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26화
내내 투명 로브를 쓰고 경매장 구석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등장이 의심받지 않게끔 밑 작업이 조금 필요했다.
마도구와 달리 마법은 사용 시 마나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때문에, 마법을 쓰지 않고 경매 참가자 중 한 놈을 제압하는 건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었다.
경매 참가자 한 놈이 경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본 회장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투명 로브를 쓴 채 따라갔다. 이런 곳에 오는 인간들이 대개 그렇듯 경호가 둘이나 붙어 있었지만, 그런 건 내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법이라는 편리한 기능을 항시 달고 사는 입장에서 몸을 쓸 일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나는 전쟁터를 구를 만큼 구른 인간이라 남을 기습하거나 기절시킬 만큼은 몸을 쓸 줄 알았다. 400년 정도 살았는데 이 정도도 못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긴 하다.
경호 두 명을 재빠르게 제압한 후,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채기 전에 목 뒤를 강하게 쳐서 기절시켰다.
안 보이는 상대한테 공격을 당했으니 이 세 사람 다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방심한 놈들 뒤통수치는 건 원래 내 주특기였다.
나는 기절한 인간에게서 가면과 옷을 빼앗아 갈아입고, 그 세 명이 눈에 띄지 않게 투명 로브를 덮어 줬다.
눈이야 가면으로 가려 버리면 정면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검다는 걸 금방 알아차리지 못할 테지만, 문제는 머리였다.
원래 계획상으로는 경매에 관여할 생각이 없어 변장용 마도구를 챙겨 오지 않은 게 패인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들킬 걸 각오하고 머리 색을 마법으로 바꿨다. 곧 경매가 끝나니 의심을 사더라도 재빠르게 치고 빠지면 그만이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이걸 빌미로 아처볼드 놈을 내가 죽여 버리지, 뭐.
나갈 때는 셋이었던 인간이 혼자서 돌아오니 당연히 의심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아까는 안 보였던 관계자들이 장내를 조심스럽게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면 마법을 쓴 게 금방 들통 난 모양이었다. 이래서 마법사들은 암살 같은 건 못할 운명이라니까. 너무 정정당당한 직종이었다.
나는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관계자들을 최대한 모르는 척하며 아처볼드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천만 갤런이나 가격을 높여 불렀으니 저쪽도 안달이 났을 터였다.
“8천 2백만 갤런.”
이 경매에 끼어들지 말라는 암묵적인 위협의 수신호가 오고 갔다. 하지만 나는 그 수신호를 다 알아들었음에도 싹 무시해 버렸다. 2백만 갤런이 뭐야? 부를 거면 확실하게 불러야지.
“8천 3백만 갤런.”
“8천 5백만.”
“8천 7백만.”
역시나 내 존재를 금세 눈치챈 이르커스가 나를 은근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마도구나 만들어 주고 빠지라고 했는데, 내가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 경매 가격을 올리고 있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수학여행에 엄마가 따라온 고등학생 기분이겠지.
나는 이르커스가 가격을 너무 올리지 말라고 눈치를 주거나 말거나, 거대한 체구를 부들부들 떨면서 열 받아 하는 아처볼드를 더 빡치게 하기 위해 계속해서 가격을 높여 불렀다.
“9천만 갤런.”
내 갉작거림에 눈치도 없이 걸려든 아처볼드는 결국 처음 경매가보다 2천만 갤런이나 더 높은 가격을 불렀다.
마음 같아서는 1억 갤런까지 올려 보고 싶었지만, 정황상 아처볼드의 경매 자금이 그만큼은 아닐 터였다. 멋지게 1천만 대신, 소소하게 2백만 갤런을 부르는 것만 봐도 그랬다.
“9천만 갤런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사회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와 아처볼드를 번갈아 보더니 낙찰을 선언했다. 이르커스는 계획대로 아처볼드에게 팔렸다.
이르커스가 낙찰되고 나자, 경매장 관계자로 보이는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내 쪽으로 정중하게 몸을 숙인 남자는 내게 혹시 잠시 동행해 줄 수 있냐고 물어 왔다.
보나 마나 내 신원 조회를 위해서 부르는 게 뻔했다. 경호 인력 둘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고, 내내 경매를 구경하기만 하던 원래 자리 주인과 달리, 나는 가격을 높여 가며 경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별다른 저항이나 거절 없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곧 누구든 투명 로브에 덮여 있는 기절한 인간 세 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그전에 자진해서 경매장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방금까지만 해도 상당히 정중하게 굴었던 중년 남자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내게 검을 들이댔다.
나는 내 목에 겨눠진 대거를 내려다봤다. 위협용인지 생각보다 날이 무뎠다.
“당신 누구지?”
역시 마법을 쓰면 너무 금방 들킨다.
그래도 경매 끝까지는 보고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황궁에 들어갈 때는 마법만 너무 믿지 말고 마도구도 좀 챙겨 가야겠다. 옛날 옛적처럼 기분 나쁘다고 번개 내리치고 사람 때려눕히고 그랬다간 이르커스에게 불이익이 갈 테니까.
“내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답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말, 아니?”
“뭐?”
“아무래도 모르겠지. 나는…… 대현자란다.”
하지만 여기는 황궁이 아니니까, 사람 좀 때려눕혀도 되지 않을까?
나는 빠른 결론을 내리고선, 대거에 내 목이 찔리든 말든 팔을 휘둘러 남자의 머리를 공격했다.
이런 전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방검 마법을 두르고 있지 않았으므로, 목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아픔쯤은 이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게 됐으니까.
남자는 상당히 맷집이 좋았다. 경호 목적으로 따라왔던 놈들도 한 대 맞고 기절했었는데, 급소를 공격당했는데도 비틀거리기만 할 뿐 기절하지 않았다.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나는 역으로 남자의 손에서 대거를 빼앗았다. 악력이 어찌나 좋은지 손목을 반대로 꺾었는데도 곧장 손에 힘을 안 풀어서 꽤 고생이었다.
“주인장 계시니?”
“…….”
“죽기 싫으면 경매장 주인…… 아니, 최고 관리자한테 안내해.”
미약한 저항이 조금 더 이어졌으나, 내가 정말로 대거를 들이대자 남자는 곧 얌전해졌다. 고용된 입장일 뿐인데 아무렴 여기서 죽기는 싫었겠지.
내가 남자의 등을 툭 떠밀자, 그제야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순순히 살아나갈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이야, 그거 덕담이네.”
남자는 아무래도 자기가 찌른 내 목이 금세 아물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현자라고 밝혔음에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보니 내가 누군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순진한 인간을 좀 놀려 주려는 요량으로 남자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러곤 남자에게 겨누고 있던 대거로 한 번 더 내 목을 푹 찔렀다.
“어쩌지? 난 순순히 살아 나갈 생각을 안 해도 못 죽는데.”
하얗게 질린 얼굴이 좀 웃겼다. 죽지 않는 인간이란 어떤 의미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기 딱 좋았다. 자기가 아무리 덤벼도 제압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려 주는 셈이니까.
나는 피에 젖은 대거를 다시 남자의 목 뒤에 겨눴다.
“하지만 너는 죽겠지?”
사람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건 정말 간단하다. 인간은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인간은 드물었다.
나는 걸음이 빨라진 남자를 따라, 경매장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
경매품 인계는 경매가 모두 끝난 뒤에 이루어졌다.
이르커스는 유안의 난입에도 불구하고 경매가 중도에 무산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종료되자 오히려 불안감을 느꼈다. 마도구가 아니라 마법으로 바꾼 유안의 머리 색은 마검사이기 전에 마법사였던 이르커스의 시선에도 금방 포착되었다.
이르커스 로베인이 이 의뢰를 자진해서 맡은 이유는 의뢰인이 제시한 대가 때문이었다.
의뢰인은 돈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주겠다고 이르커스에게 약조했다. 마법 계약을 무산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마녀의 위치를 알려 주겠다고 한 것이다.
지난 5년간의 용병 생활 동안, 이르커스는 마녀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마녀는 마법사들보다 훨씬 희귀했고, 인간과 어울려 살아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만나기가 어려웠다. 운 좋게 한두 명 방황하는 마녀들을 만난다고 해도 너무 어린 마녀가 대부분인지라 마법사보다도 실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르커스는 유안 몰래 유안과 맺은 계약을 무마시키기 위해 여러 번 계약 파기 방법을 고안해 보았으나, 마법적인 부분에서 고작 열일곱 살인 이르커스가 400살이 넘은 대현자 유안의 마법 계약을 파기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이르커스는 자신의 계약 파기를 도와 줄 마녀가 필요했다. 강력하고, 입이 무거우며, 기왕이면 유안만큼은 아니어도 평범한 인간보다는 충분히 오래 산 마녀.
붉은 매 용병단의 단장인 트리스탄은 이르커스가 이 의뢰를 맡는 걸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이르커스의 실력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의뢰 내용에 비해 객관적으로 대가가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르커스는 이 의뢰를 꼭 자기가 해야겠다고 나섰다. 트리스탄은 이르커스에게 마녀들의 위치를 알아낸다고 한들 모든 마녀가 기꺼이 도움을 주거나 협조하는 건 아닐 거라고 구시렁댔지만, 이르커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열두 살까지 이르커스의 가장 큰 바람은 ‘생존’이었다. 살아남을 수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저를 버러지 보듯 하는 황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죽여 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웃는 얼굴로 등 뒤에 비수를 꽂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이복형제를 상대하는 것도 견딜 만했다.
더 강한 권력, 확실한 지위를 얻으면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었다. 대단한 복수를 꿈꾼 적은 없더라도, 눈앞에 윙윙거리며 거슬리게 구는 파리를 쫓아낼 빌미를 잡을 힘이 필요했다.
5년 전까지 이르커스 로베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이르커스에게는 이르커스 본인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르커스의 인생 목표는 이제 ‘생존’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애저녁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유안과 함께 여생을 보낼 수만 있다면 황제가 아니라, 가장 밑바닥의 전투 노예로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안이라면 이르커스가 그런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할 터였다. 입으로야 ‘너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하고 혀를 차겠지만, 제가 키운 제자의 꼴이 안타까워서라도 외면하지 못하겠지.
그러나 정말 제국의 황제가 돼 버리면 이르커스는 계약에 따라 유안을 죽여야 한다.
마법 계약을 맺었으니 파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계약 내용을 실행하지 않게 되면 내용도 알지 못하는 페널티를 받아야 했다. 계약 위반 페널티의 내용만 알았더라도 이르커스는 이렇게 유안과 맺은 계약을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았을 터였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신이 나서 마법 계약을 하자는 유안을 말리지 못한 5년 전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매번 죽는다는 소리만 하는 유안은 더 원망스러웠고.
유안은 이르커스에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르커스의 세계는 자기 자신밖에 없던 좁은 공간에서 유안을 중심으로 천천히 확장되었다.
이르커스의 생은 유안의 것처럼 무한하지 않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이르커스는 유안의 첫 제자였고, 유안이 경애하던 인간의 후손이었으며, 세계의 유일한 주인공이었다.
유안의 영원에 유일한 존재로 각인되고 죽는다면 그건 충분히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유안이 종종 말하는 선조, 예카리나보다 더 특별한 존재로 남을 수만 있다면…….
그거면 충분하다.
이르커스 로베인은 다른 예카리나의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한유안을 순순히 죽여 줄 생각이 없었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