년이면 아직 신입이어야지. 승격이 뭐 그렇게 빨라?”

    “두 분,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트리스탄 입에서 ‘우리’ 소리가 나오자,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나나 트리스탄이나 이르커스랑 함께 지낸 시간은 도긴개긴이긴 하지만, 그래도 날짜 수로 따지면 내가 트리스탄보다 훨씬 더 이르커스랑 오래 지냈고 오래 가르쳤는데 어디서 친한 척인가 싶었다.

    게다가 저 용병 단장 놈은 내 친구였던 블랙 드래곤의 목을 친 드래곤 슬레이어 새끼의 하나뿐인 제자였다. 친구의 원수의 제자라니. 거의 사돈의 팔촌이니까 남이긴 한데……. 어쨌든, 근본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왜 한참 어린 애들이랑 싸우니? 그럴 일 없어. 테리즈보다도 연하인 놈이랑 뭐하러…….”

    “나이 많아서 좋겠수다.”

    “뭐하러 싸우긴…… 열 받네? 야, 너 몇 살이야.”

    “뭐요. 내일모레 쉰인데 불만인가?”

    이르커스는 은은한 미소만 지으며 나와 트리스탄을 번갈아 보았다. 아마 더 이상 이 사이에 끼어들어 봐야 얻을 게 없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영특하기도 하지. 나는 속으로 내 제자는 아무래도 천재인 듯…… 이라는 생각이나 하며, 내일모레 쉰 살이라고 껄렁거리는 트리스탄의 이마를 툭 밀어 버렸다. 350살 연하한테 화내 봤자 내 손해였다. 나이를 들으니까 나던 화도 팍 식었다.

    “이르커스가 3황자라는 걸 알았으면 대화는 쉽겠구나. 난 이 애를 황제로 만들 거야.”

    “뭐, 섭정이라도 하시게?”

    “그런 건 너나 하렴.”

    “시켜 줘야 하지.”

    “시켜 주면 할래?”

    “…….”

    “그건 네 선택에 달렸지. 섭정은 안 돼도 황궁 기사 단장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니?”

    내가 붉은 매 용병단에 자진 행차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인재 포섭.

    이르커스한테는 믿을 수 있을 만한 자신만의 세력이 필요했다. 내가 일당백은 물론이고 일당일만 정도는 가뿐하게 해치워 줄 수 있는 존재라고 해도, 정치는 그것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생아라는 혈통에 외척 세력도 없고, 황궁에서는 근근이 목숨이나 겨우 부지하고 살았던 이르커스가 5년 만에 황궁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세력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적었다. 게다가 테리즈를 통해 5년간 거리를 두고 관찰해 본 그 라…… 뭐시기는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지능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황태자는 이미 내정된 걸로 아는데. 죽일 건가?”

    “필요하다면 그러겠지.”

    “피 흘려야 하는 황위 쟁탈전엔 참여하고 싶지 않소. 우리 왕국 일도 아니고, 옆 제국 일이면 더더욱. 붉은 매 용병단은 애초에 소수라, 우릴 포섭한다고 해서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없을 터요.”

    “‘우리’ 이르라 그러더니, 아주 매정하게 잘라 버리는군. 이르커스가 황제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법과 검술에 능통하다고 해서 정치를 잘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

    재수 없긴 하지만 트리스탄의 말이 맞았다. 무력이 있다고 해서 좋은 황제가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귀족파와의 권력 다툼에 밀려, 자기 자리보전에 급급한 지금 황제만 봐도 그랬다.

    라 뭐시기가 자기 아버지의 무능과 자신의 유능함을 대조시켜 제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만 봐도, 인지도도 세력도 없는 이르커스보단 라 뭐시기의 황제 즉위가 더 설득력 있는 일이기는 했다. 아예 욕심에 눈먼 바보였다면 시시하긴 해도 조금 더 빨리 끝났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물론 이르커스가 혼자였다면 황제가 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지. 이르, 얘가 천재기는 해도 사람 대하는 데 영 서투르고 숫기가 없어서…….”

    “……이르가?”

    “넌 옆에서 애를 보고도 모르니? 지금도 봐. 얼마나 애가 조용하고 의젓해? 열일곱 살밖에 안 됐는데 아주 어른스럽다니까.”

    “……미쳤군.”

    트리스탄이 날 또라이 보듯이 쳐다봤다. 옛날 옛적에 다윈을 보던 예카리나를 내가 저렇게 쳐다봤던 거 같은데…….

    난 좀 억울했다. 이르커스는 정말로 열일곱 살치고는 아주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요즘 사춘기라 내 말을 좀 안 듣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저지르면서 전처럼 착하게 굴지 않아서 그렇지, 근본은 판타지 소설 주인공답게 아주 선량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얌전한 황자님 곁에는 나처럼 살짝 비윤리적인 보좌가 있어 줘야 했다. 내가 없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믿을 만한 놈이 옆에 있어 주면 더 좋고.

    “이르, 너 혹시 이중인격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내숭도 이 정도면 사기인데. 어이가 없구만.”

    “뭐라는 거야? 아무튼, 좀 더 생각해 봐. 이르커스가 당장 세력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상태기는 해도, 얘 옆에는 대현자인 내가 있다고.”

    사실 내가 없었어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이르커스는 결국 황제가 됐을 것이다. 일단 이놈이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트리스탄 입장에서는 용병 단장으로서 자기가 꾸린 용병단의 미래를 도박에 걸기가 망설여지겠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괜히 권력 못 잡을 놈 편에 섰다가 쪽박 치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도박을 할 용기가 없으면 그만한 대가를 바랄 수도 없는 게 세상의 이치였다.

    “내 국적은 카만이니, 언젠가 외국인을 등에 업고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리로 문제가 될 걸 염두에 둬야 할 거요.”

    “그렇게 치면 무국적자인 나도 있으니 그건 걱정 마렴.”

    “다른 단원들은 각자 의뢰가 있으니 함께하기 어려울 것이고, 단장인 나와 단원 둘이 황궁으로 함께 들어가지. 호위라는 명목으로. 이 정도면 충분한가?”

    “충분하고말고. 이제 용병 단장 말고 기사 단장 하셔야겠어.”

    나는 경매장에서 싹 챙겨 왔던 자금 중 일부를 트리스탄에게 내밀었다. 이런 일에는 역시 정과 의리보다는 돈이 오고 가 줘야 한다.

    “이건 네가 우리 애한테 의리를 보여 준 것에 대한 답례란다.”

    “진짜 미쳤군.”

    “미치긴 무슨. 내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받아 챙기렴.”

    트리스탄은 나를 향해 혀를 차는 것과 별개로 빠른 손놀림으로 갤런이 담겨 있는 주머니를 낚아챘다.

    내심 고등학교 시절, 교무실에서 은근히 백화점 상품권으로 촌지를 주고받던 극성 학부모와 비리 교사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난 애초에 청렴결백과 거리가 멀었으므로 떳떳하게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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