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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12화 (12/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12화

    인간적인 정을 주고 슬퍼한 적은 많았어도, 예카리나가 다윈에게 헌신했던 것처럼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만한 감정은 느껴 본 적 없었다.

    평범한 인간과 수명이 아예 다르니, 연애적 감정을 가지기도 어려웠다. 나에게 주어진 찰나가 누군가에게는 영원이니까.

    덕분에 한동안은 울 일만 참 많았다.

    판타지 소설 잘못 읽고 수능 당일 트럭에 치이기 전까지는 나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충분한 세월이 흐르기 전까지, 나는 이 세상에 떨어져 처음 받은 노예라는 신분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이질적인 외형 탓에 편협한 인간들에게 시달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주변에 못되게 구는 놈들이 많았던 탓에, 내게 모질게 대하지 않는 다정한 인간들에게 호의를 가지는 경우도 덩달아 많아졌다.

    예카리나의 죽음이 슬펐던 것처럼 내게 친절했던 이들의 배신이나 변질 역시 괴로웠다. 무뎌지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쉽지는 않았다. 400살이 넘은 지금도 종종 지난 과거의 인연들을 생각하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대한민국에 두고 온 수많은 관계를 떠올릴 때도 그랬다. 난 그곳에서 이미 죽은 사람이 됐겠지만, 여전히 이곳에 살아 있었다.

    이제는 흐릿해진 동급생들의 얼굴이나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부모와 형제의 목소리…….

    뭔가를 계속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면서 영생을 산다는 건 미치기 딱 좋았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마모시키거나 추억을 기억의 기저에 묻어 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내가 어린애한테 잔인했다고 생각해?”

    [글쎄.]

    이르커스는 카만으로 외출하고 돌아온 날 이후로 티 나게 나를 피해 다녔다.

    배은망덕한 새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애한테 먼저 모질게 군 건 나였으므로 잠시나마 혼자 반성의 시간을 가져 보기로 했다.

    [하지만 너도 별수 없었겠지. 넌 남쪽 숲으로 왔을 때 이미 잔뜩 지쳐 있었잖아.]

    길버트가 내 어깨를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두드렸다. 아니, 손 같은 나뭇가지인가? 아무튼 딱딱한 나뭇가지가 내 어깨에 닿았다 떨어졌다. 나무 정령치곤 참 인간 같은 위로였다.

    저 말대로 나는 남쪽 숲에 처음 왔을 때, 살짝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굴 사랑한 적은 없지만, 정을 준 적은 많아서 너무 지쳐 있었다. 수많은 장례식에 참석할수록 점차 비통함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남들은 엉엉 울고 있는데 나는 남의 죽음을 질투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내 또래로 보였던 인간이 정신을 차리고 나면 잔뜩 늙어 있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고, 영영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것에 놀라지 않게 됐다. 올곧던 이들이 망가지는 것도 수없이 보았다. 엉망으로 살던 자들이 갱생하여 위인이 되기도 했다. 인간의 삶은 찰나여서 가변적이었다.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세상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나를 지나쳐 갔다. 영생이 왜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 날들이었다.

    나는 인간 사회에서 사람 구실 하며 사는 것을 포기하고 남쪽 숲으로 도망쳤다. 순식간에 자라고 죽어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쉽게 변하지 않는 나무 정령들과 함께 살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르커스한테 사과하고 싶어?]

    “아니. 사과한다면 그 배은망덕한 놈이 내게 하는 게 맞겠지.”

    [좀 솔직해져 봐, 유안.]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마법을 써서 길버트의 무성한 초록 이파리들을 바람으로 거세게 흔들어 놓았다. 내 마법에 속절없이 당한 길버트가 가지를 잔뜩 흔들며 화를 냈지만, 그냥 모른 척했다.

    사과? 그걸 왜 내가 먼저 해야 하지? 모질 게 말한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내가 그럴 수밖에 없게 행동한 건 이르커스였다.

    [나잇값 좀 해.]

    “싫어. 젊게 살 거야.”

    [세상 사람들은 그걸 노망났다고 해.]

    “나무 정령 주제에 인간처럼 말하지 마.”

    길버트랑 한창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이르커스가 자기 방문을 열고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저 자식, 자는 줄 알았더니 방에 숨어서 나랑 길버트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타이밍에 방에서 나올 리 있나.

    “유안.”

    “뭐야. 너 늦게까지 안 자면 키 안 큰다.”

    “당신이 나한테 아무리 모질게 말해도, 난 상처 안 받아.”

    맹랑한 자식……. 나는 나잇값 못 하는 대현자답게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내 피보호자와 눈을 맞췄다.

    싸가지 없는 태도긴 하지만, 동시에 기특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황제가 될 재목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어디 가서 기죽고 살진 않겠어.

    “당신은 나한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니까.”

    “내가?”

    “그래. 당신이 날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아껴 주고 있다는 것도. 당신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진짜 아닌데?

    나는 이르커스를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저놈은 주인공이니, 내가 별로 신경 안 써도 웬만하면 안 죽을 테니까.

    예카리나의 후손이고, 언젠가 황제가 될 놈이라 날 죽여 줄지도 몰라서 다른 놈들보다 좀 챙겨 주는 건 맞지만, 그건 다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거다.

    “황자라서 그런지 자아가 비대하구나.”

    “기껏 좋은 얘기해 주려고 해도 꼭 초를 치지.”

    “초 치기는 대현자의 덕목이란다. 가서 잠이나 자. 허튼 생각하지 말고.”

    이르커스가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귀엽기는 했지만 그걸 내색할 생각은 없었다.

    원래라면 혼자서 남쪽 숲을 탈출했어야 할 주인공 놈을 내가 일방적으로 데리고 있는 거니, 이르커스의 자라나는 독립심에 악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척척 스스로 어린이가 되게 키워야지.

    하지만 이르커스가 열두 살이 되도록 손 내밀어 준 사람 하나 없다는 건 의외였다. 그래도 명색에 3황자인데.

    현재 황태자가 그 정도로 입지가 확실한 편인가? <이르커스의 서> 1권에서 이르커스의 위치가 불안정하다는 서술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구체적으로 얼마나 상황이 나쁜지에 대해서는 읽은 기억이 없었다. 적혀 있었는데 내가 까먹은 거거나, 아니면 책에 담기에는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라서 생략된 걸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1권 이후에 나온 거겠지.

    “이르.”

    “응.”

    “황제가 되고 나면 모두가 네게 손을 내밀 거야. 그때가 되면 넌 내가 필요 없어질 거고. 인간은 대개 그렇거든.”

    의식하지 않으면 강약약강을 탑재하고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토록 애타게 부와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내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이르커스의 미간이 또 형편없이 구겨졌다. 어렸을 때부터 저렇게 인상을 쓰면 커서 미간에 주름질 텐데.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으려다가, 괜히 친밀한 행동은 자주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내딛던 걸음을 도로 거뒀다.

    “왜 항상 그렇게 거리를 두려고 해?”

    걸음을 물린 나와 다르게, 이르커스는 어렵지 않게 내게 두 걸음이나 성큼 다가왔다.

    내가 이르커스에게 보인 호의도 결국 목적이 있는 호의였다. 사람과 거리를 두는 건 별수 없는 일이다. 잘못 안았다가 다칠까 봐 작은 동물들을 무서워하듯이, 나도 종종 인간이 무서웠다. 정확히는 인간을 상처 입히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나 자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무서워서 그렇다는 말은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대현자 체면이 있지, 어떻게 제자로 들인 열두 살짜리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이르커스가 날 사회성 떨어지는 늙은이로 여기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이르커스는 언젠가 날 죽여야 하고, 이르커스가 해내지 못한다면 나는 다른 예카리나의 후손들을 방치했듯이 이르커스를 버릴 거니까.

    가슴 언저리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나는 이 기분이 뭔지 알고 있었다.

    이건…… 죄책감이다.

    나는 지금 이르커스 로베인에게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

    아주 오랜만에 잠을 설쳤다.

    이대로 잠들면 높은 확률로 예카리나의 꿈을 꾸게 될 것 같았다.

    오래전인데도 예카리나의 얼굴만큼은 종종 선명하게 떠올랐다. 보기 드문 미인이어서 그런 걸까? 잘 뜯어보면 섬세한 이목구비가 이르커스랑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예카리나와 이르커스는 머리 색도 눈 색도 달랐지만, 그래도 한 핏줄이라고 웃을 때나 찡그릴 때 언뜻 비슷한 분위기가 풍겼다.

    예카리나가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오면, 꿈속의 나는 마치 훈계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예카리나는 내게 처음 대륙 공용어를 알려 줄 때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나긋하게 속삭였다.

    익숙한 저주였다. 예카리나가 죽기 전에 닳고 닳은 목소리로 속삭였던, 나를 지옥 속에 살게 만든 영생 저주.

    ‘난 죽지만, 너는 영원히 죽지 않을 거야.’

    ‘…….’

    ‘널 죽여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400년을 살면서 깨닫게 된 사실인데, 불우한 이들은 대체로 영생을 꿈꾸지 않는다.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나, 아니면 영생을 살아도 다 써 버릴 수 없을 만큼의 부귀를 가진 자들만 불로불사를 꿈꾼다.

    불멸을 꿈꾸는 자들은 대개 미쳐 버린 자들이다. 타인과 다른 시간 선을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순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잃게 될 것이라는 계산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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