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현자는 죽고 싶어-21화 (21/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21화

    처음 이르커스가 용병 일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영생 저주에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충격으로 쓰러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사춘기 타령을 몇 번 하긴 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에게 덜컥 찾아오는 사춘기를 견딜 자신은 없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애들 키우는 게 이렇게 힘든데, 다들 어떻게 보호자 역할을 잘해 내고 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마법사의 자질을 타고나는 인간들은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 수많은 관문에 부딪힌다. 그 관문 중 가장 힘든 게 제대로 된 스승을 찾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힘든 게 머리 아픈 마법 수식들을 줄줄이 암기하는 것이다.

    관문을 열심히 넘고 넘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게 하나 있는데, 이 마법이라는 것은 인풋과 아웃풋이 확실한 수학 공식들을 기반에 두고 있으면서도 항상 출력값이 제멋대로라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기상 조절 마법을 써서 반나절 정도만 비를 내리게 하고 싶더라도, 그날의 내 몸 상태와 주변 환경의 마나 보유량, 그리고 실제 기상 상태 등이 오차 범위로 작용해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폭우를 일으킬 수도 있다. 마녀들에 비해 마법사가 가성비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옛 성인들의 말마따나 싼 게 비지떡이다.

    나처럼 오래 살면서 그 오차 범위를 감각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된 경우나 본능적으로 ‘정도’를 알고 태어난 인간들이면 모를까, 생전 처음 실전에서 공격 마법을 써 본 이르커스가 자신의 마나 보유량까지 오차 범위에 넣고 계산을 돌렸을 리가 없었다.

    당시 이르커스는 고작 열두 살이었고, 천재기는 했어도 고작 몇 개월 동안 마법을 배운 게 전부였다. 공격 마법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경각심도 없었을 터였다. 내가 안 가르쳐 줬으니까.

    그러니 첫 살인이 이르커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이긴 해도 나 역시 같은 경험이 있었다.

    살 만큼 산 나도 몇 달은 괴로워했는데, 한참 어린 이르커스가 금방 회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거기다 이르커스는 나보다 훨씬 더 도덕적인 인간이었다. 무뎌져야 할 필요가 있을 만큼, 바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열두 살짜리.

    어쩌면 아이를 안고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타이르는 대신, 엄격하게 마법 사용을 금지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실전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계약을 하나 더 걸어 뒀더라면 이르커스가 스스로 무뎌져서 돌아오겠다며 용병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생각.”

    “……정말?”

    “그래. 제국 3황자가 어쩌다 용병 일을 하고 있나, 그런 생각 중이지.”

    기대로 반짝이던 이르커스의 눈이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다.

    순진했던 어린 시절의 귀여운 얼굴이 5년 만에 절반 이상 사라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르커스는 표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못했다.

    내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마음도 커졌다. 이놈 이거, 보험 사기는 안 당해도 도박판에서 포커 치면 남는 거 없이 다 털리겠는데. 심리전이 정치의 핵심인데 이르커스는 이렇게 표정에 다 티가 나니 고도의 심리전은 못 할 팔자였다.

    “너 내가 불쌍한 표정 짓는다고 잔소리 안 할 줄 알아?”

    “불쌍한 표정 지은 적 없는데.”

    “하여튼 잘생기면 다야? 어이없어.”

    “나 잘생겼어?”

    “거울 봐라.”

    열두 살 시절에 비해 훅 자라긴 했어도 미성년은 미성년이었다.

    테리즈가 사람을 불러 이르커스 몫의 차를 한 잔 더 준비했다. 다과가 추가로 나오기 전까지 나는 이르커스 쪽으로 손 한 번 안 댄 비스킷이 남은 그릇을 밀어 주었다. 말은 더럽게 안 들어도 성장기 청소년을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용병 일은 언제 그만둘 거니? 슬슬 황궁에 들어가야지.”

    “급한 일은 아니잖아.”

    “급하거든. 벌써 미루고 미룬 게 5년이야.”

    “…….”

    “이제 마법이든 검이든 다 잘 다루고, 누굴 죽이는 일에도 익숙해졌잖니. 아니야?”

    내가 밀어 준 비스킷을 반으로 가른 이르커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예 자기가 대답할 기회가 없도록 비스킷을 입안으로 털어 넣는 꼴이 기가 찼다.

    이르커스는 지금 용병 일을 하면서 실력을 갈고닦고 정신을 수양한다는 빌미로 황궁 입성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었다.

    미뤄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러고 있는 꼴을 보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

    당장 로베인 제국의 황제가 오늘내일하며 숨이 넘어가고 있는 상태도 아니지만, 기반을 잡은 라 뭐시기가 남몰래 자기 아버지를 암살하고 황위를 이어받아 버리면 이르커스는 닭 쫓던 개 신세와 다를 바 없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패륜을 탓하면서 내가 혁명시켜 버릴 거긴 하지만.

    “입지를 미리 다져 놔야 해. 네가 그간 황궁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황제의 자리에서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적과 아군을 적절하게 심어 두는 게 중요하단다.”

    “유안, 그 말은 이르커스도 5년 동안 들었잖아.”

    “계속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얘기니까 그렇지. 보수도 잘 안 쳐 주는 허접한 용병단에서 막내 취급 받으면서 구르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막내 취급이라기엔 꽤 상전이지 않나? 마법도 다루고 검도 잘 쓰니, 용병단 입장에서는 모셔 가야 할 마검사에 가깝지.”

    “그럼 뭐하냐고. 위험한 일만 시키는데.”

    내가 입을 열수록 이르커스는 말이 없어졌다. 마치, 부모 모임에 억지로 끌려 나온 자녀가 된 얼굴로 죄 없는 비스킷만 조각내서 입에 밀어 넣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입이 열 개여도 할 말 없다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이르커스가 입단한 붉은 매 용병단은 솔직히 말하자면 듣보잡이었다. 내가 유명한 용병단 리스트 골라서 가져다 바쳐도, 이르커스는 굳이 붉은 매 용병단에 입단하겠다며 한사코 다른 용병단 쪽에 입단하길 꺼렸다.

    이유를 물으니, 내 도움 없이 스스로 해 볼 생각이라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얘 보호자인데. 성인도 아닌 애가 뭘 스스로 하겠다는 것인지 속이 터졌다.

    하지만 이르커스는 내가 죽으라면 죽는시늉은 해도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자기 고집이 지나치게 셌다. 괜히 예카리나의 후손이 아닌 것이다.

    붉은 매 용병단은 테리즈가 운영하는 정보 길드인 나이트 펠로우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고, 이르커스의 입단 이후 5년 만에 그 세력이 꽤 커지긴 했으나 여전히 내 기준에서는 성에 차지 않는 집단이었다.

    용병 단장인 놈이 과거, 드래곤 슬레이어의 제자라는 것부터가 짜증 났다. 내 또래였던 드래곤을 죽인 놈의 제자? 뭐가 예쁘다고 내 피보호자의 상사로 인정해 주겠는가? 어림도 없었다.

    자식이 대기업 놔두고 스타트업 들어가서 고생하는 꼴을 두 눈 뜨고 바로 옆에서 보는 부모의 마음이 뭔지 이런 식으로 체험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붉은 매 트리스탄을 그렇게 낮잡아 보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아니, 내가 은퇴한 용병왕 소개해 준다니까 내 말을 안 듣잖아. 그리고 이름이 트리스탄이 뭐야? 약혼녀 이름 이졸데일 것 같아서 신경 쓰인다고.”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그래. 애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왜 자꾸 간섭이니? 방치가 특기인 네가 이러니까 새삼스럽다.”

    이르커스 몫의 차를 가지고 들어오던 길드원이 찻잔만 후다닥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 남들이 듣기에는 우리가 신경전이라도 펼치고 있는 것 같겠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허겁지겁 차를 들이켜는 이르커스의 잘난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 황제 하기 싫어?”

    지금까지 예카리나의 후손들은 전부 황위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본인의 생명과 황위가 관련이 없는 경우가 다수였고, 혹시 흥미를 가지고 있더라도 인류 멸망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권력을 탐내는 수준이라 내가 그 관심을 꺾어야 했던 적도 있었다.

    이르커스가 주인공이고 황자기는 해도, 근본적으로는 예카리나의 후손이었다. 사람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병드는 마녀는 아니어도, 마녀의 피가 몸 아래 흐르는 건 매한가지란 소리다.

    남쪽 숲으로 도망쳤을 때만 해도 목숨을 건사하고자 황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충분히 강해졌으니 다른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하지만 내 짐작과 달리, 이르커스는 찻잔을 내려놓곤 명료하게 대답했다. 마주 보는 시선에 흔들림이 없는 걸로 봐서는 그 말이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테리즈는 두 사람 사이의 문제는 둘끼리 해결하라며 케인을 지지대 삼아 이 불편한 자리를 먼저 탈출해 버렸다. 아주 약아빠진 노인네가 아닐 수 없다.

    “내가 황제가 안 될 거라고 하면, 당신은 날 버릴 거잖아.”

    “애초에 계약 위반이니 내가 안 버려도 뭔가 문제가 생기겠지.”

    “그거 봐.”

    이르커스는 아무렇지 않게 남은 비스킷 한 조각을 반으로 뚝 부러트려 내 입에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비스킷의 침입에 내가 당황하든 말든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나이가 들더니 테리즈한테 약은 게 옮기라도 했는지, 전에 없이 아주 거침없이 구는 게 아주 못마땅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간 버는 거 맞아.”

    “…….”

    “당신하고 있을 시간 버는 거 맞다고. 그게 나빠?”

    억지로 입에 밀어 넣어진 비스킷은 엄청나게 퍽퍽했다. 나이트 펠로우가 다과를 어디서 공수해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제과점은 이 정보 길드가 망하는 순간 같이 망해 버릴 게 분명했다.

    내 찻잔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비스킷 때문에 목이 막혀서 무슨 말을 뱉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나쁘냐고? 당연히 최악이다.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퍽퍽한 비스킷은 한참 우물거리고 나서야 겨우 삼켜 낼 수 있었다.

    “일 하나만 더 하고 황궁으로 들어갈게.”

    “무슨 일.”

    “당신이 이럴 거 같아서 일부러 의뢰 하나 더 받아 왔거든.”

    “이르커스 로베인, 너 진짜…….”

    “당신 말대로 성군이 되려면 이런저런 경험 다 해 봐야 하는 거잖아.”

    “…….”

    “억울하면 내 의뢰 도와주든가.”

    사춘기가 와서 반항적이게 된 건 좋은데,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 같진 않으니 그게 참 문제였다.

    이르커스는 붉은 매 용병단에서 제법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용병 단장인 트리스탄이 검술을 가르쳐 줬으니 내가 유일한 스승이 아니게 되었는데도 그랬다. 첫 스승은 이래서 중요하다.

    성군이 되라는 말을 자주 하기는 했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수능 정시로 가는 것보다 입학 사정관제로 생활 기록부 빼곡하게 채워서 가는 애들이 부지기수기는 하지.

    나는 나름대로 이르커스를 이해해 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 답답한 마음이 개운해지는 일은 없었다. 비스킷 반 조각이 가슴에 얹히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거북했다.

    “무슨 의뢰인지 한번 들어나 보자. 빨리 황궁 좀 가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