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11화
“설마 죽인 거야?”
“이 정도론 안 죽어. 테리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한동안 아프긴 하겠지만.”
“…….”
“널 팔아넘기겠다는 사람인데도 걱정돼?”
보통 성장형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들은 선하다.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내야 하기 때문에, 악인인 경우가 거의 없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웬만하면 정말 변명의 여지없이 나쁜 새끼는 주인공으로 안 삼지 않던가.
그래서인지 ‘주인공’인 이르커스는 지나치게 인간적이었다. 상냥함은 미덕이지만, 자기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도처에 도사린 판에 착해 봐야 목숨 부지만 어려워질 뿐이다. 저렇게 물러 터졌으니 피도 눈물도 없는 황궁 암투에서 밀려, 남쪽 숲까지 기어들어 왔지.
내가 겪어 본 황궁은 꽤 오래전이긴 해도, 여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남기엔 지나치게 혹독한 곳이었다. 예카리나의 애완 인간이었을 때나 황궁 마법사로 일했을 때나 음습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로 가득한 공간이었으니까.
내뱉는 말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고, 적당한 아부와 체면치레가 살아남기 위한 필수 덕목이었다. 황제파와 귀족파로 나뉘어 정치 저울질에 이골이 난 인간들은 권력의 파편이라도 잡아 보기 위해서 끊임없이 추잡해졌다.
강력한 마녀 예카리나가 죽고 나서 그 금발의 또라이 황제가 곧장 황위를 찬탈당했던 걸 생각해 보면, 황궁은 좋게 말해서 칼 없는 전쟁터였고 나쁘게 말하면 눈먼 짐승들의 정글이었다.
그러니까 예카리나의 딸들이 황제 안 할 거라고 그렇게 빽빽 우겼던 거겠지.
국제 정세에 골머리 썩다가 병들어 사는 게 마녀 입장에서 좋을 리가 없다. 나도 누가 황제 하라고 하면 기겁하면서 도망칠 거니까. 왜 그런 귀찮은 직함을 떠맡아야 해? 절대 싫어.
“넌 인간성을 좀 버릴 필요가 있어.”
내 말에 이르커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내가 주워 온 황자님은 공감 능력도 꽤 뛰어난 것 같다. 장차 훌륭한 황제가 될 생각이라면 이렇게 인간성이 있는 편이 낫기는 했다.
또라이 황제처럼 사람을 도구로 쓰려고 들거나, 카만 왕족들처럼 침략당하는 와중에도 자기 걱정만 하면 성군이 될 수는 없을 터였다. 기껏 내 제자로 받아 줬으니 이왕이면 역사에 남을 성군이 되는 쪽이 좋았다. 그래야 나도 좀 위신이 살잖아.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 신처럼 말을 해.”
이동 마법을 쓰느라 이르커스를 안아 들고 있었던 탓에 내게로 뻗어 오는 작은 손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이르커스는 나보다 체온이 높았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마음이 따뜻한 인간이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손을 잡았을 때나 이렇게 안고 있을 때면 괜히 닿는 부분이 따끈따끈했다.
이르커스가 내게 달라붙은 덕에, 나는 이르커스를 내려놓을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 버렸다.
우리의 대화를 정말 평범한 나무라도 된 것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는 길버트를 향해 날 좀 구해 달라고 수신호를 보냈지만, 길버트는 내가 보내는 신호를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아틀리에 바닥에 뿌리만 내리고 서 있었다.
하…… 진짜 도움 안 되는 떡갈나무 같으니.
나는 이르커스를 바닥에 내려놓는 대신, 손에 잔뜩 들고 있던 쇼핑 품목만 우수수 떨어트렸다.
평소라면 자기가 무거울 거라고 생각해서 훌쩍 품에서 뛰어내리고도 남았을 의젓한 황자님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내게 안겨 있었다. 심지어 내 눈 위에 손을 올린 채로.
“당신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슨 말이야?”
“그렇게 남을 아무렇지 않게 상처 입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요구 사항이었다.
나는 내 눈을 덮은 작은 손을 잡아 내리기 위해 더듬더듬 손을 올렸다. 남을 아무렇지 않게 상처 입히지 말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열두 살짜리한테 들을 훈계는 아니었다.
“넌 아직 세상을 잘 몰라.”
테리즈는 그렇게 번개를 맞았어도 이르커스의 행방을 로베인 제국 쪽에 알릴 것이다.
그건 테리즈 펄번이 악인이라서가 아니다. 이르커스의 행방에 어마어마한 포상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테리즈의 말대로 밥벌이가 걸려 있으면 사람은 얼마든지 잔혹한 선택을 한다. 꾸준하게 옳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기엔 세상이 만만치 않으니까. 자기 배 채우기 위해 남 찔러 죽이는 건 어느 세상에서나 매한가지였다.
“내가 다치는 것보다 남을 다치게 하는 게 더 쉬워.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그 진리를 알고 있고.”
“하지만 그건 옳은 일이 아니잖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옳은 선택만 하며 살아갈 수는 없단다. 그렇게 무르게 굴다간 네가 가진 모든 걸 빼앗길 거야.”
“모든 걸?”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이르커스의 손을 잡아 내리자, 선명한 보라색 눈이 곧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홀릴 것처럼 아름다운 색이었다. 빛이 들어도 동공이 잘 보이지 않는 내 새카만 눈과 근본적으로 다른, 보석 같은 눈.
“언젠가 내게도 그렇게 매정하게 굴 거지.”
“필요하다면.”
“번개를 내리치거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방식으로?”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잔인한 방식을 선택할지도 모르지.”
이르커스가 내 예상과 달리 황제가 된 뒤에도 날 죽이지 못한다면, 나는 테리즈에게 그랬던 것처럼 망설임 없이 이르커스와의 인연을 끊을 것이다.
이르커스에게 실망해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인간이 늙어 죽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르커스의 후손이 자라서 새로운 황제가 될 때까지 또 칩거하며 살아가겠지. 내가 생각하는 나와 이르커스의 관계는 딱 그 정도였다. 조건이 맞아서 함께하고 있을 뿐인, 찰나의 관계.
“그러니 내가 네게 상처 입힐 때를 대비해서 인간성을 좀 버려 둬. 불멸자는 기필코 필멸자를 슬프게 만들거든.”
물론, 경험상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았다.
나는 억지로 이르커스를 내게서 떼어 놓았다. 이르커스는 내게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괜히 정을 줘서 발목 잡히면 나만 또라이 되기 마련이다.
오래 사는 존재들은 무심할수록 제정신이었다. 찰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놈들은 늘 금방 미쳐 버렸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력은 소모재다. 이건 신체처럼 상한다고 알아서 회복되지도 않는다. 주인공이라고 해 봤자 이르커스도 일개 인간인 이상 나보다 먼저 늙을 것이고, 날 죽이지 못한다면 나보다 먼저 죽게 될 터였다.
“그리고 너, 감히 날 가르치려고 하지 마. 훈계는 네가 아니라 내 몫이니까.”
“당신은 이럴 때만…….”
“나는 죽기 위해서 널 거뒀어. 그걸 잊지 마, 이르커스.”
말 잘 듣고, 마법 잘 배우는 어린애한테 모질게 말하는 건 심장에 해롭다.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늠이 잘 안 갔다. 기왕이면 아주 냉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얼굴 근육을 다채롭게 안 쓴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런 표정을 어떻게 짓는 건지도 까먹었다.
일찍 죽는 놈들한테 정 주는 건 정말 내 손해였다.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나는 이미 마이너스 통장이나 다름없었다. 긴 세월 동안 이르커스뿐만 아니라 내가 정 줬던 인간들이 한 트럭이었다. 오래전에 싹 다 죽었지만.
그런데 여기서 뭐라도 더 퍼 주면 나는 정말 빈털터리가 된다. 눈초리를 축 내리뜨린 채 억울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이르커스의 얼굴을 외면하며 나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절대 정 주지 말아야지.
절대로.
????????????
예카리나가 사랑한 또라이 금발 황제의 이름은 다윈이었다.
나는 황제의 이름을 알게 된 뒤로 한동안 굉장히 힘들었다. 다윈? 저 사람, 혹시 진화론을 주장하진 않을까? 황제가 되기 전에 생물학자였던 건 아닐까?
대한민국에서 건너오게 된 빙의자로서 역사 속 유명인과 이세계인이 동명이인이라는 건 정말 곤혹스러웠다. 예카리나가 황제를 애틋하게 다윈이라고 부를 때마다, 머릿속에서 유인원 이미지가 슬로모션으로 지나갔다.
처음에 나는 다윈을 향한 예카리나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 미련한 감정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 시점의 나는 대한민국 입시 제도의 노예로서 학업에만 충실한 나날만을 보냈기 때문에 연애는커녕 수능 특강을 제외하면 누굴 짝사랑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사랑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가 무조건 기브 앤 테이크라고 생각했던 시점이므로, 바보처럼 자기가 가진 거 다 주면서 제대로 받는 건 하나도 없는 예카리나가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그냥 황비 같은 거 하지 말고, 강력한 마녀답게 마법으로 다윈 새끼를 데려다가 외진 곳에 감금해서 둘이 알콩달콩 살면 될 텐데.
‘그건 다윈이 바라는 일이 아니잖아.’
예카리나는 점점 생명력을 잃어 가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다윈이 황제가 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를 황제로 만들어 준 것이라고.
두 사람 사이에는 강제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형식적인 마법 계약도 없었고, 두 사람 사이의 자녀나 가까운 이의 목숨을 담보로 붙잡는 협박도 없었다. 오로지 예카리나의 순애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저는 황비님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요. 사랑 그게 밥 먹여 주나.’
‘그건 좀 유감인데.’
‘어쩌면 영원히 이해 못 할 거라는 생각도 들고.’
‘그럴까? 너도 언젠가는 사랑에 빠질 거야.’
‘제가요?’
‘그래.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는.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언가를 사랑하게 돼 있거든. 살아 있는 이상, 아주 불합리하게 말이야…….’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공포였다. 난 예카리나처럼 누군가를 저토록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사랑은 미친 짓이었다.
이런 꼰대 같은 신분제 사회 안에서 이세계인인 내가 누군가에게 정을 주는 것 자체가 최악이었다.
일단, 노예 제도가 살아 있는 이 세계를 받아들이기엔 나는 제법 문명이 발전한 21세기를 살다가 온 인간이었다. 이곳의 대다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도 그들을 이해 못 했다.
나는 천재는 아니어도 손해 보지 않고 살 만큼 내적 계산은 잘 돌아가는 인간이었다. 남보다 나를 더 아낄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합리적인 거고, 나쁘게 말하면 이기적인 새끼란 소리다. 그런 내가 상호 불이해 관계인 이 세계 사람을 사랑한다? 그건 그냥 상상만으로도 속 터지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심 미련하다고 생각했던 예카리나처럼 내가 누굴 사랑하게 된다면 혀 깨물고 죽어 버리는 게 차라리 나았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줘 봤자 나한테 제대로 돌아오는 게 있기나 할까? 적당히 외롭지 않을 정도로만 느슨하게 교류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인간은 늘 정도를 몰랐다.
영생 저주에 걸린 탓에 혀 깨물고 죽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됐지만, 다행스럽게도 지난 긴 세월 동안 내가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카리나의 예측이 틀린 것이다. 아무리 마녀여도 예언은 할 수 없으니까. 예카리나도 내가 이 정도로 ‘러브’와 담쌓은 인간일 줄은 몰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