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20화
“이르, 점심 사 왔다.”
나이트 펠로우 본거지에서 나와, 이르커스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집까지 천천히 걸었다.
오는 길에 점심으로 먹으라고 노점상에서 꼬치구이까지 알뜰하게 포장해 왔는데, 집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이르커스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애가 집 안에 없는 게 그렇게 당황스럽지 않았다. 이르커스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고, 의젓하게 행동하려고 하긴 하지만 애들은 원래 새로운 걸 보면 꼭 나가서 직접 보고 싶어 하니까. 그러니 어디 근처 가게 구경이라도 나갔다고 생각했다.
“얘는 진짜 또 어딜 갔담.”
한편으로는 내가 그렇게 웬만하면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 또 나갔구나 싶어 괘씸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캐러벨은 상권이 발달한 수도답게 치안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인들한테나 좋은 거지, 로베인 제국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3황자한테 좋을 리가 없었다.
마법사들의 주의를 좀 끌더라도 추적 마법을 써서 이르커스의 위치를 찾아보려던 찰나, 거실 바닥에 희미하게 남은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 핏자국을 발견하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었다.
나는 기껏 잘 포장해 온 꼬치구이를 바닥으로 내팽개치고 몸을 숙여 핏자국을 확인했다.
검붉게 눌어붙지 않은 걸로 봐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자국이었다. 게다가 지우려고 한 흔적까지 뚜렷했다. 집 주변에 누가 잠복하고 있는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는데, 내가 잠깐 테리즈를 찾아간 새에 불청객이 방문한 모양이었다.
남쪽 숲을 나온 이후, 가장 불편한 점을 하나 꼽자면 이거였다. 침입자를 꼬박꼬박 알려 주던 길버트가 없다는 거.
나는 한껏 더러워진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테리즈랑 에델라이드를 만나고 나오면서 느꼈던 그 평화로운 기분이 채 몇 시간을 가지 못했다는 게 짜증스러웠다.
주변에 어떤 마법사가 있든 조심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추적 마법을 걸었다. 웬만하면 사용할 일 없길 바랐는데, 혹시 몰라서 미아 방지용으로 걸어 둔 추적 마법이 이제야 빛을 발했다.
몇 명이나 이르커스한테 덤볐는지는 모르지만, 핏자국을 지우려고 했던 걸 보면 대치 상황이 꽤 여유로웠다는 뜻이다.
나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르커스가 즉위하기 전까진 인간한테 공격 마법 안 쓰기로 결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다 말짱 도루묵이 되게 생겼다. 작심삼일이라는 새해 결심도 내 ‘마법 적당히 써야지…….’라는 생각보다는 오래갈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추적 마법이 알려 주는 대로 공간 이동을 위해 좌표를 찍었다. 여기 대현자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 되긴 할 테지만 상관없었다.
주인공이니 지금 죽지는 않겠지.
하지만 인간은 나를 제외하곤 접싯물에 코 박고도 죽는다. 내가 죽으려면 이르커스가 필요한데, 황위에 눈먼 멍청이들이 이르커스를 죽여 버리면 나도 나를 못 말릴 것 같았다. 내가 대륙 멸망시키면 어떡해.
좌표를 찍고, 마법을 써서 이동하는 데까지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내가 이동한 곳은 캐러벨 외곽에 있는 하수 처리장이었다. 애를 데리고 외곽까지 빠지다니,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발 한번 빨랐다.
“이르커스.”
하지만 하수 처리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이르커스로 추정되는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다른 놈들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이르커스가 홀라당 납치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머릿속이 차차 맑아졌다.
생각해 보니 이르커스 로베인은 납치당할 만한 열두 살이 아니었다. 그런 마법 천재가 핏자국 조금 남기고 자기보다 약한 어른들한테 끌려갔을 리가 없었다.
이르커스는 하수 처리장 펌프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굴과 손은 물론이고 내가 기껏 사 줬던 옷에도 피가 점점이 튀어 있었다. 이르커스의 피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완전히 타인의 피였다.
“유안.”
“너 왜 그래.”
내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선량하게 말했던 어린애가 방금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한 명만 죽인 게 아니라 여러 명을.
왜 그러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보나 마나 첫 살인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저렇게 서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서둘러 이르커스에게 다가가 내 로브를 벗어 몸을 덮어 주었다. 무슨 사정인지 구체적으로 들어 봐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놀랐을 게 분명한 이르커스를 다그칠 수가 없었다.
“조절이 안 됐어. 분명 계산은 제대로 했는데…….”
“널 죽이려고 했어?”
“내가 아니라 당신을…….”
나는 내 품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리는 이르커스를 안아 들었다. 이르커스는 그 반년 새에 키가 자라서, 이제는 두 팔로 받쳐 안아야 겨우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이르커스에게 덤빈 놈들이 누구든 간에 대단한 바보들이었다.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불멸자를 죽이려고 드는 인간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이 아니라 머저리들이나 그런 짓을 한다.
“침착해, 그냥 사고였어.”
“……겁만 주려고 했었어.”
“알아. 나도 처음엔 그랬거든.”
전쟁 중이 아니고서야 마탑 소속 마법사들한테 공격 마법 사용 제한이 걸리는 이유가 뭐겠는가.
이론적으로만 마법을 다뤄 봤던 이르커스가 실전에서 곧바로 정교하게 공격 마법을 컨트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건 나도 가끔 잘 못 하니까.
“넌 특히 강력한 마법사라서 그래. 조절하는 법을 배우면 괜찮아질 거야.”
이르커스는 울지 않았다. 내 입으로 애한테 인간성을 좀 버려야 잘 살 수 있다고 말한 건 맞지만,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음에도 눈물을 보이는 대신 넋만 나간 이르커스를 보고 있자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울어.”
“…….”
“난 이런 걸로 널 무서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아. 넌 아직 무슨 짓을 해도 날 죽일 수 없단다.”
나는 수재라 이르커스 같은 천재와는 결이 다르긴 하지만, 세월이 쌓일수록 마법 능력을 조절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평균적인 강함’이 뭔지 까먹어 버린 것에 가까웠다.
사람이 주어진 수명만큼 살고 죽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걸 텐데,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몇백 년씩 살게 되니 많은 게 두려워졌다. 이를테면, 당장 바로 옆의 인간을 나도 모르게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이르커스의 등을 천천히 손으로 도닥거렸다. 마녀가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지 못하는 것처럼, 평범한 인간보다 뛰어나게 태어난 존재들은 별수 없이 튀게 되어 있었다.
양 떼 사이에서 늑대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이르커스는 아마 앞으로 더 많은 인간을 죽이게 될 것이다. 손에 피 안 묻히고 올바르게 살기엔 이르커스가 타고난 운명이 소시민의 것이 아니었다.
“무서워.”
내 어깨에 제 고개를 파묻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세월이 지나면 이르커스도 점차 사람을 죽이거나 부도덕한 선택을 하는 일에 있어서 무뎌지겠지.
그게 안타까웠다. 하필이면 나 같은 스승을 만나서 무뎌짐을 바로잡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전부 익숙해질 거야.”
“그게 무서워.”
“아니, 황제가 되려면 익숙해져야만 해.”
내 말에 이르커스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타인의 피가 말라붙은 하얀 얼굴 위로 일렁거리는 보라색 눈동자가 날 정면으로 응시했다.
“당신은 내가…… 무뎌져도 괜찮아?”
“…….”
“내가 이런 사람이 돼도, 당신은 괜찮아?”
나는 이르커스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
“곧장 황궁에 쳐들어갈 것처럼 굴더니, 언제 가냐?”
이르커스가 공격 마법을 조절하지 못해서 집에 침입했던 인간을 싹 다 죽여 버린 후로 5년이 흘렀다.
이르커스 로베인은 이제 열일곱 살이 되었고, 나는 405세가 되었다. 시간은 경주마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앞을 향해 뛰어갔다.
내 나이를 셀 때마다 한숨부터 나왔다. 이러다 금방 500살 되는 거 아니야? 반오십도, 반백 살도 아니고 반천 살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단어였다. 파충류인 드래곤보다 오래 사는 최초의 영장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보다는 거지 같았다. 싫어! ‘최초의’ 타이틀, 그만 달고 싶어!
5년 전에 비해 달라진 게 없는 테리즈가 담뱃대에 잎을 쑤셔 넣으며 빨리 좀 황궁으로 꺼지라고 투덜거렸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냥 황궁으로 진격하고 싶은데, 이르커스의 사춘기가 예상보다 이르게 온 탓에 5년을 카만에서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사춘기가 아니라, 적응기였지만.
“에델은 요즘 잘 지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애는 왜 찾아? 요즘 일 물려받느라 바쁘지.”
“몇 달간 얼굴 한 번 못 본 것 같아서 한번 물어본 거 가지고 성질은.”
“내 손녀한테 신경 끄고 네 제자나 챙겨. 요즘 통 안 보이던데. 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야, 그놈은?”
에델라이드가 나이트 펠로우를 가업으로 잇기 위해 바쁘다면, 이르커스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인간성을 덜어 내느라 바빴다.
내가 생각해도 이르커스는 스승을 정말 잘못 만났다. 잘하는 놈이랑 잘 가르치는 놈은 별개인데, 내가 예카리나 후손 좀 만났다고 너무 들떠서 덜컥 제자로 삼아 버린 게 문제였다.
물론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바로 마법 계약부터 하자고 했을 테지만, 요즘 들어서는 스승은 따로 구해 줄걸, 하는 후회가 조금씩 들었다.
사람 죽이지 말라고 날 가르치려 들던 선량한 주인공이 어쩌다가 나 같은 놈을 만나서 저런 심적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애가 날 왜 그렇게 믿고 따르는지 모르겠어. 내가 죽으라면 죽을 것처럼 구는 게 이해가 안 가.”
“스승이니까 그렇지. 그리고 넌 대현자니까. 나도 젊은 시절엔 멋모르고 네 말이면 다 되는 줄 알았잖아.”
“그건 네가 바보라서 그런 거고. 이르는 천재잖아.”
“어련하시겠어.”
테리즈와 이런저런 잡담을 하고 있는데, 누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트 펠로우 본거지는 여전히 식료품점으로 위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 통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인간은 몇 명 없었다.
그러니 저 무거운 발소리의 주인은 높은 확률로 이르커스였다.
“유안.”
황자님이면서 양반은 못 된다.
나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테리즈와 짧게 눈인사를 나눈 이르커스가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자존심 상하게도 이르커스는 열일곱 살밖에 안 됐으면서 벌써 나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나도 한국 성인 남자 평균보다는 큰 편이었는데.
“너, 피 냄새 난다.”
“씻고 왔는데.”
“그게 씻는다고 바로 지워지겠니. 이번엔 어디 다녀온 거야?”
“사냥. 제국 쪽에 문제가 생겨서.”
이르커스는 인간성을 좀 덜어 내라는 내 말을 지나치게 잘 들었다.
물기 젖은 금발을 손으로 털며 내게 멋쩍게 웃어 보이는 얼굴은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었지만, 처음 봤을 때처럼 순진하지는 않았다.
무뎌져도 괜찮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죄로, 나는 지난 5년간 내 제자가 용병 일 하겠다고 뛰쳐나가는 걸 두 눈 뜨고 구경만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