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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7화 (7/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7화

    나, 혹시 교육이 체질인가?

    한 번도 교육자를 꿈꿨던 적 없는데. 이르커스는 내가 뭘 가르치든 잘 배웠다.

    오래 살면서 다른 사람한테 이것저것 가르칠 일은 많았지만, 내 두루뭉술하고 많은 게 생략된 설명을 이렇게 쉽게 알아듣는 인간은 또 처음이다.

    황궁 마법사 시절, 어쩔 수 없이 받았던 제자들이 죄다 우는소리를 하며 마법사를 관두겠다고 했던 걸 보면 난 대치동 일타 강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아니라 이르커스 쪽이 확신의 천재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아이가 막 걸음마를 뗐을 때 부모들처럼 ‘우리 애는 사실 천재?’라고 혼자 결론을 내렸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분야가 뭐든 좋은 스승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수재니까. 안 되면 될 때까지 풀면 되는데 더 쉽게 할 수 있는 방식을 가르쳐 달라는 나약한 놈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르커스는 내가 이백 번 하면 그중 한 번은 돼, 라고 말한 다음 등을 떠밀면 스무 번 만에 그 한 번을 성공시켰다.

    입시 생활에 매진하던 때의 수험생 레이더가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이놈은 한국 입시 판에 있었으면 그 전날 밤 벼락치기 하고 1등급 맞는, 개 재수 없는 천재형이었다.

    “주인공이라 이거지…….”

    “뭐라고?”

    “별거 아냐. 집중하고 수식이나 마저 풀어라.”

    “응.”

    “너, 그리고 자꾸 말이 짧아진다? 꼬박꼬박 스승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존댓말하고.”

    “…….”

    “맹랑한 자식. 아주 말을 높일 줄을 몰라요.”

    이르커스는 유교 국가에서 나고 자란 인간이 아니라서인지 존댓말은 죽어도 안 했지만, 다른 말은 또 은근히 잘 들었다.

    아틀리에 나가지 말라니까 정말 밖으론 안 나가고, 공부 열심히 하라니까 악착같이 공부하고. 대충 뭘 가져다 먹여도 편식도, 투정도 잘 안 부렸다. 열두 살은 원래 이렇게 의젓한가? 내가 열두 살이었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나는 나와 이르커스 사이에 앉아 이르커스가 마법 수식을 구성하는 걸 구경하는 길버트에게 몸을 기댔다. 딱딱한 나무껍질이 유독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길버트는 성정이 온화한 떡갈나무인 탓인지, 내가 아틀리에에 어린 인간을 들였는데도 별다른 불평불만이 없었다.

    하긴, 집주인은 나니까. 세 들어 살고 있는 나무 정령이 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래도 나무 정령이니 나 이외의 인간이랑은 함께 살기 싫어할 줄 알았는데, 길버트는 의외로 이르커스에게 호의적이었다.

    아틀리에 밖에서 지내는 데인이 틈만 나면 이르커스를 괴롭히려고 드는 데 비하면 대단히 신사적이었다.

    나한테도 안 주던 나무 열매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내가 수업하기 싫어서 잔뜩 내준 마법 수식 과제를 함께 풀어 주기도 했다.

    “길버트, 너 저 애가 마음에 들어?”

    열두 살이 풀기에 어려운 마법 수식을 던져 준 탓에 골머리를 썩이느라 이르커스의 신경이 다른 데 팔린 사이, 목소리를 낮춰 길버트에게 물었다.

    [인간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잖아. 나는 나무 정령인걸.]

    “말이랑 다르게 꽤 잘해 주던데. 육아가 취미인가 했지.”

    [네가 몇십 년 만에 좀 활기 있어 보여서 좋은 거야.]

    “내가?”

    [그래, 네가. 한동안 침대에서 잘 일어나지도 않았잖아.]

    그건 그렇다. 이르커스가 남쪽 숲으로 기어들어 오기 전까지 나는 정말 쓰레기 같은 생활을 했다. 누워서 꼼짝도 안 했으니까.

    불로불사의 좋은 점은 그렇게 몇 년을 보내도 안 죽는다는 것이다. 나쁜 점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거고.

    “마법 연구에도 질린 참이었으니까. 지겨워졌을 땐 그냥 누워서 자야 해.”

    [너무 오래 잔다고 생각 안 해?]

    “불멸자의 몇 안 되는 특혜를 누려야지.”

    내 말이 길버트를 불만스럽게 했는지, 잎이 나지 않은 몇 개의 가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래도 저 어린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네가 무기력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예언자처럼 말하는구나. 나무 정령들이 예언도 할 줄 알던가?”

    [그럴 리가. 마녀도 예언은 못 하는걸.]

    역시 고3 시절 판타지 소설 읽지 말라던 그놈은 마녀보다 대단한 존재였군.

    [이번엔 꼭 죽을 수 있으면 좋겠네, 유안.]

    길버트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이번에야말로 이 세계의 주인공을 주웠으니, 진짜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수식이 적힌 양피지 위로 고개를 처박고 있던 이르커스가 자기에게로 향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아틀리에 안에 가느다란 눈발이 날렸다.

    사흘은 수식 풀이에 매진할 줄 알았더니, 이걸 하루 만에 해낸다. 타고난 이과생은 역시 다르다 이건가?

    아니면 역시 내가 교육에 소질이 있는 걸 수도 있었다. 나도 몰랐는데 재능이 있었던 거지. 400년 만에 찾은 재능.

    나는 성공했다고 환하게 웃는 이르커스를 멀거니 바라봤다. 내가 풀어 보라고 준 마법 수식은 일시적으로 함박눈을 내리게 만드는 거였는데, 고작 진눈깨비 날리게 해 놓고 기뻐하는 꼴을 보니 아주 같잖고 귀여웠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구나, 이르.”

    수능 당일에 죽는 바람에 대학교 근처에도 못 가 봤는데 연구생이 훌륭한 성과를 냈을 때의 대학 교수 기분이 어떤 건지 알 것도 같았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이 차가웠지만, 굳이 이르커스가 성공한 마법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짱짱 센 주인공답게 훌륭하게 자라, 황제의 자리에 앉은 뒤 나를 죽이는 거다. 나는 이르커스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멋진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키운 아이의 품에서 죽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

    누군가의 스승이나 보호자가 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마법 계약으로 묶인 관계일 뿐이라고 해도 ‘스승’이라는 칭호를 달게 되는 순간, 애가 엇나가지 않게 책임져야 할 의무가 생기니까.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나 도덕은 이제 거의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회로 돌아가야 할 어린애와 한 공간에 오래 지내게 되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나야 안 먹고 안 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20년쯤 잠들어 있는다고 죽지 않지만, 이르커스는 며칠 안 먹고 안 자면 죽는다. 불멸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쪽 숲은 나무 정령들이 득시글거리기 때문에 나무 열매야 사방천지에 널려 있으니, 내가 뭘 안 챙겨 준다고 애가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이 좀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이르커스는 열두 살답지 않게 보유한 마나 양도 많고, 타고난 골격도 좋은 편이니 나무 열매로 부족하다면 소동물 정도는 스스로 사냥할 수 있었다. 조금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주인공이 설마 토끼 잡다가 죽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래서 그냥 두려고 했다. 가만둬도 알아서 잘할 것 같아서. 아이의 독립심을 길러 주는 데에는 약간의 방치도 중요했다. 내가 다 떠먹여 주는 건 교육에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유안. 애를 방치하는 건 아동 학대야. 아무리 네가 인간성이 결여됐다고 해도…….]

    “잔소리하지 마, 길버트. 이것도 다 교육의 일종이라니까.”

    [애를 거뒀으면 책임을 지란 소리야.]

    죽었던 양심이 길버트의 잔소리에 어어, 나 불렀냐? 하고 자꾸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났다.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이르커스를 챙겨 주지 않아도 될 이유를 떠올려 봤자 길버트의 ‘그거 학대다’라는 잔소리 한 번이면 결국 ‘좋은 스승이란 무엇인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열두 살이면 독립심을 기를 나이인가? 내 기준으로는 너무 까마득한 옛날이라 내 교육 방식이 잘못된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이르커스가 아무런 불평이 없다고 이렇게 놔둬도 되는 건지 고민스러워진 것이다.

    “내가 애를 제대로 돌봐 본 적이 있어야지.”

    [그러게, 400년 동안 애 하나 안 만들고 뭐 했어.]

    “불멸자가 무슨 애야. 내 애가 나보다 빨리 죽는 꼴을 어떻게 봐?”

    [이럴 때만 상식적인 인간처럼 말하지.]

    길버트가 어처구니없단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사실 얼굴이라고 할 만한 부분 전체가 나무껍질로 덮여 있어서 무슨 표정인지는 자세히 안 보이지만, 아마도 ‘네가 그런 생각을 할 줄 알아?’에 가까운 느낌일 터였다.

    “뭐야, 그 표정은. 불붙여 버린다.”

    [가끔 넌 인간이랑 비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아.]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네가 애 먹이고 입힐 것 좀 잔뜩 구해 오든지.”

    [거둔 건 너야. 저 인간이랑 계약한 것도 너고.]

    나무 정령들은 이런 데 있어서 칼 같다. 아무리 길버트가 이르커스에게 잘해 주고 있어도, 길버트는 내가 챙기지 않아서 이르커스가 죽는다면 아무렇지 않게 그 시체를 숲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나무들이 시체를 양분으로 삼을 수 있게끔 처리하겠지. 나무 정령들은 ‘비인간’이니까. 인간 입장에서 보면 잔혹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그게 그들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외출을 하긴 해야겠어.”

    애 키우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구나.

    ????????????

    “왜 고집을 피우지? 그냥 여기 처박혀 있어.”

    “꼭 그렇게 말해야 해?”

    “그럼 뭐라고 해야 하니? 여기 얌전히 있지 않으면 널 버릴 거야, 이런 식으로?”

    오랜만의 외출 준비는 이상한 곳에서 제동이 걸렸다.

    이르커스에게 물어보니, 로베인 제국에서 최근 100년 사이에 화폐 개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화폐 단위가 달라진 건 아니란 뜻이니, 돈 챙기기는 그나마 수월했다.

    마법으로 남들에게 보이는 눈 색과 머리 색을 전부 평범한 갈색으로 바꿨다. 근처에 마법사가 있다면 금방 들통날 위장이지만, 일반인을 상대하는 데에는 이런 허접한 위장이 꼭 필요했다. 그놈의 검은색이 대체 뭐라고……. 로브를 뒤집어쓴다고 해도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짧게 외출하는 건데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다. 괜히 문제가 될 만한 요소는 사전에 다 정리해 두는 게 옳았다.

    돈을 챙기고 옷차림새를 다듬는데, 대뜸 이르커스가 자기도 같이 외출하고 싶다고 내게 쭈뼛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그간 내 아틀리에에 잘 처박혀서 공부만 하길래 그렇게 활동적인 성격은 아닌 줄 알았더니, 이 안에만 갇혀 있던 게 내심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넌 나가면 안 돼. 아직 널 죽이겠다고 혈안이 된 인간들이 주변에 널리고 널렸을걸.”

    “당신처럼 머리 색이나 눈 색을 바꾸면 되잖아.”

    “마녀나 마법사들끼리는 외모 변형 마법이 통하지 않아. 넌 아직 도망 다니는 입장이고.”

    “대현자면서 나 하나 못 지켜?”

    “이 맹랑한 게…….”

    내내 말만 잘 듣던 애가 고집을 피우니까 급속도로 피곤해졌다.

    아마 이르커스 본인도 나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게 얼마나 억지인지 모르진 않을 것이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모를 만큼 바보도 아니고. 실제로 평범한 열두 살에 비해 이르커스는 지나치게 의젓한 구석이 있으니까.

    어쩌다 습격을 당해도 마법을 써서 반격하거나 도망치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내가 잘 조절할 수 있을지 아닐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 몇 명 죽였다고 질질 짜는 시점은 몇백 년 전에 지났지만, 그래도 누굴 다치게 하거나 죽게 만드는 건 여전히 찝찝했다. 인간은 너무 약하단 말이야.

    “괜히 돌아다녔다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황실 눈에 띄면 너나 나나 상당히 귀찮아져.”

    “……그건 나도 알아.”

    “알면 가만히 좀 있어. 심심하면 길버트랑 숲이라도 탐험해 보든가. 필요한 것만 사서 금방 돌아올 거니까.”

    옷 몇 벌과 식료품만 사면 다른 용건은 없으니 바로 아틀리에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공간 이동 마법은 좌표만 잘 알면 초급 마법사도 쓸 수 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이동하게 되면 마법 수식 난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마나 사용량도 사람 수에 따라서 제곱으로 뛰고.

    그러니 수월하게 다녀오려면 저렇게 풀 죽은 표정을 짓는 어린애를 두고 가는 게 여러모로 옳은 일이었다.

    귀찮은 일 하나 피하자고 최선을 다해 머리카락과 눈 색도 바꿨는데, 어디에 내버려 둬도 눈에 확 튀는 이르커스를 데려가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아무리 저놈이 주인공이고 내가 대현자라고 해도 사소한 위험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오래 살면서 깨닫게 된 진리 중 하나는 정말 사소한 변수 하나가 엄청난 나비 효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었다.

    구질구질한 변명은 차치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귀찮았다. 얘 데리고 나갔다가 내가 책임져야 할 사고를 치게 되면 어떡해? 난 그냥 남쪽 숲에서 히키코모리처럼 살고 싶을 뿐인데.

    [그냥 데려가지 그래.]

    나의 조심스러운 행동 지침에 하나도 도움 안 되는 나무 정령이 뒤에서 말을 얹었다. 겨우 낙담시킨 이르커스가 다시 살짝 숙였던 고개를 반쯤 들었다.

    나는 길버트를 향해 더 말하면 네게 불을 붙여 버리겠다는 수신호를 보냈지만, 길버트는 다 알아들었으면서 모르는 척 자기 할 말만 했다.

    [제국 말고, 카만 왕국 쪽으로 외출하면 되잖아.]

    “허튼소리 하지 마. 카만이라고 안전할 것 같아? 그리고, 여기서 더 멀잖아.”

    [어차피 이동은 다 마법으로 할 거면서 까다롭게 굴기는.]

    이르커스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내게 닿았다.

    머리 색이나 눈 색을 바꾼다고 해서 저 정도로 예쁘장한 얼굴이 눈에 안 띄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나가서 후다닥 필요 물품만 챙기고 돌아오는 게 낫지, 이르커스를 데리고 나가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다.

    정말 비합리적인 결정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얌전히 있을 거야?”

    “그럼요.”

    “이럴 때만 존댓말이지. 버릇없는 자식…….”

    저렇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기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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