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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6화 (6/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6화

    인간에게 잔뜩 싫증 난 상태로 아틀리에에 처박혀 나무 정령들이나 상대하며 살아온 탓에, 내 아틀리에 소파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저 열두 살짜리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차라리 진짜 어린애처럼 울거나 칭얼거리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이르커스는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아주 의젓했다.

    “남쪽 숲까진 어떤 목적으로 들어왔지? 잘못 들어오면 죽는다는 건 다섯 살짜리도 아는 사실일 텐데.”

    “추적을 피하려고 들어온 것뿐이야.”

    “추적?”

    라단…… 어쩌고 걔겠지. 황태자인가 1황자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이런 판타지 소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라이벌 구도의 악역 아닌가.

    나는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되물었다.

    “집안 문제로…… 날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어. 도망쳐도 계속 쫓아와서 숲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어.”

    “우습긴. 여우 피해서 호랑이 굴로 들어온 격이야. 나무 정령들은 인간을 정말 싫어한단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서 살잖아.”

    “난 인간이라기엔 애매하고.”

    이 세계에서 평범한 인간은 보통 예순까지도 못 살고 죽는다. 사람들과 섞여 사는 마녀는 그보다도 더 빠르게 단명한다. 또, 수명이 긴 종족들은 인간처럼 무리 지어 사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니 400살이나 먹고 혼자 사는 내가 평범한 인간이라고 말하기는 정말 애매하다.

    “다시 말하지만, 난 자선 사업은 안 해. 어린애가 찡찡대면서 도와달라고 해도 대가 없이는 도와줄 생각도 없어.”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네가 내 도움 없이 어쩌려고?”

    “나 혼자서도 알아서 할 수 있어.”

    “내가 당장 널 이 숲에서 내쫓아 버려도? 너, 로베인 제국의 3황자잖아. 널 죽이려는 놈들이 천지에 깔렸을 텐데.”

    이르커스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긴. 내가 아직 고3인 시절에 네가 나오는 소설 1권을 읽었단다.

    “……나를 알아?”

    “처음부터 내가 네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은 완전히 까먹은 모양이구나.”

    나는 그냥 대현자스러운 미소만 면면 위로 띄웠다.

    대현자라는 칭호가 이럴 때 참 좋다. 대충 알은척하면 어떤 문제든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황위는 자력으로 쟁취할 거야.”

    “마법도 못 쓰는 어린애가 어떻게? 스승은 있니? 잠재력이 뛰어나 봤자, 스승이 없으면 마법사가 될 수 없어.”

    “누구한테든 배워서…… 꼭 마법일 필요는 없잖아. 검 같은 것도 있고.”

    “검 뽑기 전에 공격 마법 거는 게 더 빠를 텐데.”

    “마법 사용 전에 검으로 찌르면 아무리 마법사라도 죽잖아.”

    “바보 아냐? 실력 있는 마법사라면 방검 마법은 당연히 사전에 걸어 뒀겠지.”

    유치한 말싸움이 짧게 오고 갔다.

    난 검사 놈들이 제일 싫다. 안 늙고 안 죽을 뿐이지 아픔은 다 느껴지는데, 검에 찔리면 금방 낫지도 않고 미치도록 아프기 때문이다. 심지어 찔릴 때보다 뽑힐 때가 두 배로 아프다.

    그래서 전쟁터 구르다가 방검 마법을 혼자 고안해 냈다. 평범한 수준의 마법사들이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은 아니지만, 걸 수만 있으면 검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는 사기적인 마법이었다.

    내가 살던 세상에서는 방탄조끼도 있고, 방검조끼도 있었으니 아이디어 자체는 그냥 있던 물건을 베낀 거지만…… 이 세계에서는 혁신적인 마법으로 인정받았다. 역시, 특허는 선빵이 답이다.

    내가 대현자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한 건지, 이르커스의 얼굴 위로 불퉁한 표정이 떠올랐다.

    예쁘게 생겨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젖살이 채 안 빠져서 그런 건지 심통 난 낯이 제법 귀여웠다. 백 살 넘은 떡갈나무 정령보다는 확실히 열두 살짜리 인간 어린이가 귀엽긴 하다.

    “……애 취급하지 마.”

    “너 열두 살이잖아. 난 400살이야. 존댓말 써라. 노인 공경 몰라?”

    “…….”

    “너랑 나랑 388살 차이니까, 나대지 마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팩 돌리는 것도 좀 귀여웠다. 역시 겉 포장이 예쁘니까 건방지게 굴어도 어울려 줄 맛이 나는군.

    이르커스는 처음 마주쳤을 때의 그 날카로움은 어디로 가고, 열두 살 어린애답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정신 사납게 내 아틀리에 안을 서성거렸다.

    “마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공짜로는 안 할 거야.”

    “뭘 원하는데? 재물? 아니면, 지위나 권력 같은 거?”

    “아니. 난 죽음을 원해.”

    서성거리던 어린애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당장 황위 싸움에 휘말려서 죽지 않으려고 여기까지 온 애 앞에서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게 좀 껄끄러웠지만, 알 게 뭔가. 죽으면 더 볼일 없는 필멸자의 기분을 고려해 주기엔 나도 세월에 닳아 지친 상태였다.

    “남쪽 숲의 대현자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날 이미 알고 있었으니, 이것도 알겠지?”

    “그래. 어떤 경지에 도달해서 그런 거라고 들었어. 대현자 정도가 되면 마법의 축복을 받아서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어떤 새끼가 또 헛소문을 퍼트렸군. 마탑 발이니? 그런 개소리는 잊어. 걔넨 자꾸 날 신격화하려고 들더라. 걔네가 자꾸 그러니까 신전놈들도 가끔 귀찮게 하잖아.”

    “…….”

    “난 영생 저주에 걸려 있는 거야. 네 머나먼 선조가 내게 축복이랍시고 건 저주지.”

    나는 이르커스가 눈치채지 못하게 왼손을 등 뒤로 올리곤 작은 계약용 마법진을 그렸다.

    “나랑 계약하자. 내가 널 기필코 황제로 만들어 줄게. 제국을 새로 세워서라도.”

    “……날 황제로 만들어서 당신이 얻는 게 뭔데?”

    “죽음이지.”

    이르커스의 조막만 한 머리통 안이 번잡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게 딱 보였다.

    이놈도 지금 생각이 많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남쪽 숲에는 나 같은 대현자가 살지 않는다. <이르커스의 서> 1권에서도 이르커스는 혼자 힘으로 남쪽 숲을 탈출해서 황궁으로 돌아가니까.

    그 말인즉 이르커스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는 스승은 원작대로라면 내가 아니어야 한다는 뜻이다.

    뭐, 나는 1권밖에 읽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무튼 마법 스승 한 명쯤 나오는 에피소드도 17권 중에 하나쯤은 있었겠지. 그러니 그냥 조기 교육한다고 생각하자. 한국식 교육법은 원래 영재 교육 스파르타다.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다고 어떻게 확신해?”

    “네가 예카리나의 후손이니까.”

    “……예카리나?”

    “있어, 네 머나먼 선조. 그러니 네가 황제가 되면 나 하나 죽이는 게 뭐 어렵겠니?”

    “당신, 불멸자라며…….”

    “내가 불멸자여도 네가 황제가 되면 할 수 있어. 패기를 가져라. 안 되면 마는 거지.”

    드디어 마녀가 아닌…… 사람들과 섞여 살아도 병들지 않는 마녀의 후손이다. 무슨 인연 관계가 엮여 있는지는 몰라도, 이르커스는 이미 로베인 제국의 3황자였다. 계승권만 쟁탈해 오면 황제까지 가는 길목이 싹 닦여 있단 소리다.

    무엇보다 이놈은 이 판타지 소설 세계의 주인공 아닌가? 뭐가 돼도 될 놈이었다. 내 직감이 강력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이놈이야말로 날 죽여 줄 최적의 인물이라고.

    “내가 당신을…… 정말 만약에…… 못 죽이게 되면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넌 죽고 난 지금처럼 계속 살겠지. 언젠가 나타날, 나를 죽여 줄 사람을 기다리면서.”

    내 대답에 이르커스가 다시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 어린애들은 파악하기가 어렵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을 들으면 안도를 해야지, 저렇게 불만스러워하다니.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니까. 내가 알뜰살뜰 잘 돌봐서 세상 돌아가는 꼴에 빠삭한 어른으로 키워 내야겠다.

    이르커스가 보라색 눈을 도르르 굴렸다. 코앞에 갑작스럽게 닥친 대현자와의 계약이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냅다 이르커스한테 ‘넌 이 세계의 주인공이니까 할 수 있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아무리 대현자라도 그런 메타 발언은 수습하기 어려웠다.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줄 건지 말해 줘. 당신은 당장 내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잖아.”

    “잘.”

    “…….”

    “대륙 유일의 대현자를 믿어 봐라.”

    이르커스의 얼굴 위로 수천 개의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니 너무 귀찮았다.

    어차피 인간 세상의 일이란 권력 암투 아닌가. 돈과 정치질, 그리고 무력 세 가지면 해결 못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마침 너무 오래 산 탓에 저 세 가지를 다 가지고 있었다.

    “대현자는 원래 다 당신 같아?”

    “글쎄다.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대현자는 나 한 명밖에 없으니 다 나 같겠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왼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계약의 마법진이 절반 이상 완성된 상태였다.

    이르커스의 눈처럼 보라색으로 빛나는 마법진이 불온하게 일렁거렸다.

    “당신이 만약 날 황제로 만들어 주지 못하면?”

    “그럴 일 없어. 로베인 제국에서 안 되겠다 싶으면, 내가 대륙 통일해서 널 황제로 앉혀 줄게.”

    “……마법 계약은 어기게 되면 페널티가 있잖아. 어떤 페널티를 받을지 모르는 건 괜찮은 거야?”

    “어차피 안 뒈지니까 괜찮아. 영생 저주보다 더한 저주가 어디 있겠니?”

    “…….”

    “질문 다 했어? 너 진짜 의심 많고 귀찮은 꼬마구나.”

    이 세계 주인공은 보험 약관 읽을 때 꼼꼼하게 확인은 하겠어. 종신 보험 연금 보험인 줄 알고 잘못 들어서 피눈물 흘리는 일은 없겠다.

    나는 <이르커스의 서> 주인공이 보험 사기당할 위인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좀 흐뭇해졌다. 그래, 예카리나처럼 웬 개뼈다귀 같은 놈한테 호구 잡혀서 살 운명인 것보단 낫지.

    이르커스는 잠깐 망설이더니 곧 내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계약 위반 시 치르게 되는 페널티가 뭔지는 한번 알아볼 필요성이 있을 것 같았다. 어겨 본 적이 없어서 모르긴 하니까.

    계약 마법진은 카만 왕국 왕족 놈들이랑 계약할 때 말고는 써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카만의 왕족을 아직 죽이거나 공격해 본 적이 없으니 모를 수밖에. 역시 나는 너무 착하게 살았다.

    나중에 한번 죽여 보고 페널티가 뭔지 알게 되면 이르커스에게도 페널티가 뭐였는지 계약 서비스로 고지 정도는 해 줘야겠다.

    이르커스가 내 마법진 위로 자기 손을 올렸다.

    “그럼, 앞으로는 당신이 내 스승인 거네.”

    “그래, 아주 스파르타식으로 교육할 거다. 다 죽여 주는 마법사로 키워 주마.”

    “스파르타가 뭐야?”

    “그런 게 있어. 넌 몰라도 되는……. 아무튼, 대현자를 스승으로 삼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해. 날 몇십 년째 쫓아다니는 마탑 놈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피눈물을 흘릴 테니까.”

    잔뜩 일렁거리던 마법진이 이르커스의 작은 손이 닿자, 곧 잠잠해졌다. 작은 크기로 줄어든 마법진은 나와 이르커스의 손등에 자리 잡더니, 곧 투명하게 변하며 가시 범위 안에서 사라졌다.

    이 세계 주인공과 나의 계약은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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