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19화
트럭에 치여 죽기 전까지 내가 제일 많이 본 영상물은 아침 드라마였다.
내 의지로 찾아본 건 아니었고, 등교 시간에 맞춰 씻고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으면 엄마가 항상 거실에 아침 드라마를 틀어 뒀기 때문이었다. 따지자면 강제로 시청당한 것에 가까웠다.
내가 본 아침 드라마가 몇 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부분 비슷한 등장인물과 레퍼토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출생의 비밀, 시한부와 기억 상실증 등등.
등교 전 10분 단위로 시청했던 아침 드라마의 매력을 이해하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았다. 내심 우리 엄마를 비롯해 왜 대다수의 한국 사람이 맨날 뺨 때리고 머리채 잡는 아침 드라마에 열광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출생의 비밀이라는 소재는 예로부터 사람들의 흥미를 과하게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다들 막장이라고 욕하면서도 흥미롭게 보는 거겠지.
“사생아라고?”
나는 남의 출생 관련 비밀을 듣고 오렌지 주스를 입 밖으로 내뱉는 아침 드라마 속 등장인물처럼 마시던 차를 뱉지 않도록 호흡을 크게 들이켰다.
다행히 먹던 걸 뱉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사레가 들려 한참 동안 콜록거리기는 했다. 혈통에 문제없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이런 사실이 밝혀지냐.
<이르커스의 서> 1권에는 이런 내용이 안 나온다. 아무리 내가 영어 단어 외우다가 라 뭐시기의 풀네임을 다 까먹어 버렸다고 해도, ‘사생아’라는 정보는 그 값이 큰 편이라 한 번이라도 봤으면 쉽게 잊지 않았을 터였다. 1권에서는 그냥 이르커스가 3황자라서 황궁 내에서 입지가 약하다는 서술 정도밖에 없었다.
건조한 문체일 때부터 짐작했어야 하는데, 그 판타지 소설을 쓴 작가가 누구였든 간에 별로 친절한 해설자는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이런 출생의 비밀 같은 중요한 정보 값은 좀 앞에다가 적어 달란 말이야. 1권밖에 못 읽은 나 같은 인간이 이 세계로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중요한 정보는 좀 앞에다가 적으라고.
혼자서 속으로 난리 블루스를 추고 있는 내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던 테리즈가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옆에서 에델라이드가 테리즈한테 ‘저런 것도 대현자라고…….’ 하면서 내 앞담화를 하는 꼴이 눈에 들어왔지만,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일 정신도 없었다.
“넌 애를 거둬 놓고 그것도 몰랐어? 평민들은 몰라도 귀족이나 황족들 사이에선 다 퍼진 사실이라던데. 너, 200년 전엔 황궁 마법사였잖아.”
“2세기 전 일을 왜 들먹여? 그리고 내 국적은 로베인 제국이 아니야.”
“그럼 어딘데.”
“대한민국.”
“뭐?”
“그런 데가 있어.”
“헛소리를 하는군.”
캐나다 이민을 꿈꿨던 시절이 아주 잠깐 있기는 하다. 미래에 대성하면 한국 국적 버리고 글로벌 성공 신화를 써 보려고 했지. 난 야망 있는 고3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야망은 수능 당일에 개박살 났으므로 나는 여전히 한국인이었다. 아무도 내 국적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것도 정상적인 국적은 아니게 됐지만.
“무소속이라고. 여기선 국적 없어, 이제.”
“잘났다. 아주 자랑이다. 이르커스만 불쌍하지. 너 같은 보호자 뭐가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건지, 난 진짜 이해가 안 가. 차라리 내 손자로 거둬서 기르는 게 낫지.”
“그럴래?”
“아, 싫어. 할머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전 저 자식이랑 서류상으로라도 남매가 되긴 싫다고요.”
테리즈의 썩어 버린 오른발을 고쳐 준 뒤로부터 반년 동안, 나와 이르커스는 남쪽 숲을 떠나 카만의 수도 캐러벨에서 시간을 보냈다.
테리즈가 운영하는 정보 길드, 나이트 펠로우 본거지에 무전으로 몸 좀 의탁해 보려고 했는데 테리즈가 나를 바로 내쫓았다. 결국, 아틀리에 어딘가에 처박아 둔 갤런 주머니를 찾아서 내 돈 주고 방 하나를 임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길버트와 데인을 비롯한 나무 정령들은 나와 이르커스가 몇 년 정도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에 섭섭해하기는커녕 반기는 투로 잘 다녀오라고 배웅까지 해 주더라. 그래도 가장 오래 살았던 길버트라면 좀 섭섭해하기나 할 줄 알았는데, 빨리 꺼지라고 짐까지 알뜰하게 싸 줬다.
남쪽 숲에서의 생활이 이르커스에게도 상당히 지루했던 모양인지, 이르커스는 캐러벨에서 반년 정도 보내다 황궁으로 들어가야겠다는 내 말을 군말 없이 따랐다.
하긴, 절에서 도 닦는 기분으로 마법 수양할 게 아니면 나무 정령들만 득시글거리는 남쪽 숲은 영 재미가 없을 터였다.
평화롭게 살겠다고 굳이 남쪽 숲에 처박힌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인간들이 나무 정령한테 쫄아서 숲에 잘 안 들어오니까 별다른 사건 사고가 없었다. 한마디로 어린애들한테는 생명의 위협만 있고 마땅한 오락거리는 없는 장소였다.
황제 목을 바로 칠 거면 당장 쳐들어가도 상관없지만, 차근차근 자리를 찾아갈 거라면 어느 정도는 준비도 필요했다.
아틀리에를 한바탕 뒤엎어서 찾은 갤런 주머니의 수가 생각보다 많아 초기 자금은 충분했지만, 제국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라 뭐시기가 정확히 어떤 놈인지도 알아야 하고, 내가 죽여 버렸던 13대 황제 이후로 몇 대가 더 흘렀는지도 제대로 알아봐야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데,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백전백패하게 생겼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더라도 무력이 많은 것을 해결해 주겠지만, 그럴 경우 내가 조절을 못 하고 또 다 죽일까 봐 그게 참 걱정이었다.
나는 이르커스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인간한테 공격 마법을 쓰는 걸 좀 자제하기로 했다. 괜히 죽였다가 이르커스 교육에 악영향을 주면 애가 자라서 또라이 황제가 될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르커스가 떡잎부터 또라이라면 그냥 내버려 둘 텐데, 저렇게 선량하고 순진한 애를 타락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남쪽 숲에 칩거하며 살아간 지 너무 오래돼서 세상 물정에 어두웠고, 이르커스는 평생 황궁에 갇혀 자란 탓에 궁 밖의 생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유감스럽지만 이르커스는 궁 안의 정치 흐름에 대해서도 영 아는 게 없었다.
처음엔 애가 마법만 잘 쓰고 정치로는 소질이 바닥이라 그런가 싶었는데,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다 싶었다. 소식 알려 주고 대신 정치해 줄 측근 하나 없었으면 별수 없지.
이르커스의 이복형제는 총 네 명이었다. 위로 형이 둘, 누나가 하나, 그리고 아래로 여동생 한 명까지.
그중 형 한 명과 누나는 죽어 버렸으니, 따지자면 그 라 뭐시기와 여동생 정도만 남은 것이다. 여동생은 라 뭐시기랑 동복 남매에 나이도 어려 견제 대상으로 삼기 좀 그랬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이르커스의 라이벌은 라 뭐시기밖에 없는 것이다.
외척 세력도 없는 사생아면서 손위 형제 둘이 썰려 나가는 동안 살아남은 게 용했다. 스승이 없어 마법도 제대로 못 썼을 텐데, 무슨 수로 버틴 건지 궁금했다. 주인공 버프로 살아남은 건가?
테리즈가 구해다 준 정보에 의하면, 이르커스는 황비나 후궁에게서 태어난 적자가 아니라 신원을 알 수 없는 묘령의 여성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이 ‘묘령의 여성’은 아마도 예카리나의 핏줄이겠지. 어떤 마녀가 또 정신 못 차리고 황제한테 반했냐? 나는 예카리나의 지독한 금사빠 유전자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세대를 수없이 거쳤음에도 사랑에 눈멀어 후대를 남기는 마녀가 있다는 게 참으로 놀라웠다.
당연히 이르커스의 모친일 마녀가 예카리나처럼 황궁에 뿌리 박을 거라곤 생각 안 했지만, 그렇다고 애를 두고 그냥 떠나 버릴 줄은 몰랐다.
황제는 그래도 꼴에 자기가 아버지라고 이르커스에게 3황자 칭호를 내려 주긴 한 모양인데, 외척 세력도 없는 황자가 혈통이나 신분을 꼬박꼬박 따지는 신분제 사회에서 입지를 가지기란 쉽지 않다. 학대나 안 당하고 살았으면 다행이지.
그걸 반증하듯 이르커스는 황자치고 황궁 예법에 약간 서툴렀다. 내가 교육하니 금방 좋아지기는 했지만,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다. 나는 또 시대가 바뀌어서 예법이 변한 줄 알았지. 이런 법도도 원래 유행이 있기 마련이니까.
이르커스는 타고난 골격은 좋았지만, 영양 상태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암살 시도에 얼마나 시달린 건지 몇 번 봤던 벗은 몸에 자잘한 흉터도 많았다. 괜히 나쁜 기억을 자극할까 봐 일부러 알은 척 안 하고 넘어갔는데, 이것도 이럴 줄 알았으면 물어보고 싹 고쳐 줄 걸 그랬다.
그간 이르커스가 무슨 고생을 하며 살았을지 구체적으로 묻진 않고, 눈치껏 파악한 정보만을 바탕으로 대현자는 모든 걸 다 안단다…… 라고 둘러대면서 아무것도 안 물어봤던 게 문제였다. 거둔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르커스가 가진 출생의 비밀을 지금 알게 됐으니까.
교육에 잠깐이라도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머릿속에서 내쫓았다. 나 같은 놈은 교육자가 되면 안 된다.
“나한테 왜 가족 얘기를 안 해 줬을까?”
“안 물어봤겠지, 네가.”
“안 물어보긴 했지. 대뜸 애한테 너 황자라면서 지지 세력이 왜 없어? 사생아니? 라고 하는 건 이상하잖아.”
“이런 데서만 상식적으로 말하지 마.”
테리즈가 한심하단 얼굴로 내게 서류 뭉치를 내던졌다.
내가 얼마 전에 부탁한 로베인 제국 정치 구도 관련 서류였다. 썩은 발을 치료해 준 값으로 정보 공짜로 알아봐 달라고 회유했다가 주먹으로 얻어터지고, 나이트 펠로우 본거지에서 쫓겨날 뻔했다.
내가 직접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귀찮았다. 정보 길드 코앞에 두고 왜 내가 직접 알아봐야 해.
나는 테리즈에게 웃돈을 얹어 주고 나서야 겨우 얻게 된 로베인 제국의 현재 정치 상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테리즈가 건넨 서류 뭉치는 미래에 백과사전이라도 되려고 하는 건지 지나치게 빽빽하고 두꺼웠다.
“황제가 벌써 21대야? 진짜 숨 쉬듯이 갈아치우나 보네.”
“귀족들이 득세 중이니까.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갈아치워서 그렇지, 뭐.”
“뭔 당파가 이렇게 많아?”
“거기도 고여서 그래. 크게는 두 갈래밖에 없다고. 황제파랑 귀족파. 그 안에서 좀 세세하게 나뉘어서 그렇지.”
“아주 조선이네, 조선이야.”
한국사 공부했던 기억이 날카롭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노론 소론 남인 서인 머리 깨면서 외웠던 그 기억이. 어느 나라나 망할 시점이 되면 정치 상황이 더러워진다더니, 로베인 제국도 딱 그 꼴이었다.
내가 죽이고 나온 황제가 13대였는데, 지금 21대라고? 13대와 21대 사이에 몇 명이나 있는지 손가락으로 접어 가며 생각을 해 보았다.
2세기 동안 황제 자리에 올라갔다 내려온 놈이 일곱 명이나 된다는 게 내심 웃겼다. 다윈과 13대는 그렇게 또라이 짓을 하고 다녀도 나름대로 오래 집권했는데, 요즘 황제들은 하루살이보다도 목숨이 빈약한 모양이었다.
“황제 자리, 이제 허수아비인가 본데 다들 왜 하려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권력 쥐어 봐야 사서 고생하는 건데.”
“그러는 너도 네가 돌보는 애를 황제로 만들려고 하잖아.”
“난 내가 죽으려고 시키는 거고.”
“그 애는 황제가 되고 싶대?”
“돼야지. 안 되면 어쩔 거야? 걘 잘 먹고 잘 살려면 황제가 돼야 해. 겸사겸사 나도 좀 죽여 주고.”
나 때문이 아니라도 이르커스 로베인은 황제가 되어야 한다. 라 뭐시기를 척살하지 않는 이상, 발 뻗고 잠들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일 테니까.
“이르커스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야. 걔가 황제 안 되면 로베인 제국도 망할걸.”
“아주 애 키우더니 자기 새끼 천재라고 난리가 나셨네.”
“야, 솔직히 내 눈에만 천재니? 너도 딱 봐 봐. 이르는 그냥 객관적으로 봐도 세기의 마법사기는 해.”
“잘났다, 아주.”
“아무튼 기왕 황제로 앉히는 거, 허수아비로 만들 수는 없지. 대현자가 스승인데…… 나도 체면이 있잖아?”
“넌 진짜 그동안 제자 안 들인 게 네가 살면서 제일 잘한 짓이야.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을 거다.”
테리즈가 질린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치료 마법을 멋지게 걸어 줬는데도 테리즈는 계속 케인을 지지대 삼아 짚고 다녔다. 아무리 내가 죽여주는 치료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대현자라도 노화로 인한 관절 문제까진 해결이 안 된 모양이었다.
나는 날 한심하게 쳐다보며 테리즈를 부축하러 뛰어오는 에델라이드를 향해 친절하게 눈웃음까지 쳐 줬다.
에델라이드가 질색하면서 테리즈를 데리고 가는 꼴이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