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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8화 (8/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8화

나는 이르커스를 품에 번쩍 안아 들었다. 데려온 지 몇 주 지나지도 않았는데 애들은 금방 자란다더니 처음보다 무게가 나가는 느낌이었다.

따로 보양식을 챙겨 주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쑥쑥 자라는 게 참 신기했다. 마녀의 후손이라 그런 걸까? 제법 무게가 나가는 열두 살짜리는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다며 내 품 안에서 버둥거렸지만, 나는 굳이 내려 주지 않았다.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이르커스는 버둥거리던 것을 포기하고 내 로브 깃을 두 손으로 꽉 잡은 채 내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는 애라 잊고 있었는데,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열두 살다웠다. 한국 나이로 열두 살이면 초등학교 5학년이지…….

나는 명절에 조카 데리고 놀아 주는 삼촌의 기분으로 카만 왕국으로의 이동 좌표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

나는 카만 왕국이 싫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 마법 계약의 첫 계약자는 카만 왕국의 왕족이었다.

이제 이름도 제대로 기억 안 나는 그 왕족 새끼는 아주 욕심이 넘쳐흐르는 놈이었는데, 자기 주제를 모르기까지 하는 완전체였다.

그 자식은 자기 왕국이 주변국에 꾸준하게 침략당하는 데다, 제국이 호시탐탐 남쪽 숲의 완전한 소유권을 넘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내민 도움의 손길을 바로 붙잡지 않았다. 내가 로베인 제국 출신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자기들을 도와주러 온 걸 보면, 로베인 제국 출신인 내가 카만 왕국을 도와준 것을 빌미로 종전 이후, 태도를 싹 바꿔 제국이 자기들에게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라는 게 그놈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

당대 로베인 제국의 황제가 정말 그럴 생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백 살이 넘어간 시점부터 국제 정세에 개인적으로 관여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카만 왕족 놈의 개소리가 상당히 거슬렸다.

이 바보 같은 왕족 놈이 혹시 자기 때문에 내가 여길 도와주는 줄 아는 건가? 카만이고 뭐고 마음만 먹으면 그냥 다 죽이고 내가 대륙 제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못 하는 거지?

타고난 성정이 자애롭지 않았던 나는, 그만 너무 빡치는 바람에 그 머저리의 풍성하던 머리칼을 모조리 태워 버리고 말았다.

그냥 겁만 주려고 했던 건데 나무 정령들보다 내구력이 약한 인간은 스스로 불을 끄지 못했고, 그렇게 소중한 모발이 성냥 불 던져진 초가삼간처럼 싹 다 타 버렸다.

대머리로 만든 뒤 날 아군으로 둘래, 아니면 적군으로 둘래? 하고 물으니까 직전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정치적 조건을 요구하던 놈이 그제야 내 앞에 납작 엎드렸다.

카만 왕족 놈들은 전형적인 기득권이었다. 전쟁 나면 제일 먼저 몸을 피하고, 군대에는 물자가 없어서 사람들은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 자기들은 배고픈 게 뭔지도 모른다.

남이 내는 세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 노약자를 보호해 주지는 못할망정 머리카락이 다 타고 나서야 위기 상황임을 깨닫는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머저리들을 수뇌부로 둔 탓에 카만의 어린아이들이나 노약자들은 곧잘 전쟁 포로로 잡혀가 노역을 하게 되거나 노예로 전락해 착취당했다.

21세기에서 건너온 내가 그 꼴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던 건, 고등학교 내신 등급 유지한다고 선택한 세계사를 열심히 공부했던 탓이었다.

카만의 왕은 그 지경이 돼서도 간은 참 컸다. 그놈은 나한테 이런 부탁을 했다. 전쟁과 침략이 끝나도 내가 카만 왕족들을 공격하거나 태도를 바꿀 수 없게끔 마법 계약을 해 달라고.

그 부탁을 순순히 들어준 건 그 후천적 대머리를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내가 대륙 통일하러 다닐 것도 아니고, 제국 놈들이든 마탑 놈들이든…… 나한테 싹싹 빌어도 세계 정복이나 대륙 통일 같은 건 절대 안 도와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계약해 줬다.

그러지 말걸.

언제나 과거의 내가 저지른 행적을 되돌아봤을 때 남는 건 답답함뿐이다. 전쟁과 침략에서 기껏 벗어나게 해 줬더니, 자기들한테 공격 마법 못 쓴다고 뻔뻔하게 내게 검을 겨누던 멍청이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더러워졌다.

“왜 그래?”

“별거 아냐.”

이르커스는 아주 오랜만의 외출에 들뜬 듯 걸음이 느린 나보다 한 걸음 정도 더 앞서 걸었다.

황자씩이나 돼서 그간 무슨 인생을 살아온 건지, 숲 하나를 경계지로 두고 근처에 위치한 카만 왕국에 방문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잘 데려왔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자꾸 사람이 많은 광장이나 노점 쪽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린이와 노약자를 위해서 전쟁 참여까지 불사하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닳아 버렸지?

세월은 정말 잔혹하다. 나는 이르커스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괜히 저렇게 두리번거리다가 길을 잃으면 찾기도 번거롭다.

지금은 어린애에 불과한 이 녀석도 10년만 지나면 훌쩍 자라 버릴 터였다. 그때는 나를 대하는 태도도 지금이랑 달라지겠지. 그러니 정을 줘서 좋을 게 없었다. 서로 애틋해져 봐야 날 죽일 때 시간만 더 걸릴 뿐이다.

머리로는 그걸 알면서도 이르커스에게 모질게 굴기는 꽤 어려웠다. 성가시고 버릇없는 어린애여도 나름 똑똑하니까. 가끔 드는 기특한 마음은 내가 아직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자꾸 앞서가지 마. 나한테 떨어지지 말라고 그랬잖아. 그러다 미아 된다.”

“응. 그냥…… 좀 신기해서.”

“옷부터 사자. 넌 너무 금방 자라서 같은 옷만 입고 지낼 수는 없겠다 싶어.”

내 손을 붙잡아 오는 작은 손은 처음에 비해 꽤 자연스러워졌다. 봐, 다들 이렇게 금방 적응하고 변한다니까…….

????????????

화폐 가치라는 건 뭘까?

한국에서도 한때는 200원 주고 컵볶이를 사 먹던 때가 있었다. 분식집에서 팔던 떡꼬치가 500원 하던 시절이 있었단 소리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천 원 이하 길거리 음식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는 존재가 됐다.

원재료 가격이 오르고, 인건비가 오르면 물가도 같이 상승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보통 이 ‘물가’라는 것은 한 번 올라가면 쉽게 내려갈 줄을 모른다.

판타지 소설 속이라고 해도 이 잔인한 물가 상승의 원리는 그대로 적용되는 건지, 내가 마지막으로 물건을 샀던 20년 전과 현재의 화폐 가치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르커스의 말대로 혁신적인 화폐 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20년 전 25제나쯤 하던 밀빵 하나 가격이 2갤런이 되어 있었다.

1갤런이 100제나니까 20년 사이에 물가가 8배쯤 뛰었단 소리다. 카만 왕국이 이 수준이면, 주변 왕국들보다 항상 조금씩 물가가 높았던 로베인 제국은 10배쯤 뛰었을 터였다.

“너 나중에 황제 되면 정치 잘해야 한다.”

“그런 말을 왜 토마토 사다가 해?”

“원래 물가 체감은 식료품 살 때 제일 잘되는 법이야.”

나는 이르커스에게 식료품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밀었다. 다른 손에는 1갤런짜리 동전도 쥐여 줬다.

“계산하고 와라.”

남이랑 같이 다니니 이건 참 좋다. 내가 직접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거.

게다가 이 의젓한 열두 살 꼬마는 자기가 같이 나가고 싶다고 투정을 부린 탓에 내 시간과 마나를 허비했다는 걸 아는지, 아틀리에 안에서보다 말도 참 잘 들었다.

심부름이란 명목으로 저거 계산하고 와, 이거 담아 와, 하고 사소한 잡일을 시켜도 불평불만 없이 재깍재깍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나한테 미안해서라기보다는 처음 와 봤다는 카만 왕국이 신기해서 이것저것 둘러보려는 목적일 테지만.

카만은 왕국인 만큼 로베인 제국보다 영토 규모는 훨씬 작지만, 상업 쪽으론 더 발달한 편이었다.

로베인 제국에서는 창업이라도 하려고 들면 서류 심사만 한 달 넘게 걸리지만, 카만에서는 운영 자금만 충분하고 불법적인 사업이 아니라면 (가끔은 불법적인 일도 눈감아 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왕국에 입점 신고만 하고 곧장 개업할 수가 있었다.

좋은 사업 아이템이 떠올랐다고 로베인 제국에서 정정당당하게 가게를 개업하려고 하다간 뒤통수 맞기 십상이다. 똑같은 아이디어로 카만에서 몇 달은 먼저 빠르게 개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허 소송 같은 게 걸리는 건 물론이고, 제국은 규제가 엄격해서 그런 소송에서 한 번 패소하면 잃을 게 너무 많았다.

그러니 카만에 온갖 상인들과 사기꾼들이 길거리에 차고 넘치는 것이다. 세금까지 알뜰하게 징수원을 써서 걷어 가는 제국과 달리, 카만 왕국은 납세에 있어서도 퍽 유한 편이니까.

정경 유착의 좋은 본보기였다. 자기 이익에 눈먼 카만의 윗대가리들이 돈 잘 버는 큰 가게의 주인들과 손을 꽉 잡은 덕에, 카만은 언제 방문하든 비리가 차고 넘쳤다.

나는 카만의 수도, 캐러벨의 번화한 거리를 천천히 둘러봤다.

확실히 내가 숲에 처박혀 있던 동안에도 세상은 빠르게 발전한 모양이었다. 수도 명칭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 다르게 건물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전에는 마차가 저런 모양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전에는 이만큼 중산층을 위한 카페가 많지도 않았고…….

나는 속으로 ‘나 때는 말이야…….’ 같은 생각을 하며 얼굴을 가린 로브를 더 깊숙이 아래로 잡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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