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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15화 (15/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15화

처음엔 테리즈가 회춘이라도 한 줄 알았다. 나는 나무 정령들에게 붙들려 꼼짝 못 하고 있는 10대 중반의 여자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테리즈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빼다 박은 파란 눈이 인상적이었다. 자줏빛이 도는 붉은 머리도 그랬고. 지나치게 테리즈와 닮아 있어서 누구냐고 묻지 않아도 쉽게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테리즈가 남쪽 숲에 가지 말라고 하지 않던?”

“이 빌어먹을 대현자 새끼. 내가 기필코 너 죽여 버릴 거야.”

“어어, 그래. 죽여 주면 나야 고마운데…….”

불같은 성미까지 똑같군.

이 정도면 테리즈가 출아법으로 이 여자애를 낳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나이대를 보니 딸은 아니고 손녀 같은데, 내게 냅다 반말을 갈기는 것까지 아주 판박이였다.

“하지만 넌 날 못 죽여. 마녀의 후손도 아니고, 황제도 못 됐잖아.”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날 죽이려면 혈통과 지위를 모두 타고나야 한다는 뜻이다. 정보 길드 수장의 손녀로는 어림도 없어. 세상은 원래 각박하거든.”

“역시 죽어. 그냥 죽어 버려.”

남한테 죽으라는 소리를 들으니 아주 기분이 좋았다. 나도 진짜 죽고 싶은데, 정말 듣고 싶은 소리만 해 주는구나. 악의 가득한 ‘죽어’ 소리가 내 마음에 깊은 평화를 가져다줬다.

매번 만수무강 불로장생해서 마법 발전에 기여해 달라고 염불 외우는 마탑 놈들이나, 말로만 두고 보자고 하지 정면 승부는 안 하려고 드는 황궁 놈들보다 이렇게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분노가 대하기 편했다. 이런 애들 손에 죽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이름이 뭐니? 테리즈의 손녀야.”

“네게 알려 줄 이름은 없어.”

“테리즈의 손녀라고 꼬박꼬박 부르긴 너무 기니까, 그럼 그냥 아무개라고 부를게.”

“친한 척하지 마. 소름 끼치니까.”

“펄번이라고 부를까, 그럼?”

나무 정령들에게 양팔과 다리를 결박당한 채로 몸을 비틀던 아이가 내 말에 이를 까득거렸다.

젊다고 저렇게 이를 갈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 고생할 텐데. 나처럼 뼈와 안구가 영구 사용 가능인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은 참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룬다.

“……에델라이드.”

“좋은 이름이네.”

“꺼져.”

“그렇지만 너무 길다. 여기 애들 이름은 언제 들어도 너무 길다니까. 다들 두 글자나 세 글자로 통일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그냥 에델이라고 부를게.”

“애칭으로 부르지 마. 난 당신을 기필코 죽일…….”

“에델라이드는 너무 길다니까. 아무튼 에델, 여긴 왜 들어왔니? 너도 혹시 목숨이 막 아홉 개야?”

테리즈가 아무리 나를 싫어해도 자기 손녀한테 날 죽이라고 사주할 인간은 아니었다.

유감스럽지만 에델라이드 펄번은 날 죽일 만큼 강하지도 않았다. 기백은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가 마법 안 쓰고 체술로만 붙어도 에델라이드 정도는 몇 분 안에 제압할 수 있었다.

애초에 내가 불로불사라는 걸 알고 있는 테리즈가 날 죽이라고 시켰을 리도 없다. 내게 영생 저주가 없었다면, 이미 테리즈 손에 세 번 정도 죽었을 것이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테리즈는 내게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대현자가 인간을 싫어하는 나무 정령들이랑 오순도순 사는 남쪽 숲으로 제 손녀를 보낼 리가 없었다. 엄격하긴 하지만, 자기 선 안의 사람을 끔찍이도 아끼는 인간이니까.

그러니 테리즈라면 아마 자기 가족들에겐 남쪽 숲으로 절대 가지 말라고 했을 터였다. 자기는 제 발로 실컷 찾아왔더라도 말이다.

나는 에델라이드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이르커스한테도 또래 친구가 필요하려나? 이르커스보다 몇 살 많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길버트와 나에 비하면 에델라이드는 이르커스와 연배가 대충 비슷해 보였다.

뭐, 같은 10대면 거기서 거기 아닐까? 몇 살 정도야 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가 되면 별로 큰 것도 아니었다.

이르커스는 황제가 되면 그 시절 판타지 소설 주인공답게 자기만의 하렘을 차리게 될 테지만, 지금은 주변에 인격 형성에 악영향만 끼치는 늙은이들뿐이었다. 어디 교육 프로그램에서 어릴 때 또래 친구와 어울리면서 사회성을 길러야 좋은 어른으로 자란다고 그랬다. 언제 본 교육 프로그램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나는 잠시 에델라이드를 내 아틀리에로 데려갈까 고민했다. 에델라이드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거니만큼 이건 납치가 아니라, 일종의 초대였다. 한국에서도 서로 친한 애들끼리 방과 후에 집에 막 초대하고 그러잖아.

“너 때문에 우리 할머니가…….”

속으로 이르커스에게 또래 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한 두근두근 프렌드십 프로젝트를 세우고 있었는데, 분노에 찬 에델라이드의 목소리가 내 장대한 계획을 시작도 전에 박살 냈다.

“우리 할머니가…… 위독하단 말이야.”

“아, 순간 정말 죽은 걸까 봐 놀랐네.”

“빌어먹을 대현자 새끼. 할머니의 원수를 기필코 갚아 주겠어.”

“원수 갚는 거 나도 좋은데, 다음부턴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줘. 내가 아무리 불로불사여도 가슴은 새가슴이거든.”

친구고 뭐고, 내가 할머니의 원수가 된 이상 이건 조금 틀렸군. 원수의 피보호자와 친구가 되긴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나는 침착하게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걷어 냈다. 내 검은 머리와 검은 눈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나이에 비해 너무 동안이어서인지 내 얼굴을 마주한 에델라이드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왜?”

“검은 머리…….”

“어어, 나 흑발이야.”

놀라는 이유가 후자이길 바랐는데, 역시 전자였냐.

이르커스가 내 검은 머리나 검은 눈에 일체 반응이 없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 세계 인간들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만 보면 이렇게 매번 놀란다니까. 리액션이 매번 정해져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로브를 뒤집어썼다. 어휴, 꾸준한 사람 새끼들 진짜.

테리즈가 워낙 괴력의 소유자인 데다 나이에 비해 너무 정정해 보여서 일순 테리즈의 나이를 간과한 게 문제였다. 이거 참. 아무리 그래도 역시 전기로 사람 지지는 건 한동안 자제해야겠다. 조절이 안 돼서 이런 문제를 만드니까.

나는 다시 벌떡 고개를 치켜든 죄책감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테리즈가 먼저 잘못했다고 아무리 자기 합리화를 해 보려고 해도, 사실 내가 잘못한 게 맞았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는 이르커스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착한 애를 제자로 거둬서 나도 옮아가나? 반쯤 잃어 가던 인간성이 ‘어어, 주인님…… 저 돌아올 거 같아요’ 하고 원하지 않는 때에 불쑥 출현했다. 한 5년 전이었으면 ‘어쩌라고’로 일관했을 텐데.

‘아니 근데’와 ‘걔가 먼저’로 극복할 수 있는 죄책감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르커스한테는 인간적으로 살지 말라고 비정하게 말해 놓고서 내 말을 내가 번복하고 있는 꼴이 쪽팔렸다. 이르커스를 안 데리고 나오길 잘했다.

“원수 갚는 것도 좋지만, 이건 어때? 무료 치료 서비스.”

“무슨 수작이야?”

“수작이라니. 무심코 전기로 지진 것에 대한 나의…… 뒤늦은 사과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어.”

“무심코…….”

“아, 이게 말이지. 내가 좀 열 받으면 가끔 조절이 안 돼.”

너무 오랜 세월 마법사로 살아와서 직업병이 생겼다고 하면 믿어 줄까?

나는 엄청나게 의심스러워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에델라이드를 향해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애들 상대는 10대 초반이나 후반이나 장난 아니게 힘들었다.

“네가? 우리 할머니가 대현자는 염치라는 게 없는 개새끼라고…….”

“테리즈 걔는 예나 지금이나 날 너무 싫어한다니까. 맨날 내 욕만 하고.”

“당신,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어? 상한 팔다리를 고친다거나.”

“죽은 사람만 아니면 아마 그럴걸? 나, 대현자잖아. 치료 마법도 잘해. 수재거든.”

“진짜 재수 없네.”

“그런 말도 많이 들어.”

나는 여전히 에델라이드를 결박하고 있는 나무 정령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인간을 놔달라는 내 부탁이 마음에 안 드는 듯 나무 정령들은 제 뿌리들을 쭈뼛거리다가 슬그머니 에델라이드를 놓아주었다. 요즘 들어 애 키운다고 어린애들한테 내가 너무 관대해지긴 했다.

“그런데 테리즈 걔도 잘못하긴 했어. 내가 돌보는 애 위치를 바로 고발해 버렸잖아.”

“할머니는 안 그랬어.”

“안 그러긴. 기사단 돌려보내느라 내가 얼마나 귀찮았는데.”

“…….”

“그러니까, 이번 일은 내가 테리즈를 치료해 주고 없던 일로 하자. 주기적으로 내가 테리즈 건강도 봐줄게. 대현자를 주치의로 삼기가 어디 쉽니? 완전 파격 조건이잖아.”

“당신, 속셈이 뭐야?”

“요즘 애들은 너무 의심이 많다니까. 사람이 친절을 베풀어도…….”

“속셈이나 빨리 말해.”

“알겠어.”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아도 에델라이드는 씩씩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열다섯 살에서 열일곱 살 사이인 것 같았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얼굴 위로 의심과 경계가 가득했다. 이르커스나 얘나 보험 사기는 안 당할 것 같다는 점에서 서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친구 하나만 만들어라.”

“……뭐?”

“미래의 로베인 제국 황제랑 내가 연줄 놔주는 거야.”

에델라이드는 엄청나게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을 잃고 나를 쳐다봤다. 에델라이드를 결박하고 있었던 나무 정령 역시 표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돋아난 이파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다들 참 뭘 모른다. 큰 사람이 되려면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 법이다. 이르커스는 마법 능력은 뛰어나지만, 아군이 너무 없었다. 또래 친구는 더 없을 게 분명했다.

서로 국적이 다르긴 해도, 어린 시절부터 미리미리 인맥 좀 쌓고 부릴 수 있는 사람을 심어 두는 게 중요하다. 나중에 황제가 됐는데 주변에 믿을 만한 수족이 없어 봐라. 예카리나 잃고 바로 혁명당하던 다윈 꼴이 날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홈스쿨링은 사회성 발달에 한계가 있어. 그리고, 조기 교육은 역시 인맥 쌓는 것부터가 시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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