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23화
인간이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는 세계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은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내가 당신을 상처 줬어?”
“아니.”
“차라리 크게 실망하길 바랐는데.”
하지만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든 간에 나처럼 오랜 세월을 흘려보내다 보면 어떤 미감에든 질리기 마련이다.
차라리 내가 실망하길 바랐다는 이르커스의 말은 내게 조금은 아프게 다가왔다. 나만 상처 주려고 애를 쓰는 줄 알았는데, 이르커스도 나를 상처 주고 싶어 했다는 게 우스웠다.
노화가 더디게 진행되는 마녀의 핏줄치고 이르커스는 성장이 빨랐다. 신체적으로든 심적으로든 내가 인지하는 순간마다 빠르게 달라져 있는 게 그 증거였다.
테리즈는 내가 너무 더디게 흘러가는 세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크게 변하지 않은 이르커스를 보고 염병을 떠는 거라고 했지만, 내 의견은 달랐다.
이르커스는 열두 살 때까지만 해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어린이였다. 조금이라도 상처 줘 보려고 떠보는 어설픈 능구렁이가 아니라.
“당신이 내키지 않는다면 나를 도와줄 필요는 없어. 이건 내 일이니까.”
“안 하겠다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는구나. 이럴 때만 말을 안 듣지.”
“난 평소에도 그렇게 말 잘 듣는 편이 아니었어. 당신만 내가 착한 제자라고 생각하는 거지.”
불쑥 찾아온 이르커스의 반항기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세계로 넘어오기 전에 영어 단어나 수학 수식을 달달 외우는 대신, 육아 관련 프로그램이나 종일 틀어 놓고 사춘기 자녀와의 대처 방법 같은 것들을 독파했을 것이다.
학교에서 이런 건 왜 가르쳐 주지 않는 걸까? 실생활에 도움도 안 되는 영어 지문보다야 이런 쪽이 긴 생을 살아갈 때 더 도움이 되는 정보일 텐데.
아이를 키워 본 게 그 긴 세월 동안 이번이 처음인 터라 가슴이 턱 막힌 듯한 답답함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갈등 해소보다 대마법 수식 풀이가 훨씬 쉬울 게 분명했다. 그건 명확한 풀이 방식과 답이 존재하니까.
“도와줄게.”
“…….”
“나는 네 보호자잖니.”
조금만 무신경해지면 방치와 방임이 되고, 조금만 신경을 쓰면 과보호가 돼 버린다.
중도를 잡는 게 너무 어려웠다. 열두 살 때는 그래도 컨트롤이라도 됐는데, 충분히 강해지고 사회에 발을 내디딘 후에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을 만난 이르커스는 내 손 안을 자꾸만 벗어났다.
“당신은 여전히 신처럼 말하는구나.”
“내가?”
“그래, 항상.”
이르커스는 전처럼 인상을 찡그리거나 대놓고 불만스러운 얼굴을 드러내는 대신, 그냥 미소 지었다. 자색 눈동자 위로 얕게 음영이 졌다.
“난 신자가 아닌데도 그래.”
나는 이르커스의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게 우리를 위한 길이었다.
????????????
“졸부 새끼들은 아무튼 꼭 티를 내요.”
“집 안에만 경비가 스무 명이 넘더라고.”
이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마법은 암살에 최악이다. 마법 수식을 푸는 동안 주변에 존재하는 마나가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근처에 마법사나 마녀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은밀한 암살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물론 마탑 소속 마법사들은 법으로 전쟁 중이나 위급 상황이 아니면 공격 마법 사용 자체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암살 같은 일에 동원될 일은 없다. 보통 용병단에서도 암살 임무를 받는 건 숙련된 칼잡이나 제약사들이지,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 붉은 매인가 뭔가, 걘 머저리가 틀림없어.”
“트리스탄이? 사람이 좀 잘 속기는 하지만…… 영리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마법사한테 암살 임무를 주는 게 말이 돼?”
“…….”
“나 정도 되는 대현자도 은밀하게 마법 전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자연환경을 아예 까뒤집어 바꿀 생각이 아니라면.”
“당신, 잊은 것 같은데……. 나, 검도 다뤄.”
잊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노망이 난들 이르커스가 검을 다룬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용병단에 입단한 이유 중 하나가 검을 배우는 것이었으니까.
붉은 매 용병단의 용병 단장인 붉은 매 트리스탄은 내가 아는 용병왕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나름대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적이 있는 자였다.
자기 검술 실력으로도 유명했지만, 그보다는 죽은 드래곤 슬레이어의 유일한 제자라는 타이틀이 본인 검술 실력보다 비싸게 팔렸다.
젊은 나이에 용병 단장 자리를 꿰차고, 자기만의 용병단을 꾸린 것은 드래곤 슬레이어의 제자라는 후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한국이나 이세계나 혈연 지연 학연이 다 해 먹는다.
이 트리스탄이라는 인간을 이르커스의 방해로 인해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검술 스승으로서 제법 소양이 있는 모양이었다.
못마땅하긴 하지만 이르커스의 검술 실력은 검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트리스탄의 지도 아래 상당히 좋아진 상태였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마법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긴 하지만 열일곱 살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움직임이 깔끔했고, 다룰 줄 아는 검의 종류도 많았다.
게다가 보통 수식 하나 외운답시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느라 비리비리한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검을 배우느라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른 덕에 건강 자체도 꽤 좋아졌다. 골격을 보니 지금은 나와 눈높이가 비슷해도, 일이 년 사이에 훌쩍 커 버릴 거라는 것쯤은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었다.
“검만으로 암살이 되겠어? 그 자식 졸부라서 경계가 심할 텐데. 애초에 열일곱 살짜리한테 이런 위험한…….”
“유안.”
“그래, 넌 평범한 열일곱이 아니지. 그건 알겠어.”
아처볼드 따위는 소설로 치면 초반부에 등장하는 하찮은 악역에 불과할 테니, 이르커스가 그놈한테 붙잡혀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경호가 스무 명이든 서른 명이든 다 죽일 각오를 했다면, 이르커스가 공격 마법 하나만 써도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암살이 아니라 학살이 될 테지만. 뒷수습이야 내가 해 주면 되니까 전체적으로 위험해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웠다. 마법이 아니라 고작 검 따위를 쓰겠다니. 아직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검술 스승 트리스탄에게 밀린 기분이었다.
“잠입은 어떻게 할 건데. 그냥 야밤에 계획 없이 밀고 들어가진 않을 거 아냐.”
“아, 그거 말인데. 아처볼드 제닉스가 취향이 좀…… 그래.”
“더럽다고?”
“응, 어린 소년 소녀들이 취향이라는…….”
“내 생각보다도 더 화려하게 미친 새끼였네? 그럼 더 볼 거 없이 죽어야지.”
이르커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본심이 먼저 튀어나왔다.
아동 학대범이나 어린애를 그런 눈으로 보는 놈이나 싹 다 죽어 버려야 한다. 특히나 다시는 성적 기능을 못 하게 죽이기 전에 아래를 먼저 싹둑 잘라 버려야 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한 게 무색하게 아처볼드의 취향을 알자마자 생각이 달라졌다. 이르커스 손에 피를 안 묻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인간쓰레기를 치우는 것이야말로 이 각박한 세상에 공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잠입하려고.”
“뭐?”
“나, 예쁜 편이잖아. 당신도…… 까다로운 당신도 나보고는 예쁘다고 그랬고.”
이르커스가 예쁘기는 하다. 아니지, 예쁘기만 한가? 아주 명화에서 막 튀어나온 미소년처럼 생겼다.
<이르커스의 서>에 나온 이르커스의 외모 서술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꿀타래처럼 달콤해 보이는 허니 블론드도 그렇고, 보석안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보라색 눈도 그렇고. 웬만한 자수정 가공품은 이르커스의 눈앞에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변태 마약상을 죽이기 위한 잠입에 사용되는 건 결사반대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보호하고 있는 애가 그런 변태 새끼한테 제 발로 들어간다는 걸 정상적인 대현자의 사고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잠입하지 마. 그냥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마법으로 죽여 줄게. 암살? 그게 다 뭐야. 자연 발화로 위장해 줄 수도 있어.”
“진정해, 유안.”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역시, 트리스탄인가 뭔가를 좀 제대로 만나 봐야겠어. 애한테 뭐 이딴 임무를 주고 난리야. 머리카락을 전부 태워 버리든가 해야지.”
“내가 하겠다고 나선 거니까 제발 진정해. 나 보고는 남의 나라에서 소란 피우지 말라고 해 놓곤.”
아무리 애가 하겠다고 해도 못 하게 했어야지. 나는 언젠가 트리스탄을 만나면 붉은 매고 뭐고 드래곤의 원수와 내 제자의 신변을 갚기 위해 머리카락부터 태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머리에 열불 나는 경험을 해 봐야 이놈이 정신을 차리지.
“그리고 당신 마법은…… 규모가 늘 예상 밖이라 다른 사람들까지 휘말릴 수도 있잖아. 내가 혼자서 할 수 있어.”
“인간을 고자로 만드는 마도구 같은 거 개발해 줄까?”
“아니. 눈 색이랑 머리 색만 바꿀 수 있는, 안 들킬 만한 마도구 하나 정도면 충분해.”
“……난 정말 네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실 아처볼드에게 쓰레기 같은 취향이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이르커스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말릴 수 없다면 한번 해 보게 두는 것도 방법이니까. 무엇보다 이것만 끝나면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제 발로 황궁에 들어가기로 나와 약속도 했으니, 빠르게 도와주고 최대한 이르커스의 손에 피 묻히지 않는 방법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깃의 더러운 취향 때문에 이르커스가 눈 색과 머리 색까지 바꿔 가며 변태 새끼의 침실에 잠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피가 차게 식었다. 당장 아처볼드 제닉스의 저택에 낙뢰를 2천 번 정도 내리쳐, 그 새끼의 존재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난 꼭 이 의뢰를 해결하고 싶어. 이걸로 용병 생활도 마지막이잖아.”
“하필이면 이딴 의뢰를…… 꼭 고르고 골라도…….”
“불평해도 소용없어. 나도 얻을 게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이르커스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성범죄자 마약상의 거처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의심스럽게 이르커스를 노려보았다.
“너, 마약 같은 거에 손대면 진짜 혼난다.”
“내가 당신을 두고 왜 마약 같은 거에 손을 대겠어.”
“어휴, 진짜. 말은 청산유수지, 아주.”
자식새끼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나는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이르커스가 쓸 만한 마도구를 만들어 주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마법사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교한 물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 같은 대현자일지라도 적어도 이틀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