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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27화 (27/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27화

    “정말 아름답구나.”

    “…….”

    “이름이 뭐니?”

    경매에서 이르커스를 인계 받은 아처볼드는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이르커스에게 손을 뻗었다.

    이르커스는 아처볼드의 목을 지금 그어 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의뢰인의 암살 의뢰는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더러운 호로 잡놈의 목을 가져와 달라’는 것이었으므로 조금 더 시간을 들이기로 했다.

    “혹시, 말을 못 하나?”

    침묵을 지키는 이르커스의 머리카락을 두꺼운 손으로 슬슬 쓸어 보던 아처볼드가 히죽 웃었다. 그러면 더 좋다는 말이 작게 덧붙었다.

    이르커스는 제 냉담한 시선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슬쩍 아래로 떨어트렸다. 마차 바닥은 마부가 고생해서 닦은 모양인지 광이 날 정도로 깔끔했다. 이르커스는 이 바닥에 피가 튀면 마부가 얼마나 고생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하며 살의를 내리눌렀다.

    “너처럼 고상한 애들이 울리는 맛이 있거든.”

    아처볼드는 제 손수건을 꺼내더니 그 안에 감싸져 있던 가루약을 이르커스에게 내밀었다. 이르커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르커스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 약을 받아들였다. 아처볼드가 시장에 유통했다는 마약이 틀림없었다.

    사생아인 자신을 은연중에 벌레 취급하던 황궁에서 열두 살까지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웬만한 독에 내성이 생긴 이르커스는 별다른 저항 없이 아처볼드가 지시한 대로 약을 들이켰다. 강력한 마녀의 위치를 알 수만 있다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할 만했다.

    하지만 이르커스의 위험 감수에 대한 결심과 별개로 이르커스가 착용한 마도구는 제대로 그 효용성을 입증했다.

    유안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도구는 갑자기 폭발해 버리거나 눈앞의 변태 새끼를 고자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섭취한 마약 효과를 그대로 아처볼드에게 튕겨 내는 데는 성공했다.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자기가 팔던 마약을 들이켜게 된 아처볼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저택에 돌아오기 전까지 의식을 잃었다.

    “……변장 마법만 넣은 게 아니잖아.”

    이르커스가 유안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만큼, 유안도 이르커스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유안은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정이 많은 편이었다. 불멸자로 살기에 썩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5년간 유안과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이르커스는 유안의 이런 무른 성격을 금세 알아챘다.

    한유안은 신처럼 말하면서도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죽음을 원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대현자 한유안의 모순은 그런 것이다.

    유안은 얼마든지 힘을 써 억지로 이르커스를 황제 자리에 앉힐 수 있으면서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했다. 당장 죽어 버리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을 죽여 줄 존재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부터가 아이러니했다. 유안은 죽기를 강력하게 바라는 사람치고 강제성이 없었다.

    이르커스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결국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점이나, 이런 마도구에 온갖 술수를 부려 놓은 것만 봐도 그랬다.

    이르커스는 유안이 준 반지 형태의 마도구를 한번 살펴보았다.

    꼼꼼하게 마법 수식이 적용된 마도구는 각기 다른 마법을 세 개나 욱여넣고도 망가지거나 녹이 슬지 않았다. 가운데 박힌 흑요석만 묘한 검은빛으로 반짝거릴 뿐이었다.

    의뢰 수행에 조금 더 시간을 들일 마음이 사라졌다. 이르커스는 경매장 입성 전에 숨겨 두었던 검을 꺼내 들었다. 이런 별것 아닌 일에 마도구에 들어간 마법을 감지하지 못해서 유안이 준 첫 반지를 써먹어야 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마도구들은 안에 들어간 마법이 전부 발동되고 나면 녹아내려 사라지거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이르커스는 유안에게 받은 물건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영원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긴 시간 동안 손에서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제가 팔던 약에 취해 의식을 잃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아처볼드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이르커스 검을 치켜들었다.

    죽을 만한 인간은 죽어도 된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한유안을 제외하면, 누구든 죽기 마련이다. 조금 더 일찍 죽느냐 아니냐의 문제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게 이르커스가 유안과 함께하며 배운 가장 직관적인 세상의 진리였다.

    이르커스 사크리나 로베인과 한유안은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서로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

    인간답게 살아서 좋을 것 하나 없는 불멸자는 남쪽 숲에 찾아온 어린아이를 만난 이후부터 다시 인간성을 재학습했다. 유안은 다시 인간에게 기대를 보였고, 이르커스를 위해서 시간을 투자한다는 명목으로 과거 자신이 외면했던 테리즈를 돌봤다.

    오로지 ‘이르커스를 위해서’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며 예전 같으면 무시해 버렸을 에델라이드의 부탁도 들어주었다. 사람과 어울려 사는 일에 지쳤다고 말하면서도 이르커스를 위해 카만의 수도 캐러벨에 5년이나 머물렀다.

    인간성을 찾아가는 유안과 반대로 이르커스는 그 옆에서 점차 여러 감각을 잃어 갔다. 안 그래도 마녀의 피를 물려받아 강력하게 태어났는데, 대현자인 유안 밑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덕에 자기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마법사로 자랐다.

    유안은 이르커스의 첫 살인에 ‘괜찮다’고 대답했고, 이르커스는 유안이 괜찮다고 했기 때문에 수많은 것에 무뎌졌다.

    이르커스의 도덕적 기준은 유안에게 맞춰졌다. 유안의 기준이 이르커스에게 맞춰진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유안은 이르커스가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챈 상태였다. 이르커스 또한 유안이 그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을 역으로 눈치챘다.

    한유안은 적확한 때가 되면 이르커스를 위한다는 말로 이르커스를 버릴 존재였다. 이르커스는 유안이 저를 독립시키기 전까지 많은 것들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당신도 나도 지옥에 가겠지…….”

    아처볼드의 목은 그가 벌인 수많은 악행에 비하면 아주 시시하게 떨어졌다.

    이르커스는 광이 나던 마차 바닥이 피로 물드는 것을 무감하게 내려다보았다. 앞으로도 이 마차를 몰아야 할 마부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주인이 죽었음에도 마차는 저택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렸다.

    이르커스는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는 엘리오스와 헤누스를 향해 짧은 기도를 드렸다.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비와 공정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르커스는 유안과 함께 지옥을 영원히 떠돌아야만 하니까.

    ????????????

    “대현자로군.”

    “역시, 좀 높은 사람들은 금방 알아본단 말이야.”

    내 유명세가 조져진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만족스럽게 인질로 잡고 있던 말단 직원을 문밖으로 내팽개쳤다. 원하는 상대를 만났으니 이제 더 이상 인질은 필요 없었다. 정신머리가 있으면 저놈도 나한테 덤비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잘 알 테니까.

    “남쪽 숲에 처박혀서 안 나온다던 대현자가 이런 조그마한 경매장에는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긴. 너희 조지러 왔지.”

    “이유도 없이?”

    “이유가 없긴 왜 없어? 너희 불법이잖니.”

    별거 다 팔아서 불법 장사 해 먹고 있는 놈들이 왜 이렇게 당당해?

    나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경매장 최고 관리인을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관리인은 멋들어진 연미복을 차려입은 젊은 청년이었다. 이런 곳 운영하면서도 잘 먹고 잘 자는지, 얼굴에 윤기가 아주 반질반질 돌았다.

    관리인의 나이가 어린 걸로 봐선 여기도 오너 세습제일 가능성이 컸다. 몇 세대에 걸쳐 인간 경매나 하고 말이야. 인간들은 아주 발전이 없다.

    “이해가 안 가는군. 정의 구현이라기에도 우스워. 이런 영세한 경매장을 건드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지.”

    “몇 번을 말해? 영세고 뭐고, 너희 다 범법자들인데 지금 무슨 의미 타령이야.”

    관리인이랑은 뭔가 대화가 될 줄 알았는데 역시나 소통 불가능이었다. 내가 대화 정도로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관리인은 나를 향해 총을 겨눴다.

    자기 입으로 영세한 경매장이라더니, 돈 개많이 벌었나 본데?

    이 판타지 세계에도 총은 존재했다. 마법이 과학의 자리를 메우고 있는 처지라 일반 탄환이 없고 마나를 응축해서 만든 마탄을 사용하긴 하지만.

    그러다 보니 마탄을 사용하는 총은 상당히 구하기 어려운 무기였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무엇보다 가성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보여 주기식을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총을 호신용으로 쓰는 경우도 드물었다.

    마녀는 몰라도 마법사들은 그럭저럭 구하기 쉬운 세상이니, 값비싼 마도구로 분류되는 마탄을 필요로 하는 총보다 마법사 자체를 고용하는 게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전쟁도 마법이랑 검으로 하는 세상에서 총이라니. 말이 ‘영세한 경매장’이지 많이 해 먹은 티가 났다. 아마 저것도 장물이거나 밀수품이었는데 뒤로 빼돌린 물건일 테지.

    한편, 내가 대현자인 걸 알면서도 총을 겨누는 게 어이없긴 했다. 저거 맞아 봐야 난 죽지도 않는데.

    나는 내게 총을 겨눈 관리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친절하게 총구 쪽을 잡아 내 턱 아래에 겨누어 주기까지 했다. 사람을 확실히 죽이려면 이런 데를 쏴야 한다고 알려 주듯이.

    “도망갈 시간 줄게.”

    “……당신, 정말 미쳤군.”

    “미쳤다 소리가 아니라, 자애롭단 소리가 나와야 하는 타이밍 아니니? 사람이랑 물건 가둬 놓은 장소 열쇠랑 현금화된 자금만 넘기면 너 살려 주겠다고, 내가.”

    총을 든 건 저놈인데 협박하는 건 나니까 남이 보면 이 꼴이 얼마나 우스울지 상상도 안 갔다.

    슬쩍 안전핀을 풀고 방아쇠를 당겨 봤는데, 발사되는 게 없는 걸 봐서는 비싼 총만 얼떨결에 구했지, 그보다 더 구하기 힘든 마탄은 구하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동안은 굳이 방아쇠를 당길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마탄 하나 장전 안 된 총일지라도 겨누기만 하면 지레 겁먹어 협박이 잘 통했던 거겠지.

    나는 코웃음을 치며 덜덜 떨리기 시작한 관리인의 두 손을 잡아 내렸다.

    “억울해?”

    “…….”

    “왜 하필 너희 경매장에 내가 와서 네가 지금 이 꼴인가 싶지? 그래도 어떡하니.”

    나는 겸사겸사 관리인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챙겼다. 이것도 나중에 개조 좀 해서 이르커스 줘야지. 애한테 줄 장난감 쇼핑하는 부모님처럼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너희가 내 제자 팔아치웠는데.”

    의뢰의 일환이라 이르커스 스스로가 경매장에 기어들어 와서 팔려 나간 거긴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르커스는 여기서 9천만 갤런에 팔려 나갔다. 제자 몸값이랑 내 정신적 충격에 대한 보상금을 고려하면 이 영세한 경매장의 전 재산쯤 내가 챙겨도 괜찮았다. 그러는 김에 아직 잡혀 있는 인간들이랑 이종족도 풀어 주고, 왕국 치안대에 싹 신고해야지.

    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내게 열쇠 꾸러미를 건네는 관리인을 향해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5년간 사람들이랑 섞여 산 덕에 이제는 제법 미소에서도 자연스럽게 인간 태가 났다.

    나도 참. 애 키우더니 진짜 착해졌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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