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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25화 (25/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25화

    “그렇게 마음에 들어?”

    “응.”

    “길버트는 별로 안 예쁘다고 하던데.”

    “길버트가 쓸 거 아니니까 상관없어.”

    이르커스는 내가 선물로 준 마도구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반지 형태라는 것부터 만족한 티가 팍팍 났다. 흑요석이 장식으로 박혀 있는 걸 봤을 때는 무슨 좋은 일 사람처럼 얼굴이 환하게 폈고. 내가 뭐 안 해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선물 같은 걸 좀 자주 줄걸. 이르커스의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눈대중으로 이르커스의 손가락 사이즈를 짐작하고 만든 탓에 원래 끼려던 검지에 안 맞아 사이즈 조절을 다시 해야 했지만, 이르커스는 그런 사소한 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횟수 제한이 있어서 어느 정도 쓰다 보면 알아서 부식될 거야.”

    “제한이 어느 정도 되는데?”

    “그건 비밀.”

    기실 다른 마법이 두 개나 더 들어가 있었지만, 이르커스에게는 눈 색과 머리 색을 바꾸는 마법만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마도구를 만들 때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마나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도록 보안 마법을 철저하게 이중 삼중으로 걸어 놨으니, 이르커스가 아무리 천재라고 할지라도 들어가 있는 마법이 뭔지는 정확히 알아챌 수 없을 터였다.

    또 마도구를 사용한 변장의 경우, 마법사끼리도 알아볼 수 없도록 몇 가지 자체 수식을 더해 놨다.

    내가 한창 인간들이랑 섞여 살았을 때 검은 머리와 눈을 가리기 위해 썼던 변장 기능에서 발전시킨 거니, 아처볼드에게 고용된 마법사들이 이르커스의 변장을 알아챌 확률은 낮았다.

    “지금 한번 써 보지그래.”

    “횟수 제한 때문에…… 아까워서 시험 삼아 쓰기는 싫어.”

    “뭐 이런 걸 아끼고 그래? 나한테 부탁하면 또 만들어 줄 텐데.”

    “그래도. 이게 처음 받은 반지니까.”

    “이런 걸로 뭘 처음을 따지고 그러니, 낯 간지럽게. 다음에도 만들어 준다고 약속할게.”

    “다음에도?”

    “왜, 못 믿겠어?”

    못 믿냐는 질문에 이르커스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믿는다고 거짓말하는 대신 침묵하는 걸 보니 어떤 의미로는 꽤 영리한 대처였다. 이런 부분에서 날 불신한다는 것도 확실했고.

    나는 이르커스에게 나를 왜 못 믿냐고 집요하게 추궁하지 않고, 간단하게 마도구의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소지에 그 마도구를 제대로 착용하자, 이르커스의 눈과 머리 색이 마치 물감을 탄 것처럼 천천히 바뀌었다. 밝은 금발이 탁한 갈색으로 물드는 과정은 꽤 아름다웠다.

    “네가 해지하지 않는 이상, 변장은 계속 유지될 거야.”

    “이 마도구…… 가격이 엄청나겠네. 시간제한까지 없으면.”

    “경매에 나간다면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팔리긴 하겠지.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너나 나 정도밖에 없겠지만. 마나를 계속 투입해 줘야 유지되는데, 이 정도 변장으로는 네가 가진 마나가 바닥날 일은 없을 거야.”

    애초에 이 마도구는 이르커스에게 맞춰 만든 것이기 때문에 기능을 사용하는 동안 사용자의 마나를 아주 쭉쭉 빨아들였다.

    평범한 마법사가 사용하면 단시간에 마나가 동이 나서 마도구가 먼저 망가질 위험이 있었다. 도난당하거나 분실돼도 쓸 만한 인간이 별로 없으니 도난 방지 기능은 따로 넣지도 않았다.

    제 금발과 자안을 모두 갈색으로 바꾼 이르커스가 멋쩍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역시, 미남은 색을 타지 않는구나. 갈색으로 물든 머리와 눈 때문에 분위기가 조금 더 차분해 보였다. 체격이 큰 탓인지 나이도 열일곱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정도는 돼 보였고.

    “다시 생각해 봐도 네가 이 의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빡쳐.”

    “진정해.”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아처볼드인지 뭔지, 아무튼 그놈 죽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고자로 만들고 싶어.”

    이르커스는 신경질을 부리는 내게 열일곱 살답지 않은 침착함으로 자기가 노력해 보겠다는 소리나 중얼거렸다.

    “그런데 너, 뭐가 필요해서 이 의뢰 맡은 건지는 정말 안 알려 줄 거야?”

    “응.”

    “치사하다.”

    “당신도 마도구 사용 횟수 제한 비밀이라며.”

    “이거랑 그거랑 같니?”

    내가 들어도 정말 유치한 티격태격이었다. 길버트가 봤다면 또 나잇값 못한다고 잔소리했을 게 분명하다.

    나는 내가 아무리 캐물어도 본인이 숨기고 있는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르커스를 슬쩍 노려보았다. 말 안 해 준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나는 대현자다. 모르는 거 빼고 다 아는 인간이다.

    ????????????

    ‘대현자’ 칭호를 처음 받았을 때는 진짜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생각했다.

    내가 오래 살기는 했지만, 그 시기만 해도 그렇게까지 대단한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 중에서나 나이를 좀 많이 먹은 거지, 평균 수명이 긴 정령이나 드래곤 중에는 나보다 연상도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칭호가 가진 유용성을 깨우쳤다.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야, 나 대현자다?’라는 말 한마디면 대충 넘어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제국이나 왕국에서 검은 머리가 불길하다고 신고당하면 잡으러 온 병사들한테 대현자라고 말한 다음에 풀려난다든가, 신전이나 마탑 소속 애들한테 검은 머리만 들이밀어도 협상이 되는 부분에서 아주 활용도가 높았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내 입으로 ‘난 대현자니까…….’라는 말을 하게 됐다. 이 오그라드는 호칭에 점점 프라이드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내 입으로 수재 소리 하던 버릇이 어디 갈 리가 없다.

    그러니 대현자 칭호에 걸맞게 나는 지금 의뢰를 수행하고 있는 내 제자를 미행 중이었다.

    이르커스는 범재가 감당할 수 없는 천재기 때문에, 나는 전쟁 때보다 복잡한 수식과 정교한 마도구들을 사용해서 몸을 숨겨야 했다.

    예전에 시험 삼아 만들어 둔 마도구 중에 유명 판타지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해 뒀던 투명 로브가 있어 다행이었다. 아틀리에 창고에 처박혀 있던 걸 힘들게 찾아 꺼내 왔다. 100년 전에 만든 거라 낡아 빠진 걸 수선하느라 고생은 했지만, 잠깐 쓰고 버릴 용도로는 나쁘지 않았다.

    이세계 환경 보호를 위해서 재활용을 실천해야지.

    나는 혼자서 해결하고 오겠다는 이르커스를 쿨하게 보내 주는 척하면서 로브를 바꿔 입었다. 혹시 모르니, 원래 입던 로브도 인벤토리용 마도구에 욱여넣었다.

    캐러벨은 법규가 잘 안 통하는 상업 도시답게 노예 제도가 폐지된 게 언젠데 음지에서 아직도 인간을 사고팔았다. 과연 돈에 눈이 멀어 무서운 게 없는 놈들이었다. 왕족이나 귀족들이 이런 걸 은근히 눈감아 주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이 인간들이 주로 사고파는 대상은 주로 어린아이들이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일 경우에는 부모가 아이를 돈을 받고 파는 경우가 많았고,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은 납치되어 몸값을 담보로 음지에 굴러들어 왔다.

    그리고 아처볼드는 그런 음지 인간 경매장에서 애들을 사다 자신의 애동으로 삼았다. 약 팔아서 번 돈으로 인간을 산다니,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었다.

    테리즈에게 뒷돈을 주고 뒷조사를 시켜 보니, 아처볼드 제닉스라는 이름이 본명도 아니었다. 원래는 다른 사업을 하다가 한 번 망해 본 인간인데, 오랫동안 이 제약 사업을 물밑에서 계획해 왔던 모양이었다.

    심지어 아내도 있고, 자녀도 셋이나 있다는 놈이 어린애들을 사들이고 있다는 게 소름 끼쳤다. 역시 인간은 최악이다.

    이르커스는 이 음지 경매장에 ‘납치당한 귀족 도련님’으로 위장해서 들어가 경매대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르커스보다 먼저 그 경매장에 잠입해 있었다.

    겸사겸사 이 경매장에 잡혀 온 애들 좀 구해 주고 치안대에 신고까지 넣을 생각이었다. 치안대가 눈감고 넘어가려고 하면 내가 번개 좀 쳐야지. 사람 팔아서 돈 버는 인간들은 전기로 지져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 혼자만의 정의 구현 계획을 차근차근 세우던 와중, 속속들이 경매 참여자들이 실내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몇 명 섞여 있어서 그런지 신변 보호를 위해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자기들도 지금 본인들이 하는 짓이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단 뜻이겠지. 배로 역겨웠다.

    “경매에 참여해 주신 신사 숙녀 여러분, 환영합니다.”

    번듯한 정장을 차려입은 사회자가 번드르르한 목소리로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건네자, 어두웠던 경매장 안에 조명이 하나둘씩 켜졌다. 가운데 있던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을 받아 요란스럽게 반짝거렸다.

    이 불법 경매장에서는 인간만 파는 게 아니라 온갖 장물들을 다 취급했다.

    어디서 도난당했다는 예술품부터 시작해서 죽은 귀부인의 저주를 받았다는 브로치, 그리고 멸종한 이종족의 신체 부위 같은 것까지 경매 물품으로 나왔다.

    이르커스가 경매 물품으로 경매대에 선 것은 고아 먹으면 정력에 좋다는 이종족의 신체 부위가 웬 중년 여성에게 고가로 팔려 나간 뒤였다.

    “이번 상품은 살아 있는 열일곱 살짜리 소년입니다. 지방 귀족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라고 하던데, 손님분들 중에 이 도련님이 눈에 익은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명이 아주 추잡스러웠다. 실종 납치 아동이 눈에 익어 보이면 부모한테 데려다줄 생각을 해야지.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내가 속으로 참을 인을 서른 번 정도 그리고 있을 동안, 얼굴이 공개된 이르커스의 몸값은 미친 듯이 올라갔다.

    오래 살아온 동안 예쁘다는 인간을 볼 만큼 본 내가 봐도 아름다운 게 이르커스인데, 100년도 못 살아 본 애들 눈에 이르커스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일진 뻔했다.

    이르커스는 자기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데도 무서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밀랍 인형처럼 서 있었다. 애가 저렇게 무감한데 아이의 상태를 의심하는 어른 한 명 없다는 게 어이없었다.

    그나저나 벌벌 떠는 연기조차 할 생각이 없다니, 어린애한테 미쳐 있는 아처볼드가 제대로 자기를 살 거라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7천만 갤런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정말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제국에서도 성 한 채는 살 수 있을 만한 가격이니까. 사회자가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동안에도 누구 하나 아처볼드의 구매를 저지하는 놈이 없었다.

    “8천만 갤런.”

    나 한 명을 제외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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