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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16화 (16/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16화

    “서로 인사해라.”

    “…….”

    “이쪽은 에델라이드 펄번. 보다시피 우리가 전에 봤던 테리즈의 손녀야. 진짜 닮았지?”

    “…….”

    “그리고 여긴 이르커스…… 이르커스 무슨 로베인이었지?”

    “이르커스 사크리나 로베인.”

    “그렇대. 이르커스 사크리나 로베인. 로베인 제국 황자님이란다. 비록 지금은 도망자 신세지만.”

    당장 우리 할머니부터 치료하러 가자는 에델라이드를 어르고 달래서 내 아틀리에로 데려온 것까진 좋았는데, 막상 서로 대면한 에델라이드와 이르커스는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기는커녕 서로를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억지로 악수라도 시킬까 하다가 괜히 어른이 애들 관계에 끼어들면 악영향을 줄 것 같아, 나도 같이 입을 다물었다.

    길버트가 그 뒤에서 에델라이드는 대체 왜 데려온 거냐고 내게 몸짓으로 물었다. 왜 데려오긴? 400살 처먹은 대현자랑 그보다는 적지만 백 살 넘는 떡갈나무 정령보다는 또래 친구가 애 정신 건강에 좋아 보이니까 데려왔지.

    나도 나름대로 책임감 있는 어른이다. 아무리 귀찮아도 애를 그냥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학교나 훈련소에 밀어 넣을 게 아니라면 적정한 시기에 또래 친구를 사귈 수 있게끔 어른이 도와줘야지. 의식주도 중요하지만, 멘탈 케어야말로 아이 교육의 핵심이라고 했다.

    “너희 설마 서로 내외하니?”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설마 이성이라 서로 내외하는 건가? 나는 심란하게 여전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두 10대를 바라보았다.

    내가 10대일 때는 새 친구 사귈 때 적극적으로 말 걸고 공통된 관심사를 찾아보려고 애를 썼던 것 같은데, 요즘 애들은 영 사회성이 부족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두 아이 사이에서 길버트만 어리둥절하게 ‘어린 인간이…… 둘이나?’ 같은 상태로 뿌리를 내리고 서 있을 따름이었다.

    “이런 데서 낭비할 시간 없어. 당장 나랑 캐러벨로 가. 약속했잖아.”

    결국, 침묵을 먼저 깨고 입을 연 것은 에델라이드 쪽이었다.

    아델라이드가 씩씩거리며 내 팔을 붙잡자마자, 이르커스가 다가와 에델라이드의 팔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기차놀이 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붙잡는 우스운 꼴이 완성되었다.

    “뭐야? 놔라.”

    “너부터 놔.”

    “너한텐 볼일 없어. 꺼져.”

    “내 스승이야. 너나 꺼져.”

    “얘들아,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리고 꺼져가 뭐야, 꺼져가. 곱게 말해.”

    이르커스가 에델라이드의 팔을 잡아당기면 에델라이드 역시 내 팔을 거머리처럼 붙잡고 온 힘을 다해 끌어당겼다. 누가 테리즈의 손녀 아니랄까 봐 몸에 걸친 로브에 와락 주름이 졌다. 가만히 놔뒀다간 내 불쌍한 로브가 찢겨 나갈 것 같았다.

    드래곤한테 선물 받은 질긴 직물로 드워프가 주조해 준 로브를 찢어 먹으려 들다니. 역시 에델라이드도 평범한 10대는 아니었다. 훌륭한 먼치킨의 새싹이로군.

    나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말리기 위해 에델라이드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냥 인사 정도만 먼저 나누게 하려고 아틀리에로 데려온 건데, 잘못 판단했다. 테리즈 펄번에 대한 걱정으로 지금 에델라이드는 로베인 제국의 황자고 뭐고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 보였다.

    나는 이르커스를 안아 들었던 것처럼 에델라이드를 안아 들기 위해 두 팔을 뻗었다. 공간 이동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이렇게 몸을 붙이고 있는 쪽이 더 좋았다.

    “잠깐.”

    하지만 내가 에델라이드를 안아 들기 전에 이르커스가 그 사이로 재빠르게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드물게 당황스러워져서 에델라이드와 내 사이의 좁은 틈으로 평균적인 열두 살보다는 건장한 몸을 끼워 넣는 이르커스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왜? 금방 다녀올 거야.”

    “나도 데려가.”

    “요즘 자꾸 고집을 부리네. 캐러벨로 놀러 나가는 거 아냐. 전에 봤던 테리즈가 아프대서 보러 가는 거지.”

    “수식 정확하게 풀면 같이 외출해 주기로 했잖아.”

    에델라이드는 자기도 데려가라며 고집부리는 이르커스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마치 ‘이래서 어린애들이란……’이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자기도 어린애면서.

    이르커스가 한번 고집부리면 꺾기가 쉽지 않다는 걸 이전 외출에서 이미 겪을 만큼 겪었기 때문에, 나는 이르커스에게 풀어 놓은 마법 수식부터 먼저 보여 달라고 했다. 아무리 이놈이 주인공에 천재 속성까지 가진 먼치킨이라지만, 채 몇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서 바로 정답을 찾아냈을 리가 없었다.

    수식을 가져와 보라는 내 말에 이르커스는 양피지를 보여 주는 대신, 에델라이드의 팔을 감싸 잡았다.

    숲 주변을 항상 감돌고 있는 마나가 크게 요동쳤다. 이 주변에 다른 마법사가 있었다면 마법 사용에 대해 바로 인지할 만큼 규모가 큰 마나 운용이었다. 물론 규모에 비해 정교하진 않아서, 되는대로 다 끌어다 쓰는 느낌이긴 하지만.

    아직 이론 수업 단계니, 실전 적용은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진 이르다고 한 소리 할 새도 없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수식이 어려운 마법을 쓸수록 시전 시간이 오래 걸리기 마련인데, 이르커스는 주인공이라 그런지 세계의 일반적인 법칙을 그냥 무시해 버렸다. 주인공 아닌 사람 서러워서 못 살겠다.

    내가 저지하기도 전에 이르커스에게 팔을 잡힌 에델라이드가 내 코앞에서 아틀리에 바깥으로 이동당했다.

    “이르커스!”

    만약 이르커스의 수식 풀이가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면 에델라이드는 공간 틈새에 몸이 끼이거나, 최악의 경우 마법 수식 불량으로 인해 이상한 곳으로 강제 이동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현대 한국에서 이 세계로 떨어져서 못 돌아가는 내 꼴이 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나는 허겁지겁 아틀리에 문을 열어젖혔다. 자신이 왜 아틀리에 안에서 밖으로 강제 이동됐는지 모르는 에델라이드의 어리둥절한 얼굴이 바로 보였지만, 나는 놀란 마음을 바로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르커스가 자기 자신도 아니고 타인을 상대로 단 한 번 만에 공간 이동 마법을 성공시켰다는 사실보다 내 허락도 없이 냅다 마법을 갈겼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초심자 주제에, 대체 무슨 깡이야? 천재들이 대범하다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가 데리고 있는 천재가 말을 안 들으니 감당이 안 됐다.

    “제대로 풀었어.”

    “너…… 방금 그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는 아는 거야?”

    “맞게 풀었다는 거 알고서 한 거야.”

    “조금이라도 잘못됐으면 어쩌려고. 넌 아직 배우는 단계야, 실전은 일러.”

    “유안.”

    이르커스는 내가 자기 어깨를 붙잡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데도 기가 죽거나 풀 죽은 표정을 짓는 대신, 고개를 들어 똑바로 나를 응시했다.

    이르커스의 눈은 자신이 위험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것이라기보다는, 당연히 성공하리라 생각한 능숙한 마법사의 것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변명이나 반성의 여지 없는 낯이었다. 마녀의 후손은 빨리 자라고, 쉽게 늙지 않는다. 열두 살치고 이르커스는 지나치게 성숙했다. 어린애 주제에 가끔은 속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너, 그간 일부러 틀린 답을 적어 놨던 거구나.”

    그제야 지금껏 풀이는 완벽했는데도 매번 답이 틀렸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르커스 로베인은 내 생각보다도 더 천재였다. 인간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람 속이는 걸 못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지지 세력도 없는 황궁에서 열두 살까지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지금까지 이르커스는 그냥 내 가르치는 속도에 맞춰 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짜 놓은 커리큘럼을 망치지 않기 위해, 적당히 잘해 보이는 수준에서 수업을 따라오는 척하고 있던 것이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아직 못 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수식은 맞지만 틀린 답을 적어 넣고, 처음부터 함박눈을 내릴 수 있으면서 진눈깨비나 흩날렸다.

    내가 다시 가르쳐 주길 기다리면서, 이미 다 할 줄 아는 걸 어설프게 흉내 내는 척했던 거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깨우치고 구십 정도를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드래곤을 난생처음 마주했을 때도 이렇게 당황스럽지는 않았는데. 이르커스가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마법사 대 마법사로서는 몸에 전율이 일 만큼 경이로웠다. 살 만큼 살았지만, 이 나이에 이 정도 성과를 보이는 천재는 내 긴 인생에서도 처음이었다.

    예카리나 역시 강한 힘을 타고난 마녀였지만, 이르커스가 가진 천재성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내게 영생이 없었더라면, 나는 금세 이 열두 살짜리에게 대현자라는 칭호를 빼앗겼을 것이다.

    “내 스승이라고 해서 친구까지 만들어 줄 필요는 없어. 당신이 날 걱정해 주는 건 좋지만.”

    “금방 할 줄 알게 됐으면서 내내 못하는 척했던 이유가 뭐야?”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금방 황궁으로 돌아가자고 할 거잖아.”

    “그야 당연하지. 너랑 나랑 한 마법 계약이 그건데. 넌 황제가 되고, 난 네 손에 죽고.”

    “…….”

    “그게 너한테도 좋은 일이야.”

    자기 마법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했던 보라색 눈에 어떤 슬픔이 깃들었다. 나는 이르커스가 내게 보이는 감정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죽는다는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돼?”

    “이르, 네가 아직 곁에 사람을 많이 안 둬 봐서 그래. 넌 지금 너무 어려서 혼란스러운 거야.”

    “당신은 나한테 늘 죽겠다고만 하잖아. 난 또래 친구를 원하는 게 아니야. 그냥, 당신이 계속…….”

    알에서 막 깨어난 아기 오리가 처음으로 본 상대를 부모라고 인식하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이르커스는 자신을 거둬 준 나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었다.

    호의와 동경, 그리고 어느 정도의 애정까지. 어린아이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는 어른들에게 느낄 만한 긍정적인 감정들이 온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원래 애착 관계가 형성된 보호자와 피보호자 사이는 애틋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의 미성숙한 피보호자는 얼떨결에 맺은 계약 내용을 정 때문에 잊어버리려고 한다.

    “아니, 넌 친구가 필요해.”

    그래서는 안 된다.

    나도 말 잘 듣고, 마법도 잘 배우는 똑똑한 내 제자가 싫지 않았다. 인정한다. 절대로 정 안 주겠다고 했는데, 사실 좀 줬다.

    하지만 이르커스가 좋은 것보다 죽고 싶은 열망이 더 컸다. 이르커스한테 마음 약해져서 곁에 머물러 주겠다고 약조하는 건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그러다가 이르커스가 살해당하거나, 운명의 장난으로 급사라도 해 버리면 나는 또 이 거친 세상에 혼자 남아 죽지도 못하고 긴 세월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건 안 된다. 아이 교육에 안 좋더라도 나는 꾸준하게 이르커스한테 나를 죽여야 한다고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좋은 어른이 아니고, 넌 날 이렇게 애틋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거리를 두는 게 이 관계에서 내가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친절이었다.

    처음 본 악어가 제 어미인 줄 알고 쫓아가는 오리는 아무리 황금 오리라고 할지라도 한입에 잡아먹히기 마련이다. 나는 참담한 심정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꽉 다물었다.

    내 예상보다 정 붙이지 않는 게 너무 어려웠다. 이르커스는 짐작했던 것보다 더 영악했고,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물러 터졌고.

    “넌 황제가 되는 순간, 날 죽여야 해. 그럼 난 네 곁에 없을 거고.”

    “…….”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혼자서는 황제라는 자리를 지키기가 어려울 거다. 살아가면서 도움 받기 위해서는 일찍이 많은 사람을 알아 두는 게 좋아. 난 지금 널 도와주려는 거야.”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래. 네가 원하지 않아도 우리 계약은 유효하니까.”

    일부러 상처 주고, 거리 두기 위해 뱉은 말에도 이르커스는 전처럼 인상을 찡그리기는커녕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는 대답이 덤으로 따라왔다. 오히려 내 기분만 더 이상해졌다.

    “당신은 다정하게 굴다가도 날 상처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말해.”

    “그래, 네 표현을 빌리자면 신처럼 말하는 거지.”

    “종교가 되어 주지도 않을 거면서.”

    틈을 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르커스는 나와 에델라이드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을 때처럼 내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불쑥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예카리나의 후손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세계의 주인공이라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이르커스가 그런 사람이라 그런 건지 쉽게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내가 어려서 당신을 따르는 거라고 생각하지?”

    “넌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맞아.”

    “그럼 그냥 그렇게 생각해.”

    “이르.”

    “그냥 계속 어린애라고 생각해. 아직 황제가 되지 못했잖아. 당신이 계속 돌봐 줘야 할 어린애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

    “넌 금방 자랄 거야.”

    이르커스는 마녀가 될 수 없다. 사내아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르커스가 뱉은 저 말들은 꼭 마녀들의 축복이나 저주처럼 느껴졌다. 마법 계약 같은 번거로운 수식과 절차 없이도 실행되어 영원히 내 곁을 맴돌 것 같은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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