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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14화 (14/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14화

“마법사 셋이서 결계 하나 못 푸는 걸 보니까 어중이떠중이들 같은데, 지금 안 꺼지면 너희 여기서 다 죽는다?”

내 평이한 협박에 제일 어려 보이는 마법사 하나가 바쁘게 놀리던 손을 멈췄다.

풀던 수식도 내팽개치고 나를 향해 바로 고개를 돌리는 걸 보니, 그래도 마법사들은 저 기사 놈들보다 나에 대해 아는 게 많은 것 같았다. 살짝 상해 버린 자존심이 아주 조금 회복됐다.

나는 겁만 줄 요량으로 결계 밖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적당히 뭐 하나 터트려서 위협해야지. 사람을 직접 칠 순 없으니까, 사람이 든 걸 쳐야겠다.

“저희는 숲을 침범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곳에 3황자님이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모시러 왔을 뿐입니다.”

“모셔? 죽이려고 데리러 온 거겠지. 관으로 모시는 것도 모시는 거니? 요즘 애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이르커스가 이런 머저리들한테 당할 것 같진 않지만, 황궁으로 들어가면 아마 쪽도 못 쓸 게 분명했다. 쪽수 싸움에 장사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황궁에서 남쪽 숲까지 도망쳐 나온 걸 보면, 아직은 황위 찬탈의 때가 아니었다.

이르커스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 봤자 지금은 고작 열두 살에 불과하고, 판타지 소설 주인공 클리셰답게 제대로 능력을 얻기 전까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서사가 있어야 결말이 나온다. 그 과정에서 몇 년이 소요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길게 봐서 20년 정도는 기꺼이 이르커스에게 투자할 생각이 있었다. 죽을 수만 있다면 20년이 뭐야, 200년도 때려 박아야지.

이르커스의 평온한 미래 정치 생활을 고려하려면 세력을 구축해 두기는 해야 한다. 세력 구축엔 당연히 남쪽 숲보다 황궁이 나으니, 언젠가 황궁으로 돌아가긴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언제’가 지금은 아니었다. 공격 마법 외의 다른 특수 마법들까지 제대로 가르치려면 넉넉잡아 5년은 더 필요했다. 이르커스가 아무리 미친 천재여도 고등학교 수학 한 번 배우지 않고 대학 수학을 풀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아직 실전용 마법 수업은 시작도 안 한 애를 홀라당 데리러 가려고 해? 영재 학교도 6년은 시간을 주는데 아주 양아치 같은 놈들이다. 아이에게 공부할 시간을 충분히 달라고.

나는 중년 기사 단장 뒤에 서 있던 일반 기사가 쥐고 있는 검을 향해 폭발 마법을 걸었다. 겁만 줄 생각이었으므로, 대단한 폭발 마법은 아니고 검과 그 검을 쥐고 있는 기사의 손만 넝마가 될 예정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싹 이곳에서 전멸시켜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귀찮게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으러 올 테니 조절을 잘해야 했다.

무엇보다 숲과 나무 정령들 역시 불에 취약하기 때문에 강도 조절을 잘못했다간 데인과 길버트가 자기 동족을 태웠다며 길길이 날뛸 터였다. 인간이 잘못했는데 나무를 태울 수는 없지.

펑 소리를 내며 터진 검과 함께 비명이 도미노처럼 퍼져나갔다. 내가 터트렸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완벽한 마법 컨트롤이었다. 이 정도는 해야 대현자가 될 수 있는 거다.

나는 속으로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으며 그 옆의 기사가 든 검에도 폭발 마법을 걸었다. 그 옆의 놈이랑 그 앞의 놈한테도. 원래 폭죽은 멈추지 않고 터져야 장관인 법이다.

연달아 터지는 소리에 마법사들이 결계 해제를 멈추고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놈들도 결국엔 황궁에 고용된 입장일 뿐이니, 제 목숨이 더 중요할 것이다. 사장님 위해 뼈 빠지게 일하다 죽고 싶은 노동자는 없을 테니까.

“다음엔 검이 아니라 너희 머리통을 터트려 버릴 거니까 조심해라.”

“황명을 어긴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당신이 아무리 대륙 유일의 대현자라도 이 건에 대해서는 책임을…….”

“어어, 그래. 치러. 계속 치러, 두 번 치러.”

기사 단장이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내게 퇴장하는 악당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카만 왕족들한테 그랬던 것처럼 저놈의 숱 많은 머리털 위로 불이라도 질러 줄까 싶었지만, 불에 취약한 숲과 나무 정령들을 생각해서 어른스럽게 참았다.

나는 삐딱하게 서서 도망칠 채비를 하는 놈들한테 가운뎃손가락까지 친절하게 올려 주었다.

“야, 가는 김에 너희 상사한테 이 말도 좀 전해 줘라. 지금 황제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꾸 나대면 다른 놈으로 바로 바꿔 버린다고.”

얼굴도 모르는 이르커스의 아버지를 향해 친절히 경고 메시지도 한 번 남겨 줬다.

황궁 마법사를 때려치운 뒤로는 제국의 황궁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 어떤 놈이 황제 노릇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잘 안 갔다. 하지만 자녀들의 황위 싸움 한번 제대로 규제 못 하고 있는 걸로 봐서 성군은 아닐 게 분명했다.

내가 남긴 경고 메시지를 빛의 속도로 퇴각하는 황궁 군대가 잘 받아 적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좀 잠잠해지겠지. 정신 못 차리고 또 남쪽 숲에 누가 기웃거리면 이번에야말로 짜릿한 전기 맛을 보게 해 줄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보호자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살뜰하게 돌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은근히 적성에 잘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적이 많은 피보호자를 뒀다면, 그 피보호자가 각성하기 전에 내가 다 물리쳐 주면 되는 거잖아. 진정한 의미의 ‘보호’자다.

나는 점점 육아와 교육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래! 육아와 교육은 일단 보호자가 피보호자보다 강하면 절반은 해낸 거다.

????????????

[또 침입자야, 유안. 데인이 너 죽여 버린대.]

“이야, 이득이네. 데인 보고 나 좀 빨리 죽여 달라고 전해 줘.”

[직접 가서 전해.]

“싫어. 걔 잔소리 너무 심하단 말이야.”

요즘 남쪽 숲은 아주 만남의 광장이다. 황궁 군대를 겁줘서 돌려보낸 뒤부터 온갖 놈들이 다시 남쪽 숲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오픈 시간 전부터 길게 줄 서는 유명 맛집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찾아오는 손님 중 열에 아홉은 마탑 놈들이라, 가게였으면 진작 폐업했을 것이다.

마탑 소속 마법사들은 내가 3황자를 제자로 거뒀다는 소식에 삼삼오오 모여 남쪽 숲으로 관광을 나왔다. 평소라면 연구한다고 탑에서 잘 나오지도 않는 놈들이 슬그머니 남쪽 숲 주변을 맴돌며 제자 몇 명 더 받으실 생각 없냐고 귀찮게 껄떡거렸다.

애 하나 키우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여기서 제자를 더 들일 리가 없다. 제자가 나보다 빨리 늙고 쉽게 죽을 텐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귀찮은 일을 더 늘리겠는가?

그 탓에 나는 자길 제자로 받아 달라고 찡찡대는 마탑놈들을 숲 밖으로 내쫓느라 한가하게 뒹굴거리지도 못했다.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이렇게 얼굴을 들이미니까 황궁에서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주기적으로 감시자들을 보냈다. 내가 정말 마법사들 몇 명 데리고 황제를 갈아치울까 봐 겁을 먹긴 먹은 모양이었다. 진짜 갈아치울 거였으면 벌써 혼자 치러 갔을 텐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들이다.

저번에 남긴 경고가 덕인지 직접 찾아와 3황자 내놓으라고 떼쓰는 놈들은 없었지만, 마탑 놈들이 나무 정령들의 사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숲 주변을 빙빙 돌고 있어서 데인의 히스테리가 날로 심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이상하네.]

“왜. 침입자가 이종족이야? 드래곤? 드워프? 엘프? 아니면 정령?”

[아니, 인간이긴 한데 혼자여서. 심지어 또 어린애인데.]

“미쳐 버리겠네. 여기가 무슨 감자탕집 놀이방도 아니고.”

[감자탕집 놀이방이 뭐야?]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놀이방보다 200배는 위험한데 왜 다들 겁도 없이 벌컥벌컥 들어오지? 놀기 좋은 동네라고 소문났나.”

[그럴 리가. 마탑 마법사들이 결계를 해제한 틈에 몰래 숨어 들어온 것 같은데……. 침입자 본인은 마법사도 아니거든.]

“역시 마탑 놈들이 문제라니까.”

내가 다시 로브를 뒤집어쓰자, 옆에서 길버트와 나의 대화를 들으며 열심히 마법 수식 풀이를 하고 있던 이르커스가 쓱 고개를 들었다.

저번에 자기가 잠든 사이에 황궁에서 군대가 왔다는 걸 알고 난 뒤로는 한동안 내 눈치를 보면서 얌전하게 지내더니, 자기랑 비슷하게 어린애가 들어왔다는 소식에는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 안 데려갈 거니까, 도로 수식 풀어.”

“다 풀었는데.”

“거짓말 마. 공간 이동은 기상 조절보다 어렵다고.”

“진짜야.”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람.

공간이나 시간 관련 마법은 물리학이 엮인 경우가 많아서, 400년 동안 주야장천 수학 문제만 풀어 왔던 나조차도 종종 헷갈리는 수식이 대다수였다.

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수식이 적힌 양피지를 내미는 이르커스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진눈깨비 다음엔 곧바로 함박눈을 만들더니, 이제는 바로 공간 이동을 한다고?

아무리 주인공이어도 그건 너무 사기였다. 나는 이르커스가 꼼꼼하게 푼 수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훑었다. 군더더기 없는 풀이 과정이었지만, 다행히 내린 결론이 완벽한 정답은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아직 열두 살이어서 가르칠 게 남아 있어. 커리큘럼 알차게 짜 놨는데 제대로 진행도 못 해 보고 버릴 뻔했다.

“틀렸으니까 다시 해.”

“풀이는 맞잖아.”

“답이 틀렸어. 넌 모르겠지만 공부는 말이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한 거야.”

“…….”

“불만스러운 표정 금지. 답 나올 때까지 다시 풀어. 못 풀면 기상 조절 과제 한 번 더 하는 거다.”

“……너무해.”

나는 금세 토라져 내밀었던 양피지를 쓱 거두곤 그 위로 고개를 처박은 이르커스의 정수리를 흘긋 바라보았다. 탐스러운 밝은 금발이 숙인 고개를 따라 쏟아져 내렸다.

“답 맞추면 다음에 한 번 더 같이 외출해 줄게.”

삐쳐서 입술을 삐죽거리는 꼴조차 어디 한 폭의 명화 같으니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다시 고개를 번쩍 드는 어린애를 바라보았다. 정 주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똑똑하고 귀여운 어린애한테 마음 쓰지 않기란 참 어려웠다. 저놈이 사춘기가 와야 온갖 정이 다 떨어져서 내가 정신을 좀 차리지 않을까.

그러니 나이 좀 빨리 먹어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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