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5화
영생을 사는 게 아주 최악은 아니었다. 난 불로불사라서 늙거나 병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디 잘리면 도마뱀처럼 재생했고, 시력이 나빠지거나 치아가 상하는 일도 없었다. 이것만큼은 참 좋았다. 대충 살아도 몸이 상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축복이라고 할 만했다. 웬만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대개 내 상태를 엄청나게 부러워했다.
나도 가끔 미친 듯이 권태로워질 때를 제외하곤 죽지 않는다는 내 특성을 잘 이용해 가며 잘 먹고 잘살았다. 세상 변해 가는 모양새를 구경하는 것도 가끔은 재밌었으니까.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끔 남의 나라 왕위 다툼 같은 것도 운치 있게 와인 한 잔 기울이면서 구경하고 그랬다.
하지만 그조차 400년쯤 살다 보니 점점 할 게 없어졌다.
황궁 마법사도 해 보고, 용병으로 계약해서 전쟁도 해 보고…… 마탑 놈들의 애걸복걸에 져 마법 실험만 몇십 년에 걸쳐서 해 보기도 했다.
대현자 칭호는 200살에 얻었고, 이종족들이랑 손잡고 미개척지 탐험도 다녀 봤다. 대륙의 주 종교가 100년간의 종교 냉전 이후 바뀌는 것도 두 눈으로 봤다.
친구라고 할 만한 놈들은 생기면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죄다 죽었고, 제국 황제들은 볼 때마다 폭삭 늙어 있거나 다른 놈으로 대체돼 있었다. 중간에 대륙 주 종교가 바뀌는 바람에 신전이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는 건 수십 번도 넘게 봤다.
200년 전만 해도 초원이었던 곳이 사막이 되는 광경까지 보고 나니, 세상에 별로 미련도 안 생기고 뭘 하고 싶다는 생각도 더 안 들었다. 불멸자답게 모든 게 귀찮아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냥 남쪽 숲에 아틀리에를 하나 짓고 거기 틀어박혔다. 불멸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는 법을 잘 알아야 했다. 저 두 가지를 잘못 썼다간 미치광이로 전락하기 딱 좋았다.
사실, 인생 400년 중 몇 번은 정말로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다. 오래 산다는 건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목격하게 된다는 거니까.
관에 묻혀 지금쯤이면 백골이 진토되었을 예카리나를 붙들고 ‘너희 딸들은 왜 딸들만 낳아? 마녀 멈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다. 자연의 섭리를 과하게 거슬러서 네크로멘서 기술이라도 개발하지 않는 이상, 예카리나에게 징징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면 산 사람한테 찾아가야지.
나는 예카리나의 후손이자 이 세계의 주인공이며, 높은 확률로 로베인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될 이르커스를 만나기 위해 아틀리에에서 나와 동쪽으로 스물아홉 걸음을 옮겼다.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데도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누가 됐든 주인공답게 나 좀 죽여 줘라.
길버트가 말한 자리까지 발소리를 죽여 접근했을 때, 거기에는 정말 죽여주는 미소년이 하나 있었다. 이야…… 역시 판타지 소설 주인공이라 태가 다르기는 달랐다.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피가 눌어붙어 있는 데다,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금발 미소년이 나를 돌아봤다.
“이르커스?”
“…….”
꾀죄죄한 꼴과 달리, 자수정을 통째로 조각해 깎아 넣은 것 같은 눈이 나를 곧게 응시했다.
보나 마나 한 10년 뒤엔 엄청난 미청년으로 자라겠군. 나는 데인에게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이르커스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누구야?”
“…….”
“날 왜 도와주지?”
주인공답게 성격도 아주 맹랑했다. 어린애면 그냥 어린애답게 헉, 절 구해 주시다니! 너무 감사해요! 하고 어른 손이나 붙잡을 것이지.
나는 금세 피곤해졌지만, 대놓고 귀찮은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애써 미소 지었다. 몇 년 동안 휴식기를 가졌던 얼굴 근육들이 마구 비명을 질러 댔다.
저놈은 주인공이다. 주인공한테 밉보이면 악역으로 전락한다. 이런 판타지 소설 속에서 악역이 되면 지난 400년의 삶 속에서 겪었던 귀찮은 일보다 더한 사건 사고가 생기는 수가 있었다.
“자선 사업은 안 하니까, 걱정 말고 내 손잡아. 여기서 죽고 싶니? 물푸레나무는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아.”
물론 내가 굳이 안 도와줘도 이놈은 살아서 다시 황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르커스는 주인공이니까. 열두 살짜리라고 해도 강력한 마녀의 후손이고, 실제로 마법을 제대로 쓸 줄 모를지라도 타고난 마나 양이 엄청난 덕에 대현자인 내가 친 결계까지 본능적으로 뚫고 숲에 진입했다.
웬만한 중견 마법사들도 못 하는 일을 자연히 해내는 걸 보면 위로 보고 아래로 봐도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내가 살았던 현대 대한민국 용어로 정의하자면 ‘먼치킨’인 것이다.
남쪽 숲에서 제일 호전적이고 인간을 싫어하기로 유명한 데인이 직접 공격하는 대신 길만 틀어막고 이르커스를 붙들어 둔 것도 그 탓일 터였다.
데인도 이 녀석을 직접 공격해 봤자 안 통하거나 역공당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던 거다. 아직 마법사도 못 된 열두 살에게 역공당하는 건 아무리 데인이라도 쪽팔렸겠지.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이르커스의 서>에서 주인공 이르커스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떠올려 봤다.
하지만 막연히 진중하고 노잼이었던 문체만 어렴풋하게 기억날 뿐, 등장인물의 세세한 설정이나 자세한 성격까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긴 진짜 중요한 문장도 기억해 낸 지 얼마 안 됐는데, 다른 게 제대로 떠오를 리가 없었다. 쓸데없이 수능 특강에 나왔던 영어 단어는 가끔 떠오르던데. 역시 뇌는 내 뜻대로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거의 400년 만에 처음으로 ‘마녀가 아니고’ ‘황위에 가까운’ 예카리나의 후손을 만나게 된 것이다. 거기다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고 해도 반발할 이유가 없는 황자 출신이라니. 정말 감격스러웠다.
너 엄마가 누구니? 어떤 마녀가 또 평범한 인간이랑 사랑에 빠져서 기특하게 널 낳았어? 이런 걸 오지랖 넓은 옆집 할머니처럼 물어봐야 할 지경이란 말이다.
됐고, 당장 열두 살에 즉위 한번 가 보자. 너는 17권까지 갈 것 없이 1권 만에 황제 되고, 나는 나이 400에 죽는 전개 가 보자고.
나는 여전히 내 손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이르커스의 작은 머리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냥 좀 잡아라. 사실 좀 없어 보여도 마음이 급한 탓에, 네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까지 알차게 도와줬던 대현자가 나니까 의심을 좀 거둬 보라고 질척거리고 싶었다.
“남쪽 숲의 대현자…….”
내가 나 너희 선조랑 다 아는 사이라고 질척거리기 일보 직전에, 작은 얼굴 위로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입술이 작게 중얼거렸다.
남 입에서 내 호칭을 듣는 게 새삼스러웠다. 고작 열두 살짜리가 나를 아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남쪽 숲에 칩거한 지 오래돼서 유명세가 많이 죽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하긴, 죽지 않는 인간이란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항상 최고의 관심사니까.
이르커스는 쭈뼛거리며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나이에 비해서는 큰 편이지만, 어린아이의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 손보다는 작았다.
나는 힘을 줘 이르커스를 내 품 안으로 확 끌어당겼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소년의 몸이 잠깐 버티더니, 곧 내 품으로 쏟아졌다.
“그래, 내가 대현자다. 예카리나의 후손아.”
????????????
마흔 살쯤에는 나도 아이들에게 꽤 친절했다. 그쯤엔 그냥 어린애들이 귀여워 보였다. 내 외양은 열아홉 살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으니, 남들 눈에는 애가 애를 귀여워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백 살이 넘고서는 잠시 자원봉사에 심취해서, 외세에 침략당하던 왕국의 용병으로 일하기도 했다. 정말 자선 사업이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 전쟁 때문에 착취당하는 어린애들이 안타까워서 참전한 거니까.
그 왕국이 지금의 카만 왕국이다. 기껏 전쟁에 참여해서 국력을 강화해 주고 돌아 나왔더니, 이 새끼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강해진 국력으로 자기 옆의 다른 작은 왕국들을 영토 확장과 국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침략했다.
제일 거지 같은 부분은 이 카만 놈들이 당시엔 나이를 덜 처먹어서 순진했던 나를 데리고 마법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용병으로 일해 주겠답시고 대단한 마법사가 왔으면 아이고, 오셨습니까…… 하고 깍듯하게 모셔도 모자랄 판에 전쟁에 참여하고 싶으면 신뢰 관계부터 형성해 달라고 요구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아주 약아빠진 놈들이었다.
‘대현자 유안은 카만의 왕족을 공격하거나 죽일 수 없다. 왕족의 생명에 위협을 주는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
이게 내가 인생에서 맺은 첫 마법 계약의 내용이었다.
정말 치밀하고 약아빠진 새끼들이다. 어린애들을 위해서 전쟁해 주겠다는 인간 데리고 자기들한테 유리한 계약이나 맺으려고 하다니.
카만의 윗대가리들은 그 시절부터 전부 쓰레기 같았다. 전쟁 통에도 자기들끼리는 호의호식해서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던 얼굴을 계약 전에 주먹으로 몇 대 때려나 봤어야 하는데.
마녀가 축복과 저주를 걸 수 있는 존재라면 마법사는 마법 계약을 실행할 수 있는 존재였다.
마법사는 마법 계약의 수식을 풀어 마법진을 그리고, 상대와 원하는 계약 내용을 협의한다.
마법진 위로 계약 당사자들이 손을 올리기만 하면 계약은 쉽게 성립된다. 과연 마녀보다 약하지만, 가성비는 좋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마법 계약은 별다른 실행 조건이 없고, 한쪽에서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시 예측 불가능한 페널티를 입는다는 점 때문에 마법사를 고용하거나 동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수요가 있었다.
막상 마법사들은 나를 포함해서 스스로 족쇄 차는 종류의 마법 제한 계약이 많이 들어오는 탓에 좋아하지 않았지만…… 당시엔 아직 정의감 같은 게 남아 있어서, 전쟁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카만 놈들과 마법 계약을 해 줬다.
가만뒀다간 왕국 하나 말아먹는 건 둘째 치고, 대륙 전체에 시체가 범람할 것 같았다. 나는 못 죽는데 인류가 망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했다. 이종족들이랑은 쓰는 언어가 달라서, 인간 멸종하면 언어 공부 다시 해야 한단 말이야.
물론, 카만 새끼들이 전쟁 끝나자마자 다른 전쟁 벌일 줄 알았으면 절대로 저런 계약은 안 해 줬을 것이다. 역시, 인간은 함부로 믿으면 안 된다.
카만 놈들이 한 번 이러고 나니, 전쟁이 끝나자 온갖 곳에서 마법 계약을 내세우며 용병으로 일해 달라고 나를 찾아왔다.
전부 도둑놈 심보를 가진 새끼들이었다. 약소국이기만 하면 내가 다 도와줄 줄 알았는지, 노약자나 어린애들을 내세워서 감성팔이 하는 놈들도 잔뜩이었다. 인류애가 싹 사라지는 경험을 그 당시에 아주 벼락치기 하듯 몰아서 했다.
이런 문제가 반복되고 나서는 자선 사업을 완전히 그만뒀다. 기껏 전쟁 통에서 구해 준 어린애들은 시간이 지나 정신 차려 보면 타성에 젖은 어른이 되어 내게 다시 도움의 손길을 요구했다.
그때 도와주셨던 그 어린애인데요, 잘 자라서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료가 되었습니다만…… 옆 나라 정복하고 싶은데, 선전 포고하면 혹시 도와주실 생각 있으세요? 다시 생각해도 전부 배은망덕한 놈들이다.
그러다 보니 300살이 넘었을 쯤에는 그냥 인간 자체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어디 틀어박혀서 마법 연구나 하면서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조차도 몇십 년 정도 하다 보니까, 다 그 나물에 그 밥 같아서 지겨워졌지만.
요점은 이거다.
나도 근본은 인간이지만 인간은 참 별로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