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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17화 (17/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17화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불길한 감각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그간 딱히 잘해 준 적이 없는데 이르커스는 내게 벌써 정을 주고 있었다.

애가 멱살 잡혔을 때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걸까? 아니면 나름 엄격하게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르커스 입장에서는 친절하게 느껴졌던 걸까.

“지금 내가 밉지? 네 말을 계속 안 들어 주니까.”

“…….”

“더 미워하렴. 난 미움 받는 걸 좋아해. 호의보다 악의에 더 익숙하거든.”

“당신이 밉기보단 내가 어린 게 싫어.”

“귀엽긴.”

나는 일부러 이르커스의 금발을 손으로 잔뜩 흐트러트렸다.

그 정도 말로 상처 입힐 수 없다면 이런 말로라도 이르커스를 내게서 떨어트려야 했다. 형편없이 찡그려지는 이르커스의 미간을 보자,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타인의 애정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이르커스의 호의는 나를 종종 두렵게 만들었다. 예카리나가 죽었을 때처럼, 이르커스가 죽게 되면 마음 한구석이 공허해질 게 분명했다.

내게 의존하고 나를 따르는 천재 제자가 훌륭하게 자라고, 현명하게 늙어, 결국 관에 들어가는 걸 봐야 한다니. 세상은 역시 불멸자에게 너무 잔혹했다.

내가 애를 망치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이르커스 로베인이 어떻게 황제가 되었는지까지는 모른다. <이르커스의 서>는 17권짜리인데, 나는 1권밖에 못 읽었으니까. 이르커스가 남쪽 숲에서 탈출해서 황궁으로 돌아가는 게 내가 기억하는 1권 내용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하나 확실한 건 원작에는 대현자 같은 게 없다는 것이다. 이르커스는 열두 살에 마법사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열일곱 권 중 남은 열여섯 권에서 나보다 더 나은 스승을 만나거나, 먼치킨 주인공답게 마법사들의 규칙을 깨고 혼자 마법을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이르커스가 가져야 할 수많은 미래의 인연을 내가 끊어 버리는 걸까 봐 불안했다.

중간중간 고생을 좀 하긴 해도 탄탄대로일 주인공의 삶이 나 때문에 망가지면 어떡하지. 뒤늦게 이런 불안감이 엄습한 것은 내가 이르커스에게 정신 못 차리고, 또 정이 들었기 때문일 터였다.

“걱정하지 마. 넌 나한테 항상 어린애일 테니까.”

손끝에서 부스스 흩어지는 이르커스의 밝은 금발이 빛을 받아 더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천천히 손을 거두고, 이르커스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미래는 이르커스가 나이를 더 먹고도 날 이렇게 따르는 것이다. 마지막 희망인 사춘기에도 이런 맹목적인 애정을 보인다면 정말 곤란했다.

빨리 키워서 황제로 만들고 장가보낸 다음, 내가 아니라 자기 가정에 신경 쓰게 만들어야지.

나는 가슴속에서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어떤 불안을 애써 무시했다.

이르커스와 나는 사는 시간 선이 다른 존재였다. 누구에게든 처음 다가온 존재는 특별할 것이다. 이르커스에게 내가 ‘처음 생긴 스승님’이나 ‘나를 거둬 준 대현자’ 이상으로 남으면 곤란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되면 이르커스도 분명 내게서 금방 독립해 나갈 것이다. 다른 마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찾겠지.

이르커스가 날 죽이는 미래를 상상하는 게 처음보다 아주 조금 어려워졌다.

????????????

몇 달도 아니고, 몇 주 만에 다시 방문한 카만 왕국의 수도 캐러벨은 변함없이 활기찼다. 양옆에 에델라이드와 이르커스를 끼고 도착한 탓에 더 시끌벅적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넌 황자라는 놈이 국제 정세도 몰라? 이거 보니까 아주 마법만 잘 쓰지, 바보 멍청이네.”

“누가 바보라는 거야? 역사 수업에서 들었던 내용이랑 달라서 되물어본 것뿐이거든.”

“참 나. 야, 당연히 제국이 먼저 침략했지 왕국이 먼저 반란했겠냐?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나는 나를 사이에 두고 적극적으로 싸우는 두 10대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라고들 하지만, 저렇게 서로를 열정적으로 멍청이 취급하고 깎아내리는 꼴을 보고 있으니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기는 영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미운 정도 정이니까, 계속 가까이 붙여 두면 물리적 거리 때문에라도 서로 익숙해지겠지.

서로 아무 말도 안 할 때는 애들이 내외라도 하나 싶었는데,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하자 그냥 다시 조용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다 평균 이상의 외모라 안 그래도 눈에 띄는데, 아무리 로브를 뒤집어썼다고 한들 이렇게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싸우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얘들아, 그만 싸우고…….”

“애초에 잘 모르면 대현자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저 인간은 200년 전 전쟁 때도 살아 있었을 거 아냐. 안 죽으니까.”

에델라이드의 말이 맞다. 나는 몇 세기 전 전쟁에도 살아 있었다. 살아만 있으면 다행이게? 직접 참전도 했다.

로베인 제국에서 애들한테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 카만 왕국은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는 약소국이었다. 제국과 그 외 주변 국가에서도 카만 왕국을 굳이 침략하려 들지 않을 만큼 그 규모가 작았다.

제국이 카만에 관심을 보이게 된 이유는 남쪽 숲 때문이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남쪽 숲은 나무 정령들의 군락지라 죽여주게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동시에 좋은 목재와 훌륭한 흙을 얻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남쪽 숲에서 나오는 목재와 토양 때문에 제국은 남쪽 숲이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했다. 공식적으로 협의를 나눈 적은 없지만, 저 조그마한 카만 왕국이 감히 제국을 상대로 남쪽 숲에 소유권을 주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주변 국가들도 당연히 남쪽 숲을 로베인 제국의 것으로 여겼다. 설마하니 카만이 미치지 않고서야 고작 숲 하나 때문에 군사 규모가 남다른 제국에 시비를 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만 왕족들은 대개 미친놈이었다. 그것도 그냥 미친놈이 아니고, 돈에 제대로 미친놈들.

그놈들은 이익과 명예에 눈이 돌아서 남쪽 숲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근거도 아주 다양했다. 경계를 두고 있는 면적이 전체 국토 대비 몇 퍼센트 이상으로 더 넓기 때문에, 남쪽 숲이 자기네 거라는 경계지 비율형 주장부터 시작해서 머나먼 제국의 황제가 카만의 왕족에게 숲의 소유권을 넘겼다는, 기록에 없는 설화적 이야기까지.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거짓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만 왕국은 ‘너희 계속 까불지 마라?’ 하고 이를 박박 갈고 있던 로베인 제국에게 계속해서 ‘너희 땅 아닌데? 우리 건데?’ 하고 알짱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남쪽 숲을 돌아서 넘어오는 통행로에 사람을 배치해 통행료까지 받았다.

로베인 제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은 카만의 이런 행태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고, 그렇게 카만 왕국 침략 전쟁이 시작되었다. 6할 정도 되는 역사적 사건이 대개 그렇듯, 이것도 쌍방 과실이었다.

“로베인 제국이 카만을 먼저 친 게 맞지?”

에델라이드가 눈을 빛내며 내게 질문했다. 일단 선빵을 친 건 로베인 제국이 맞았다. 나는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요즘 좀 교육자로서의 자질이 빛나고 있기는 해도, 내 전공은 수학과 과학을 기반으로 한 마법이지 역사학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애들한테 뭐라고 해. 너희 선조들은 모두 땅따먹기에 미친 놈들이었고, 나무 정령들이 그래서 인간을 싫어하는 거란다, 라고 말하는 건 너무 로망이 없어 보였다.

“봤지? 제국 놈들은 다 무뢰한이라고.”

“하지만, 분명 카만이 먼저…….”

“네 스승이 아니라잖아.”

에델라이드가 이르커스를 들들 볶는 것을 곁눈질로 구경하며 걷다 보니 금세 식료품 가게로 위장한 나이트 펠로우 본부 앞에 도착했다.

나는 혹시 모를 정보 길드 놈들의 악의에 대비하기 위해 수장의 손녀인 에델라이드를 앞세워 안으로 입장시켰다.

“너무 풀 죽지 마. 살아 보니까 제국이나 왕국이나 다 개자식들이야. 인간이 국가 단위로 모이게 되면 꼭 사달이 난다고.”

“…….”

“그러니, 넌 꼭 훌륭한 성군으로 자라야 한다.”

그래야 내가 죽어도 혁명 안 당하고 오래 살지.

나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이르커스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

테리즈가 오늘내일하며 죽어 간다는 에델라이드의 주장과 다르게 테리즈는 겉보기만큼은 무척 멀쩡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마르기는 했어도, 침상에 누워 있지도 않았고 어디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이게 죽어 가는 거야?”

“우리 할머니 마른 거 안 보여?”

“어어, 전에 비해 마른 건 알겠는데 풍채는 여전히 좋아 보이는데.”

나는 또 눈물을 글썽이면서 할머니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길래 정말 위독한 상황인 줄 알았지.

테리즈는 에델라이드와 나, 그리고 이르커스를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읽던 문서를 내려놓고 푹신해 보이는 안락의자에서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웬일로 케인 비슷한 걸 한 손에 지지대처럼 쥐고 있었다.

테리즈가 글자를 읽느라 끼고 있던 알이 두꺼운 안경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전에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케인과 안경을 보니 테리즈의 노화가 가깝게 와닿았다.

“에델.”

“할머니, 이 대현자가 치료 마법도 쓸 수 있다고…….”

“너 설마 남쪽 숲에 들어간 거니?”

“…….”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테리즈 펄번은 내 예상대로 자기 손녀한테도 꽤 엄격한 조모였다. 나는 바로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이는 에델라이드를 곁눈질했다.

나한테는 바락바락 대들더니, 테리즈한테는 말대꾸 한번 제대로 못 하는 게 신기했다. 테리즈보다 내가 더 강할 텐데…… 할머니를 꽤 사랑하는 모양인지 사랑하는 만큼 눈치도 꽤 보는 것 같았다.

겉보기엔 아파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에델라이드가 호들갑을 떨며 남쪽 숲에 찾아온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네 손녀가 말하길 네가 위독한 상황이라고 해서 찾아와 봤는데, 내 예상보다 좀 지나치게 멀쩡한걸.”

“네 도움은 필요 없어, 유안.”

“어디가 아프긴 아픈 모양이지? 내 낙뢰 마법 탓이라면 책임을 지긴 져야 해서. 네 손녀랑 약속했거든. 이르랑 친하게 지내 주는 대신, 네 건강을 좀 주기적으로 봐주기로.”

“아픈 곳은 없어. 네가 말했듯이 난 예상보다 오래 사는 인간이라. 에델이 헛걸음하게 했군. 대신 사과하지. 그만 돌아가도 좋아.”

“테리즈, 고집 좀 그만 부려. 에델이 울잖아.”

저 나이쯤 되면 어디든 속병이 나기 마련이다. 겉으로야 정정해 보여도 저 알 두꺼운 안경 하며, 주름진 손과 목이 테리즈의 실제 나이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테리즈가 내게 돌아가라고 하자마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에델라이드가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확인 사살이었다.

“무슨 병에 걸렸는지 말해. 고쳐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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