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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24화 (24/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24화

    “길버트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내가?]

    “그럼 누구겠니? 이런 미친…… 아틀리에가 뭔 온실이 되어 있어.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아주 식물원이 돼 버렸잖아.”

    오랜만에 돌아온 남쪽 숲의 아틀리에는 아주 난장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입장에서’ 난장판이고, 나무 정령들의 시선에서는 그럭저럭 정돈된 상태로 보이는 게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길버트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불만스럽게 제게 달린 나뭇잎들을 흔들었다.

    [네가 오래 자리를 비울 거니까 마음대로 하라며.]

    “야, 적어도 사람 몸 누일 공간은 남겨 두고 식물원을 차렸어야지. 이 아틀리에 내가 지었잖아. 그럼 내 거지, 네 거냐? 어?”

    정확히는 남쪽 숲으로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없어서 지어진 건물을 통째로 전이시킨 거지만. 아무튼 옮긴 건 나니까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바닥을 뚫고 악착같이 자란 화초들과 약초들을 함부로 밟지 않기 위해, 식물들 때문에 가죽이 망가져 버린 소파 위로 훌쩍 걸터앉았다.

    “발 디딜 곳도 없네. 여기서 마도구 좀 만들어가려고 돌아왔더니.”

    [이르커스는 어쩌고 너 혼자 돌아왔어?]

    “걔는 지금 자기 일하느라 바빠.”

    [너, 설마…….]

    “안 버렸어, 미친놈아.”

    마법 계약하는 걸 옆에서 보고도 길버트는 툭하면 내가 이르커스를 방치한다고 잔소리를 했다. 얘가 이르커스의 열일곱 살 버전을 못 봐서 이런 의심을 하는 게 분명하다.

    나는 로브를 벗고 소파 위로 완전히 몸을 늘어트렸다. 5년 전과는 전혀 다른 외관이 되어 버렸지만, 역시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수도보다는 나무 정령들이 득시글거리는 남쪽 숲의 아틀리에가 마음은 편했다.

    길버트가 나무뿌리를 꼼지락거리며 다가오더니, 그나마 풀이 안 자란 거실 한구석에 내 실험 도구들을 하나씩 세팅해 주었다.

    본인은 내가 없는 동안 아틀리에를 식물원으로 만든 게 뭐가 잘못된 건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함께 지내 온 세월이 있어 말로 부탁하지 않아도 이렇게 챙겨 주는 건 항상 고마웠다.

    [재료 같은 건 네가 실험 때려치운다고 예전에 창고에 다 처박아 둬서 직접 찾아와야 해.]

    “네가 찾아다 주면 안 돼?”

    [난 네 집사가 아니야, 유안.]

    “빌어먹을 떡갈나무.”

    다 세팅해 주는 줄 알았더니 역시 이렇게 선을 긋는다. 나는 고마웠던 감정이 한순간에 휘발되는 것을 느끼며 소파에서 다시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질리도록 마법 연구와 마도구 실험 같은 걸 하던 시절이 있었던 탓에 이르커스에게 줄 만한 마도구를 만드는 데 재료가 부족하지는 않을 터였으나, 직접 찾으러 가자니 너무 귀찮았다.

    [뭐 만들어 주게? 네가 이미 만들어 놓은 것도 누구한테 제대로 준 적 없잖아.]

    “나 같은 수재가 만드는 물건은 세상에 함부로 나돌아다녀선 안 돼. 정작 줬던 애는 오래 못 쓰고, 세월 지나면 경매 같은 데서 프리미엄 붙어서 팔리고 있다고.”

    엣날에는 기가 막힌 발명품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다 흑역사인데, 그게 경매로 팔리고 있는 꼴을 목도하기는 싫었다.

    [이르커스도 네가 준 게 뭐든 100년도 못 쓰는 건 똑같을 텐데.]

    재료를 찾기 위해서 아틀리에를 나서는 내 등 뒤로 길버트가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으므로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확실했다.

    틀린 말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무리 <이르커스의 서>라는 한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이르커스는 필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나도 알아.”

    그걸 항상 알고 있으면서도 지적받는 순간 기분이 더러워지는 건 조절할 수가 없었다.

    길버트에게 괜한 짜증을 내지 않기 위해, 나는 아틀리에 옆에 지어 둔 창고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마도구 기능 개발 따위야 나 같은 오래 산 수재한테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물론 누워서 떡 잘못 먹으면 기도에 걸려서 죽을 수도 있다는 진리가 있어 가끔 실패작을 만들기는 해도, 나한테는 별문제가 없었다. 기능 부분에서 폭발하거나 이상한 저주에 걸려도 나한테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마도구는 내가 사용할 목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르커스에게 줄 요량으로 제작하는 거였다.

    나는 온갖 안전 테스트를 해 보기 위해 불만 가득한 물푸레나무 정령을 아틀리에 안으로 끌어들였다.

    내가 실험하는 걸 바로 옆에서 몇십 년이나 지켜본 길버트는 절대 같이 어울려 주지 않으니까, 길버트만큼 강하면서 내가 부탁하면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줄 만한 나무 정령이 데인밖에 없었다.

    [인간한테 쓸 걸 나무 정령한테 써 보는 머저리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여기 있다, 인마.”

    물론 데인은 내 호출을 처음에는 칼같이 거절했다.

    하지만 데인 역시 내 아틀리에를 식물원으로 만든 주범 중 하나기 때문에, 막 피어난 화초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고 협박하자 결국 잔뜩 짜증을 내면서 아틀리에로 기어들어 온 것이다.

    [인간의 거처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 공기조차도 불쾌하다고.]

    “지금 내 아틀리에 꼴이 어떻게 인간의 거처처럼 보이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바닥이 나무잖아. 소름 끼쳐.]

    하긴 나무 정령 입장에서는 나무로 된 바닥이 소름 끼칠 수도 있겠구나.

    나는 슬쩍 곁눈질로 아무 말 없이 나무처럼 서 있는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 길버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놈은 나한테 이 아틀리에 바닥 나무라고 불평 한마디 한 적 없는데.

    나는 펄펄 뛰는 데인을 진정시켜 가며 개발 중인 마도구의 성능을 이리저리 시도해 봤다.

    이르커스가 요청한 기능은 눈과 머리 색을 바꿔 주는 거였지만, 나는 변태 마약상에게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는 제자에게 그런 허접한 기능만 딸린 물건을 쥐여 주고 싶지 않았다. 대현자로서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나도 칭호값이 있는데.

    그래서 결국 몇 가지 방어 기능을 넣었다. 일단, 마약 같은 독을 섭취했을 경우 바로 해독이 될 수 있게끔 가장 먼저 정화 마법을 걸어 두었다.

    작은 액세서리 형태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 마도구의 특성상 영구적인 마법은 걸 수가 없어서 마법이 발동하는 횟수는 단 3회지만, 사실 이 기능만으로 이 마도구는 천문학적 가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었다. 아마 이게 경매에 나간다면 왕족이나 황족들이 기를 쓰고 자기 목숨 보전을 위해 얻으려고 혈안이 될 터였다.

    다른 기능으로는 물리 공격 반사 1회가 있다. 이걸 실험해 보기 위해 데인을 부른 거였다. 내 걱정과 달리, 내가 마도구에 넣은 기능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역시 나는 뛰어난 대현자다.

    [그 어린 인간한테 이 정도의 물건이 대체 왜 필요한 거야?]

    “내 제자가 웬 이상한 변태 새끼한테 죽으면 안 되잖아. 대현자 자존심에 스크래치 난다고.”

    [인간은 정말 이해할 수 없군.]

    투덜대던 데인은 테스트가 끝났다는 말에 후다닥 아틀리에에서 벗어났다. 내 아틀리에 안에서 키우고 있던 꽃과 약초 몇 개를 품에 끌어안고 나간 걸로 봐서는 여기에 두고 간 자기 식물 찾으러 온 게 본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거의 다 완성된 마도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좀 심란해졌다.

    기능을 몇 개 더 넣는 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과보호 같았다. 독 정화나 물리 공격 반사야 나중에 황궁에 들어가서도 쓸모가 있을 테니 그렇다 쳐도, 변태 감지 시 고자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 같은 건 오작동 될 확률도 크고, 무엇보다 이르커스에게 비밀로 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나는 결국 깔끔하게 본래의 목적인 눈 색과 머리 색 변경 기능과 이르커스에게 비밀로 할 그 외의 두 가지 기능만 넣은 채로 마도구 제작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모든 마도구 개발에서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바로 ‘디자인’이었다. 지금까지 그냥 기본 디자인으로만 만들었는데, 이르커스가 하고 다닐 거면 원석이라도 하나 박아야 할 것 같았다. 애가 그렇게 화려하게 생겼는데, 너무 심플한 액세서리를 하고 다니면 그건 그것대로 눈에 띄지 않을까?

    별것도 아닌 걱정을 사서 하며 심오하게 마도구를 바라보았다. 아직 형태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채 실험용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마도구는 내 뜨거운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자수정을 정중앙에 크게 박아 줄까? 너무 촌스럽나? 그럼 작게 조각내서 은하수처럼 둘레에 장식해 줄까?

    온갖 생각을 다 한 뒤에 내가 고른 원석은 자수정이 아니라 흑요석이었다. 주변 환경에서 마나를 모으는 데 도움이 되는 오팔이나 사파이어 같은 것도 고려했지만, 이르커스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마나 양이 이미 지나친 상태라 그런 원석을 넣어 주는 건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흑요석은 오팔이나 사파이어처럼 부가적인 기능이 있지도 않거니와, 이르커스의 눈을 떠올리게 만드는 자수정처럼 보라색도 아니었다.

    ‘흑’요석이라는 이름 그대로 검은색이었다. 검은색을 불길한 색으로 여겨 왔던 역사가 긴 이 미친 세상에서 그렇게 비싼 값에 거래되는 광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흑요석을 선택해서 반지 모양으로 제작된 마도구 중앙에 박아 넣었다. 고민이 길었던 것치고 디자인은 심플하게 나와 버렸고, 다른 원석을 박는 것보다 이 대륙에서 값어치를 높게 받기도 틀려먹게 됐지만, 딱 이 정도가 좋았다.

    내가 죽어도 이르커스가 이 마도구를 보면서 내 눈을 기억할 수 있을 만한, 딱 그 정도의 애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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