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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9화 (9/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9화

    이르커스 얘는 무슨 거스름돈을 화폐국에서 주조하고 있나.

    식료품 계산하러 가서 몇 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이르커스를 찾기 위해 결국 직접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번화가에서 추적 마법이나 통신 마법을 쓸 수는 없다.

    마법의 나쁜 점은 은밀히 행동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마법을 쓰려고 해도, 마법이라는 건 주변에 산재한 마나를 소모해서 쓰는 것이기 때문에, 마나를 인지할 줄 아는 사람이 근처에 있다면 금방 무슨 마법을 썼는지 들키고 만다.

    이건 마법사나 마녀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안이다. 그러다 보니 보통의 경우 마법으로 직접 암살은 불가능했다. 비슷한 기능이 담긴 마도구를 제작하거나 저주 걸린 물건을 만들어 간접적으로 암살할 순 있어도, 직접 행동하려고 들었다간 실행 전에 발각될 확률이 높았다.

    물론, 나 같은 대현자는 들키기 전에 그냥 다 죽이고 걸어 나오면 된다. 안 그럴 거지만…….

    사소한 마법 좀 쓴다고 마법사들이 일일이 어디선가 마나 운용이 감지됐다며 돌아보는 건 아니지만, 나랑 이르커스는 눈에 띄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내 기준으로 사소한 마법이라고 해도 평범한 마법사들 입장에선 대마법인 경우도 너무 많았고, 두 명이서 장황한 마법 수식 풀이조차 없이 공간 이동 마법을 써서 온 것만으로도 호기심 많은 마법사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이르커스는 지금 황궁 암투 탓에 쫓겨난 도망자 신세다. 그리고 나는 황궁과 마탑, 심지어 신전에서까지 혈안이 돼서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싹싹 빌며 쫓아다니는 대현자고.

    우리 둘 중 어느 쪽이 눈에 띄나 무척 귀찮아진다는 점은 똑같다. 냅다 공간 이동 시전해서 남쪽 숲의 아틀리에로 돌아가 버리면 되긴 하지만, 날 쫓아다니는 놈들은 죄다 비등비등한 또라이들이라서 가끔 포기를 모르고 남쪽 숲 안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길버트는 몰라도 데인 쪽이 역정을 내며 인간이 싫다고 외치는 모습이 선연했다. 이르커스 한 명 제자 삼아 아틀리에 안에 들인 걸로도 얼마나 짜증을 부리던지, 한 사흘은 정말 귀찮았다.

    “이르. 계산 하나 하는 데 뭐 그렇게 오래 걸려?”

    결국, 나는 가게 안쪽으로 계산대를 찾아 들어갔다. 바깥에서 바구니에 토마토 담을 때만 해도 몰랐는데, 가게 안은 지나치게 한적했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비 오기 전날 무릎이 쑤시는 것과 비슷한 징조였다.

    생각해 보니 이 식료품점 있던 자리 20년 전에는 정보 길드 아니었나?

    정보 길드 세워서 돌아오겠다고 쩌렁쩌렁하게 말하던 빨간 머리 여자애의 희미한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뇌용량 부족으로 적당히 잊고 살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 것이다. 어어, 그때는 그런 일도 있었지.

    불길한 예감은 원래 틀리지 않는다.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거야, 같은 긍정적인 사고는 가끔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하루 때문에 정답률이 낮지만, 오늘은 나쁜 일이 생길 거야, 같은 부정적인 사고는 보통 정말 나쁜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정답률이 높다.

    나는 계산대 앞에서 이르커스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그만…… 본능적으로 공격 마법을 쓰고 말았다.

    앞에서 구구절절 눈에 띄어서 좋을 것 하나도 없으니 추적 마법이나 통신 마법 같은 것도 쓰지 말자고 생각한 게 완전 헛짓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열두 살짜리 애 멱살을 쥐고 있는 성인 남성을 보고 어떻게 사람이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멱살 잡힌 열두 살짜리 보호자가 일단은 나인데.

    “넌 뭐니?”

    나도 모르게 공격 마법을 쓴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공격 마법이 하필 파괴력이 큰 낙뢰였다. 어렸을 때 애니메이션으로 본 피카츄가 너무 인상 깊었던 탓인지 의식 없이 공격 마법을 쓰면 꼭 번개부터 나간다니까.

    번개 한 번 맞고 바로 기절한 남자를 발끝으로 툭 건드리자, 이르커스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아는 놈?”

    “아니.”

    “근데 갑자기 왜 멱살을 붙잡아? 어이없네?”

    모르는 어린애를 괴롭히다니, 아주 싹바가지 없는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이미 기절한 남자 위로 다시 한번 낙뢰를 떨어트렸다. 살면서 번개 맞을 확률이 로또 맞을 확률보다는 높다는데. 두 번이나 맞았으니 이놈은 이제 로또 사도 될 거다.

    “그러지 마. 그러다 저 사람 죽겠어.”

    “인간은 원래 누구나 죽어.”

    “유안.”

    “그리고 아동 학대범은 좀 죽어도 돼.”

    이르커스는 자기가 먼저 멱살 잡혀 놓고 내가 보복해 주는 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역시 그 시절 판타지 소설 주인공답게 선량하기 짝이 없다. 나는 이르커스가 내 로브 끝을 붙잡아 당기든 말든 내 기준 아동 학대범을 한 번 더 걷어찼다. 애 하나 안전하게 키우는 게 이렇게 어려운 세상이어서야. 아주 말세다, 말세.

    기절한 인간에게 백만 볼트를 시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계산대 뒤쪽 벽이 안쪽에서 열렸다.

    아예 인지를 못 하고 있었는데 일종의 비밀 통로 장치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긴 통로 저편에서 머리칼이 하얗게 센 노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했는데, 진짜 대현자잖아?”

    “뭐야?”

    “뭐긴 뭐야. 네가 쥐어 패고 있는 놈 상사지.”

    “역시 여기, 평범한 식료품점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왜 식료품점 행세를 하고 있어? 사람 헷갈리게.”

    “네가 사람이니?”

    “아니, 대현자다.”

    나는 저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테리즈 펄번.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오래전에 몇 번 도와준 적 있는 상대였다. 정확히는 내가 나서서 도와준 게 아니라, 테리즈가 귀찮게 알짱거리면서 내 도움을 갈취해 간 거지만.

    “그나저나 테리즈, 아직 살아 있었니? 예상보다 오래 사는걸.”

    “당신은 언제 애가 생겼어? 결혼 따윈 절대 안 할 줄 알았더니.”

    “그러는 너도 언제 이렇게 늙었니?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노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싸가지 없는 말투도 여전하네.”

    “칭찬 고마워.”

    혁명을 일으켜서 카만 왕족들 목을 싹 쳐 버리겠다고 당차게 말하던 빨간 머리 여자애가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었다.

    시간 참 빠르다니까……. 혁명은 어디에 두고, 왜 식료품점의 비밀 공간에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

    “우리 길드원이 난폭하게 군 건 미안해.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저렇게 전기로 지지면 어떡해? 모든 인간이 너처럼 불사는 아니야. 넌 가끔 잊는 모양이지만.”

    “안 잊었어. 아동 학대범은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아동 학대라는 소리에 테리즈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릴 인간 말종으로 몰고 갈 셈이냐고 날을 세우는 꼴이 퍽 익숙했다. 나이가 들어도 다혈질인 성격은 누그러지지 못한 모양이다.

    “밥벌이할 현상금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는데, 안 붙잡는 쪽이 더 머저리지.”

    “수배령이 돌았나?”

    “형식적으론 실종 전단인데, 저 3황자한테 걸린 몸값이 어마어마하다고. 찾아서 데려가기만 해도 몇 년은 수도에서 사치 부리면서 살 수 있을걸.”

    “타성에 젖은 소리를 잘도 하는군. 세월이 무섭긴 무서워? 혁명하겠다고 난리 치던 어린애가 이런 속물이 되고.”

    “세상과 타협한 거라고 해 주지 그래.”

    테리즈는 50년 전쯤에는 혁명의 붉은 피가 흐르던 인간이었다.

    카만 왕족들의 부정부패가 워낙 유서 깊은 덕에 왕족들 목을 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항상 많았지만, 테리즈 펄번은 그중에서도 아주 열정적인 편이었다. 행동력이 있는 반동분자였다고 해야 할까.

    어느 정도였냐면 그 당시 잠깐 마법 연구용 재료를 사러 카만의 수도, 캐러벨에 나와 있던 나를 발견하자마자 ‘너 대현자라면서? 그럼 역시 나랑 혁명하자’라고 접근해 왔을 정도다.

    내게 이런 제안을 했을 때, 테리즈는 고작 10대 후반이었다. 그 이후로 테리즈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는지는 사실 잘 모른다. 난 그 제안을 듣자마자 귀찮아질 것 같아서 바로 거절했기 때문이다.

    정치나 국가 문제에 엮이게 되면 아무리 불사의 몸이라도 좋은 꼴을 못 봤다. 나야 목이 잘려도 안 죽지만, 몸과 목이 분리되는 일은 두 번 이상 경험하기 싫었다. 다시 붙이는 건 붙이는 대로 끔찍하고, 재생하는 건 붙이는 것보다 20배쯤 역겨우니까.

    테리즈는 내가 단호히 거절했음에도 그럼 살 만큼 살아 본 대현자의 조언이라도 구하고 싶다며 내 주변을 알짱거렸다.

    얼마나 집요하게 쫓아오던지. 남쪽 숲 결계를 뚫고 들어올 능력이 안 되면 포기하고 돌아갈 법도 한데, 그 앞에서 무려 열흘이 넘도록 배회한 것이다. 그때 데인이 얼마나 신경질을 부렸는지……. 다시 생각해도 정말 끔찍한 기억이다.

    저러다가 나무 정령들한테 붙잡혀서 쪽도 못 끄고 죽겠다 싶어 어린 테리즈를 상대해 줬던 게 문제였다.

    당시에는 어린애의 치기 어린 계획이라고 웃어넘기고선 차근차근 정보 길드 같은 곳부터 먹는 게 어때? 라고 흘려넘겼는데, 몇 년 지나니까 정말 잘 운영되고 있던 정보 길드 하나를 통째로 흡수해 버리는 게 아닌가.

    행동력 좋은 인간은 이래서 무섭다. 대충 지나가듯 말한 얘기를 무슨 인생의 조언이라고 생각하면서 실행해 버리니까 옆에서 괜한 소리조차 지껄일 수가 없다.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조심히 마셔야 한다는 말이 진짜였다.

    물론 지금의 테리즈라면 어렸을 때랑은 다르게 내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여도 알아서 걸러 들을 테지만, 그 당시의 테리즈는 좀 부담스러웠다.

    200살이 넘기 전에는 테리즈 같은 인간들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차라리 속내가 뻔하고 속물인 쪽이 대하기 편해졌다.

    현실과 타협한 인간들은 내 예상을 잘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익을 좇아 움직이기 때문에 예상 밖의 결정을 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지금의 테리즈 펄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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