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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18화 (18/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18화

    대륙 내에서 치료 마법을 원활하게 사용하는 마법사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마법사 백 명이 있으면 그중 한두 명 정도만 치료 마법에 능숙했다.

    사실 ‘치료’라는 개념은 마법의 영역이 아니라 신관과 의사들의 영역이니까. 긴급 상황이 아닌 이상, 마법사가 치료 마법을 남발하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도 했다. 마법사들이 다 해 먹고 살면 신관들이랑 동네 의원은 뭐 먹고 살겠는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신관들은 신성력이 있어도 예전처럼 질병을 낫게 하거나 부러진 뼈를 곧바로 이어 붙이지는 못했다.

    요즘은 단순 타박상 정도나 치료해 줄 수 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내가 신관을 대면한 게 100년은 더 된 일이라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황궁 호수에 떨어져 예카리나에게 애완 인간으로 연행됐을 때만 해도 로베인 제국의 주 종교는 헤누스교였다. 영원과 풍요를 관장하는 헤누스를 주신으로 삼고 있었고, 신입 신관들도 신성력을 조금만 들이면 질병 하나쯤은 뚝딱 고쳤다.

    그뿐인가? 골절상도 하루 만에 낫게 해 줬다. 내가 노예 생활하면서 사지 멀쩡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카리나가 나한테 헤누스교 신관들을 알뜰살뜰 붙여 준 덕분이었다.

    그러다가 카만 침략 전쟁을 기점으로 200년쯤 전부터 대륙의 주 종교가 바뀌었다. 헤누스가 주신이었을 때는 신관들이 의사에 가까웠는데, 요즘은 그때와 다르게 법관 쪽에 가까워졌다고 들었다. 치료나 간호보다는 판결과 처형에 신성력을 쓴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현재 대륙의 주 종교인 엘리오스교의 주신 엘리오스는 균형과 조화의 신이다. 난 여전히 무슨 일만 터지면 한국에서도 시험 치기 전에만 바짝 믿었던 하나님을 찾지만, 근본적으로 이 세계는 하늘에 떠 있는 달 개수보다 많은 신을 섬기는 다신교 체제였다.

    모시는 신이 많은 건 장단점이 확실했다. 상황과 시기에 따라 필요한 신을 주신으로 바꿔 가며 대륙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장점이었다. 정치적으로 종교를 알뜰살뜰 이용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남쪽 숲 소유권을 두고 발발한 카만 침략 전쟁 이후 균형의 수호자인 엘리오스가 전 대륙에서 주신으로 자리 잡고,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에게는 전쟁 중이 아니면 공격 마법을 쓸 수 없다는 법이 적용되었다.

    노예 제도가 완화된 것도 그즈음이었고, 아무리 전쟁 포로여도 사람을 무작정 고문하면 안 된다는 법이 생긴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국가마다 불가침 조약이 바쁘게 오고 갔다. 균형과 조화를 수호하는 엘리오스가 주신이 된 것은 대륙 내에서 전쟁 좀 그만하자는 거시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몇십 년씩 치고받은 덕에 다들 전쟁에 잔뜩 질려 버린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고, 수많은 문화가 파괴되었다. 사람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외우기도 어려운 수십 개의 조약과 동맹을 체결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은 보편화되고 어떤 것들은 희귀해졌다.

    치료 신관과 치료 마법을 전문으로 하는 마법사가 드물어진 대신, 마법 계약이 흔해지고 봉인과 처형에 능숙한 신관들이 늘어난 게 그 예였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대가 추구하는 목적과 능력 역시 바뀌었다.

    덕분에 헤누스가 주신이던 시절보다 돈 없는 일반인들은 치료 받기가 참 어려워졌다는 문제가 생기긴 했으나, 일반 의원들의 수도 그만큼 늘어났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의원들은 마법사나 신관들처럼 단숨에 낫게 하진 못했지만, 공공 보건에 기여할 만큼의 의학적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네 손녀가 의원이 아니라 날 찾아온 데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평범한 노인 질환이나 전기 충격으로 인한 내상이라면 의원들도 충분히 진료를 볼 수 있다. 테리즈처럼 돈이 많은 인간이라면 실력 좋은 의원들을 떼로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에델라이드는 의원이 아니라, 대현자를 찾아 위험하게 남쪽 숲까지 들어왔다.

    테리즈를 닮아 불같은 에델라이드의 성격을 미루어 보아 정말로 8할 정도는 날 죽이겠다고 쫓아온 것 같긴 하지만, 남은 2할 정도는 아마 자기가 난동을 피우면 내가 캐러벨로 나와 테리즈를 확인해 볼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을 터였다. 에델라이드는 겉모습만 테리즈를 닮은 게 아니라, 머리 굴리는 것도 쏙 빼닮았으니까.

    “이 근처에 제국 기사단이 잔뜩 깔려 있다는 것 말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어.”

    “당신이 다녀간 뒤로 제국 기사들이 나이트 펠로우에 쳐들어왔어.”

    “에델, 더 말하지 마라.”

    “나를 인질로 잡고…… 그리고 할머니를 고문했어. 이상한 약 같은 걸 먹였다고. 할머니가 뱉으려고 했는데…….”

    역시, 그냥 지금 황제 목을 바로 쳐 버리고 이르커스를 그 자리에 앉힐까?

    나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반란으로 자리를 빼앗으면 이후에 고생은 좀 하겠지만 이르커스는 똘똘하니까 나 없이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혈통에 문제도 없고, 지지 세력은 없어도 황자라는 정당성은 있으니 이 미쳐 돌아가는 신분제 사회에서 대놓고 흠 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남의 나라에 기사단 보내서 나이 많은 정보 길드 수장을 고문하는 놈들이라니. 역시, 국가 개혁을 위해서는 혁명뿐이다.

    내가 한국인답게 얼굴도 모르는 황제의 목을 치는 상상을 하는 동안, 테리즈가 나와 이르커스 쪽을 향해 절뚝거리면서 다가왔다. 서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발끝부터 천천히 몸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왼발은 괜찮아 보였지만, 오른발은 이미 발등까지 검게 문드러진 상태였다. 몸 상태가 이런 와중에도 안락의자에 앉아 정보 길드 업무 문서나 보고 있으니, 손녀딸이 기겁해서 남쪽 숲으로 뛰어온 것도 이해가 갔다.

    “라크리움이군. 해독제는 먹었니?”

    “구하긴 했지. 하지만 늙은 몸에 독한 해독제가 들어가면 의식을 못 차릴 수도 있다더군.”

    “아무래도 그렇지. 라크리움도 독하고, 그 해독제도 독하니까. 하지만 안 먹으면 계속 썩어 들어갈 거야. 라크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썩는 속도가 빨라지잖아. 지금도 잘못하면 다리 하나는 잘라야겠는데.”

    라크리움은 식물의 이름이다. 비만 잘 내리면 어느 토양에서나 가리지 않고 잡초처럼 잘 자라는 이 식물은 정량만 사용하면 훌륭한 각성제로써의 기능을 하지만, 조금만 과복용하면 신체 끝부터 몸을 썩게 만들었다.

    채취는 물론 제조마저 쉬우니, 라크라움은 순식간에 오남용되어 고문용 약물로 자리를 잡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라크리움 자체를 구하기 쉬운 덕에 해독제도 구하기 쉽지만, 해독제는 라크리움보다 약효가 더 독했다. 심지어 해독제를 먹는다고 썩은 부위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안 먹으면 발끝부터 썩어 들어가, 종래에는 온몸이 검게 문드러져 죽었다.

    카만 침략 전쟁 당시에 포로 고문용으로 개발된 약물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걸 억지로 복용당한 사례를 내 두 눈으로 다시 본 건 200년 만이었다. 제국 놈들은 법이 장난인가? 자기들이 제정해 놓고 왜 자기들이 어기고 난리람.

    나는 테리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에델라이드도 제 할머니가 걱정되는지 훌쩍거리면서 내 뒤에 붙어 테리즈에게 다가섰다.

    “우리 할머니는 원래 저 이르커스인지 이리커스인지의 위치를 발설할 생각이 없었다고.”

    정보 길드를 운영하면서 상당한 속물이 된 덕에 기꺼이 돈 받고 이르커스의 위치를 팔아넘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손녀가 인질로 잡혀 있고, 고문당하는 와중에 별수 없이 말하게 된 거겠지. 테리즈도 잘못했다면서 전기 충격을 준 걸 합리화하고 있었는데 이제 다 망했다.

    나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이르커스와 내가 이 가게에서 곧바로 공간 이동 마법을 써 버린 탓에 마법 흔적을 노골적으로 남겨 본의 아니게 테리즈에게 큰 피해를 주고 말았다.

    “원래부터 고발은 할 생각이었어. 내가 고발하기 전에 제국 기사단 새끼들이 들이닥쳐서 그렇지.”

    하지만 테리즈는 내가 미안해할 틈도 주지 않고, 친절하게 고발할 생각이었다며 진실을 말해 줬다. 할머니는 발설할 생각이 없었다고 항변하려던 에델라이드의 꼴이 조금 우스워졌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테리즈 앞에 몸을 굽혀 앉아, 테리즈의 썩어 들어간 오른발부터 확인했다.

    치료하기가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일단 해독제를 먹더라도 마법을 쓰지 않는다면 썩어 들어간 부분을 절단해야 할 테지만, 나는 대현자라 이 정도는 고급 치료 마법으로 복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아직 다리를 잘라 낸 것도 아니니, 독한 해독제 없이도 라크리움 복용 전으로 상태를 되돌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르, 이리 가까이 와서 봐라.”

    나는 같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르커스를 내 옆으로 불렀다. 온 김에 치료 마법 실전을 한번 보여 주고 가야지. 이런 기회는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다. 난 크게 다쳐도 알아서 회복되기 때문에 치료 마법 실습을 보여 주기 참 어려웠다.

    황궁에 들어가면 언제 어디서 독을 먹게 될지 모르니, 이르커스도 남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자체 치유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했다. 나는 독을 먹어도 잠깐 아프고 말지만, 이르커스는 죽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내 부름에 이르커스가 심란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자기 때문에 테리즈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르커스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가볍게 두드려 줬다. 이 모든 문제의 잘못은 이르커스가 아니라, 애 하나 찾겠다고 민간인 고문하는 제국 기사단 쪽에 있었다. 더 근본적으로는 황위 싸움 하나 하겠다고 이 난리를 치는 라 뭐시기와 애들 싸움 하나 못 말리는 지금 황제 탓이었고.

    “생각이 바뀌었어. 준비가 되면 바로 황궁으로 들어가자.”

    간단하게 황제 목을 비틀어 황위를 찬탈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내가 죽은 뒤에도 이르커스의 자리가 무사하려면 기반을 좀 쌓아 둘 필요가 있었다.

    이르커스의 앞날과 불쌍한 제국민들의 미래를 위해 나는 천재지변으로 황제를 암살하는 대신, 황궁에 직접 들어가 이 지랄을 해 놓은 인간들을 천천히 직접 말려 죽이기로 했다.

    마침 이르커스의 본 마법 실력도 알게 되었고, 테리즈가 있으니 잠입 전에 황궁 내부 상황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테리즈의 발 위에 고급 치료 마법의 복잡한 수식을 천천히 그려 넣으며 평화롭게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정치도 조기 교육이 필요해.”

    절대 내가 빡쳐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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