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현자는 죽고 싶어-10화 (10/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10화

    “아는 사람이야?”

    이르커스가 내 로브 끝을 손으로 꽉 붙잡은 채 소곤거렸다. 이 정도 거리에 있으면 어차피 테리즈도 다 들을 텐데.

    나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기억에 남은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니,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기는 했다.

    “네가 3황자를 데리고 있을 줄은 몰랐네. 정치적인 문제엔 절대 관여 안 할 거라더니.”

    “그건 네가 귀찮게 하니까 했던 말이고.”

    “넌 정말 개자식이야.”

    “그 말 대체 몇 번째니?”

    “어쩌다 너 같은 개자식이 대현자랍시고 칭송받고 있는지…….”

    “칭찬 고마워.”

    개는 귀엽지. 나는 테리즈의 이 가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테리즈는 거의 30년간 내게 혁명 도와달라고 졸랐지만, 나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어차피 난 카만 왕족한테 공격 마법을 쓸 수도 없거니와, 테리즈가 혁명을 한다고 해서 왕국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다.

    잡초는 뽑아도 계속 자라니까. 썩은 물을 정화해 봤자 1급수가 될 수 없는 법이다.

    테리즈 펄번이 정권을 잡는다고 뭐가 변하겠는가? 흥망성쇠는 돌고 도니, 테리즈가 제대로 정치를 한다고 해도 다음 대에서 바로 말아먹을 게 분명했다.

    “혁명은 아직도 포기 안 했냐?”

    “…….”

    “거의 50년쯤 준비만 하고 있을 거면 그냥 포기해.”

    “너 때문이잖아, 네가 안 도와줘서…….”

    “내 핑계 대지 말고.”

    테리즈가 오른손으로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자, 나무로 된 테이블 위로 금이 갔다.

    살짝 잊고 있었는데, 테리즈 펄번은 마법사나 마녀는 아니지만 타고난 힘이 아주 천하장사였다. 나이 먹고도 저 괴력은 여전하구나. 건강해 보여서 안심이다.

    “넌 그냥 겁먹은 거잖아.”

    “닥쳐.”

    “막상 쌓아 올린 게 아까워서 실패할까 봐 실행도 못 한 거면서 왜 내 탓을 해? 비겁하기는.”

    하지만 테리즈가 괴력의 소유자든 뭐든 난 할 말은 해야겠다.

    나 때문에 혁명 못 했다니, 세기의 남 탓이다. 나는 애초부터 안 도와줄 거라고 분명히 말했다. 마탑 놈들도 그렇고, 인간은 너무 남에게 의존하려고 든다니까.

    나도 인간이지만 역시…… 인간은 정말 별로다.

    ????????????

    남쪽 숲의 대현자는 죽지 않는다.

    인간을 싫어하는 나무 정령들이 가득한 숲에 처박혀, 주야장천 마법 연구나 하고 있다던 대현자를 17살의 테리즈가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 당시 테리즈 펄번은 제 외조모로부터 남쪽 숲의 대현자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테리즈의 외조모는 전쟁 통에 죽을 뻔했다가 유안에 의해서 목숨을 건진 수많은 피난민 중 한 명이었다.

    생명의 은인 덕에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테리즈의 외조모는 유안에 대해 좋은 말만 늘어놨다.

    ‘그 사람은 우리를 도왔지만, 보상을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단다. 영생을 사는 이들은 아주 현명하거든. 짧게 살고 스러지는 평범한 인간과 다르게…….’

    어린 테리즈는 외조모에게 유안에 대한 찬양을 너무 많이 들은 나머지, 대현자에 대한 어떤 환상까지 품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이 침략 전쟁에서 죽지 않기를 바라서 기꺼이 아무런 보상 없이 전쟁에 참여했다는 대현자. 의도도 선하고, 호칭도 멋졌다. 어린아이들의 상상 속 영웅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던 것이다.

    ‘대현자님처럼 영생을 살 수는 없더라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 테리즈. 옳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해.’

    테리즈 펄번은 외조모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자라고자 노력했다. 수도 없이 좌절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테리즈 펄번은 아이들을 위해 대가 없이 전쟁에 참여하는 대현자가 되는 대신, 그 아이들을 헐값에 정보원으로 이용해 정보 길드 ‘나이트 펠로우’를 운영하는 노련한 수장이 되었다.

    평생 ‘옳음’을 선택하기에 인간의 수명은 너무 짧았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면 칼 맞아 죽기 딱 좋았고, 가진 게 많아질수록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반복했다.

    국민을 열심히 착취하는 왕족들의 목을 깡그리 쳐 버리겠다는 10대 시절의 급진적인 생각도 나이가 들면서 천천히 꺾였다.

    20대의 테리즈는 정보 길드만 먹으면 끝내주는 혁명을 일으킬 거라고 다짐했지만,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30대의 테리즈는 이제 자금과 정보,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았다. 그럼에도 테리즈 펄번은 바로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다. 마침 그 시기에 왕권도 세대교체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테리즈는 일단 카만의 새로운 행보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쯤부터 사실 구차한 변명이라는 것쯤은 테리즈 본인도 알고 있었다.

    테리즈는 나이트 펠로우의 수장이 된 뒤로 너무 많은 더러운 일을 목격했고, 그런 일들에 점차 익숙해졌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불의 앞에 눈을 감는 게 쉬워졌다. 일부러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인간인 데도 인간성을 잃어 간다. 애초에 인간성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예민한 채로 살기엔 너무 험난한 세상이었다.

    어느덧 40대가 넘어가자 테리즈는 혁명에 대한 뜻을 접었다. 이전 국왕에 비해 지금의 국왕이 그럭저럭 정무를 잘 처리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왕족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많았지만, 테리즈는 현재 국왕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보 길드가 국가에 내야 하는 수수료를 낮춰 줬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테리즈는 부유해졌다. 가진 게 많아지자, 당연한 수순으로 가진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졌다.

    테리즈에게는 이제 가정이 있었고, 어느 시점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도 한 명 태어났다. 혁명을 꾀했다가 실패하면 반란이 된다. 반동분자는 일가족 전부 사형을 피할 수 없다. 테리즈는 점점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우연하게 마주쳤던 대현자가 자신의 집요한 조름에 못 이겨 혁명을 도와주겠다고 했더라면…… 그랬다면 분명 자신은 왕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텐데.

    대현자가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대의를 실현하는 대신, 현실에 안주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카만 왕국이 썩어 가게 된 것은 왕족과 대현자의 탓이다.

    테리즈는 젊은 시절을 바쳐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으므로, 가난한 이들이 착취당하는 일에 도덕적 면죄부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대현자는?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 더 이상 세상의 일에 간섭하기 싫다며 남쪽 숲에 틀어박힌 대현자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질 수 없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귀족한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압도적으로 강하고 오래 살아온 존재들에게도 해당하는 일이니까.

    대현자는 엄청난 마법 실력에도 불구하고 이전처럼 어떤 나라도 도와주지 않았다.

    귀찮다는 이유 하나로 어떤 전쟁이 일어나도 방관했다. 불우한 아이들을 방치했고, 한 나라가 망하든 말든 숲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도 된 것처럼.

    유안에게 사람을 도울 의무가 없다는 것쯤은 테리즈도 알고 있었다. 대현자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늙거나 죽지도 않으니까. 대현자를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지만 테리즈에겐 늘 원망할 존재가 필요했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도 결국 하루 이틀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 속에 쌓이는 양심의 가책을 피하고자, 테리즈는 그 화살을 대현자에게 돌렸다.

    테리즈가 만난 대현자 유안은 외조모가 말했던 것처럼 정의감 넘치거나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다.

    매번 옳은 선택을 하는 위인도 아니었다. 오래 산 사람치고 현명한 대응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유안은 냉소적이었고, 어떤 부분에서 지나치게 닳아 결여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상상 속 영웅은 테리즈의 마음속에서 엉망진창으로 우그러졌다.

    어째서 저토록 인간적이지 않지? 당신도 처음엔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었으면서…… 원망은 점차 새로운 형체를 갖춰 갔다.

    정치적인 문제엔 관여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자신을 밀어내던 그 차가운 손길을 테리즈는 잊지 않았다.

    사람을 소름 끼치게 만드는 공허한 검은 눈, 세월의 흔적 하나 느껴지지 않는 검은 머리칼. 항상 그대로인 얼굴과 지겹다는 표정을 하고, 자신은 마치 인간이라는 범주를 벗어난 것처럼 오만하게 내려다본다.

    “네가 불사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난 이 자리에서 네 목을 졸라 버렸을 거야.”

    “목 졸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네 손만 아프고 말겠지만.”

    분노를 억누르고 짓이기듯 뱉은 목소리에 유안을 대신해서 그 옆에 앉아 있던 이르커스가 몸을 움츠렸다.

    테리즈는 그제야 로베인 제국의 도망친 황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깡인지 머리 색도, 눈 색도 바꾸지 않은 채로 번화가를 돌아다닌 이르커스는 삽시간에 길거리에 포진한 나이트 펠로우 정보원들 전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빛나는 금발에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두 눈. 막 명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미소년이었다.

    테리즈는 유안이 저를 밀어냈던 것과 달리, 이르커스를 옆에 두고 있는 것을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유가 뭐지? 제국의 황자라서? 아니면 예쁘게 생겼기 때문인가?

    “애 데리고 카만에서 빨리 꺼져.”

    유안은 거칠게 말하는 테리즈에게 더 이상 대꾸하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챙긴 식료품 바구니에 보존 마법을 거는 사소한 행동도 잊지 않았다.

    테리즈는 보는 것만으로 사람 열을 뻗치게 만드는 유안을 대신해서 연신 눈치를 살피는 이르커스 쪽에 시선을 두었다.

    마법사가 아닌 테리즈가 보기엔 예쁘장한 것을 제외하면 크게 특별하지 않은 어린애였다. 또래보다 골격이 좋고 똘똘해 보이긴 하지만, 마탑에서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이나 권세가들이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졸라 댈 때도 귀찮다고 개무시를 때리던 유안이 데리고 다닐 만한 이유가 없어 보였다.

    “황자에 대한 정보는 제국에 넘길 거다.”

    “…….”

    “당장 너를 고발하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하도록 해.”

    또 단순한 변덕이겠지.

    테리즈는 제 집요한 설득에 못 이겨 권력자의 목을 칠 때는 무력보다 정보를 이용해야 한다고 조언해 줬던 유안을 떠올렸다.

    유안은 내내 테리즈를 밀어내기만 하다가, 그 이후 테리즈의 집요함에 못 이겨 그녀에게 자금을 제공하거나 문제의 해결책을 알려 주곤 했다. 가끔은 정말 변덕스럽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고.

    아마 황궁 암투에 밀려 도망친 황자를 도와주는 것도 그런 맥락일 터였다.

    테리즈는 생각을 이어 가느라 공간 이동을 위해 마법 수식을 준비하던 유안의 시선이 순식간에 제게로 떨어지는 걸 곧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

    다시 한번, 낙뢰가 내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