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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4화 (4/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4화

    마녀의 축복이나 저주가 완벽하게 성립되기 위해선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 마녀가 대상의 이름을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나는 이 세계에서 성 없이 유안이라고 불렸지만, 예카리나는 내게 통용어를 알려 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 이름이 한유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둘, 마녀와 대상이 물리적으로 접촉한 상태여야 한다. 손을 붙잡거나, 최소한 손끝이라도 닿아 있어야만 축복이나 저주가 실현된다.

    셋, 마녀가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축복이나 저주여야 한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불로불사를 선사하는 건 아무리 오래 산 마녀라도 불가능하다. 마녀 본인이 축복이나 저주로부터 오는 반동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마녀는 누군가를 축복하거나 저주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누군가를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마녀의 수는 극히 드물다. 일반인들이 마법사와 달리, 마법 이외의 능력을 가진 강력한 마녀들을 배척하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 어차피 실현되는 경우가 없다시피 하니까.

    ‘그딴 축복 필요 없어요. 나는 무병단수가 목표고, 한창일 때 죽을 거니까. 불로불사 같은 건 진시황 같은 놈들이나 바라는 거지…….’

    ‘유안.’

    ‘날 살려 줬다고…… 황비님이 내 스승이라고 해서 날 죽지 못하게 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에요. 알겠어요?’

    ‘내 아이들을 네게 부탁하고 싶어서 그래.’

    나는 어린 시절부터 계산적이고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영생을 꿈꿔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학창 시절에도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스위스 비행기를 탄 다음 내가 바라는 시점에 안락사당하기를 원했지, 늙지도 죽지도 못하는 채로 평생 살기를 원한 적은 없다. 난 진시황이 될 재목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카리나의 마지막 축복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자기 애를 나한테 맡긴다는데 어떻게 매정하게 싫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시 예카리나의 핏줄은 두 명밖에 없었고, 둘 다 딸이었으니 내내 황궁에서 지내다간 틀림없이 예카리나처럼 병들어 죽을 게 분명했다.

    또라이 황제 새끼는 예카리나와 제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을 어떻게 구워삶아 예카리나처럼 효율적인 마녀로 써먹을 수 있을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참수가 뭐냐, 한국인의 정을 담아 섭섭하지 않게 성문에 효시해 버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대현자 칭호를 받기도 전이었고, 마법 능력도 지금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천재가 아니라 수재니까. 예열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금의 나라면 그냥 낙뢰 수십 번 내리쳐서 정권을 바꿔 버릴 수 있지만,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목숨 걸고 황제를 속여 예카리나의 두 딸이 독립적인 마녀로 자랄 수 있도록 황궁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밖에 없었다.

    ‘당신은 정말 최악의 마녀예요, 예카리나.’

    ‘하지만, 최고의 마녀기도 하지?’

    ‘……재수 없어.’

    ‘내 아이들이 황제로 자라게 되면, 그때는 너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야.’

    ‘이건 계약인가요?’

    ‘아니. 이건 널 위한 축복이란다.’

    축복은 개뿔.

    영생 저주겠지.

    원래라면 절대 성립될 수 없는 영생 저주가 기막히게 실행된 이유를 300년 정도 고민해 봤는데, 아무래도 모르겠다.

    제 딸들을 어떻게든 독립적인 마녀로서 살게 하려는 예카리나의 의지가 빛을 발한 것 같기도 하고, 예카리나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던 어린 내 마음이 마녀의 저주에 영향을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예카리나는 강력한 마녀긴 했지만, 또라이 황제를 위해 마법을 너무 남용한 탓에 죽기 직전에는 아주 쇠약해진 상태였다.

    전설과 동화 속에 나오는 마녀들이나 쓸 수 있는 불로불사의 축복을, 병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마녀가 성공하다니.

    역시 인생은 까 보지 않으면 모른다. 죽음 직전의 축복이나 저주가 특별하긴 하지만, 이런 개사기 같은 축복이 통할 줄은 예카리나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죽어서 이 세계에 왔는데, 여기서 못 죽는 기이한 운명에 처하게 됐다.

    영생 축복을 할 능력으로 자기나 살리지. 예카리나는 정말 미련한 마녀다.

    죽지 않는 몸이 된 이후로 나는 약 50년 동안 예카리나를 위해 살았다. 그녀의 딸들이 무사히 어엿한 마녀로 자랄 수 있도록 무던히도 노력했다.

    내 노력이 무색하게 예카리나의 두 딸 중 한 명은 결국 다시 평범한 인간과 결혼했지만, 다른 한 명은 그럭저럭 잘 독립해 멋진 마녀로 살다 죽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두 딸 모두 로베인 제국의 황제가 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 둘이 원하기만 했더라면 내가 직접 황제의 목이라도 따 줬을 텐데.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둘 다 이상한 것에나 관심이 있고 황위 따위엔 일절 흥미가 없었다.

    심지어 이후 예카리나의 손녀도, 예카리나의 증손녀도…… 예카리나의 아주 아주 머나먼 후손들도 황위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전부 인간 사회에 섞여 살게 되는 순간 병드는 마녀였으니까.

    기막히게 딸들만 태어나는 것도 놀라웠다. 그중에서 꼭 한두 명은 평범한 인간이랑 사랑에 빠져서 후손을 남기고 죽는 것도 놀라웠고. 그 누구도 황제가 될 생각은 없어서 내가 이 나이 먹고까지 살아 있는 게 제일 신기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아주 오랫동안 예카리나를 그리워했다. 그 이후 100년은 예카리나를 다시 살려 내 도로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원망했고, 남은 200년 정도는 완전히 잊고 살았다.

    마녀, 예카리나. 그리고 그의…… 드디어 황위에 관심 있을 만한 생물학적 남자 (일단은 웬만해서 마녀가 될 수 없는) 후손.

    400년을 돌고 돌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문장이 있었다. <이르커스의 서> 1권 초반, 주인공 관련 서술에서 정말 딱 한 줄 나왔던 그 내용.

    <이르커스의 서> 주인공인 이르커스 로베인은 ‘마녀의 후손’이다.

    이걸 이제야 기억해 내는 내가 챔피언이다. 이래서 수재는 안 된다니까.

    ????????????

    “침입자는 어디에 있지?”

    [네 아틀리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밖으로 나가서 정면을 봤을 때, 동쪽으로 스물아홉 걸음.]

    “가만히 두면 죽을 것 같아?”

    [아니. 데인이 고생 중인 걸 보면 혼자 둬도 잘 살아서 나갈 것 같긴 해.]

    “역시 혈통은 못 속여.”

    오랜만에 로브를 찾아 뒤집어썼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은 로베인 제국에서 4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불길함의 상징이었다. 인간이 마법도 쓰는 세상에 고작 눈 색과 머리 색으로 사람을 구별 짓다니. 참으로 편협한 놈들이다.

    “그 애, 금발이지?”

    [어떻게 알았어?]

    “원래 판타지 세계 주인공은 보통 흑발 아니면 금발이거든. 드물게 빨간 머리거나.”

    길버트는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넘겼다. 나무 정령에게도 귀가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주인공’이라는 어휘 선택에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다.

    보나 마나 또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넘겼을 게 분명했다. 나무 정령이랍시고 옆에 둬 봐야 이렇게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다.

    예카리나의 딸들이 황위에 일말의 관심도 없었던 탓에 나는 지금까지 다른 방법으로 죽어 보겠다고 온갖 인간들부터 시작해서 이종족까지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좀 특이하다 싶은 존재를 만나면 나 좀 죽여 보라고 꼬박꼬박 부탁도 했다. 내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들 높은 확률로 나보다 먼저 죽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나 좀 죽여 보겠니?’ 하고 부탁했던 드래곤이 그나마 나와 동년배였는데, 자던 중에 스무 살 겨우 넘긴 드래곤 슬레이어한테 칼 맞아서 죽었다.

    솔직히 그 드래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너무 억울했다. 뭐야, 쟤도 죽는데 왜 나는 못 죽어? 드래곤은 드래곤 슬레이어도 있는데, 왜 대현자 슬레이어는 없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불공평하고 억울한 처사였다.

    지난 세월 동안 어떻게 하면 곱게 죽었다고 소문이 날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언젠가 마녀가 아닌 예카리나의 후손이 태어나면…… 그놈 손에 죽자.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예카리나의 딸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금사빠 기질을 탑재하고 있어, 자매 중 한두 명은 꼭 후손을 남겼다.

    이렇게 애들이 태어나다 보면 한 명 정도는 황제를 꿈꾸는 애도 있겠지! 그럼 잽싸게 황제로 만들어 주고, 그 김에 나 좀 죽여 달라고 하자!

    아주 대책 없는 사망 계획이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 저거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예카리나의 딸들이 자라자마자 나 좀 죽여 보라고 이백 번도 넘게 부탁했는데, 나는 죽질 않았다. 억지로 황제 자리에 앉혀 보려고도 했지만, 예카리나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내 부탁을 다 거절했다.

    거절 이유도 아주 각양각색이었다. 황제가 되면 적국의 왕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금사빠적 이유부터 시작해서 ‘마녀인데 내가 왜 인간이랑 섞여 살아야 해?’라는, 당연하지만 다소 편향적인 이유까지……. 다들 고집스러운 마녀라서 황제 자리를 강요하기도 더럽게 어려웠다.

    예카리나의 후손에게 모질게 굴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다들 조지게 내 말을 안 들었다.

    강제로 앉히자니 예카리나가 생각나서 차마 그러진 못하겠고, 부탁도 안 통하고, 설득도 안 된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 정도로 권력에 일절 관심 없는 마녀들을 보고 있자니 이거야말로 불가의 무소유 정신이구나 싶었다.

    내 선조랑 한 계약이 나랑 무슨 상관? 이게 마녀들의 기본 태도였다. 예카리나의 후손 중 한 명은 황제가 되면 인류를 전멸시킬 거라고 해서 그냥 내가 하지 말라고까지 했다. 덕분에 내 정신만 갈수록 피폐해졌다.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야 이 미쳐 돌아가는 영생을 견딜 텐데. 정신은 소모재라 끝이 없는 인생에 닳고 닳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몰라. 일단 생각이라는 걸 하지 말고 틀어박혀서 잠이나 처자다가 세대가 바뀌어 황제 할 놈이 나타나면 그때 일어나자.

    이것도 안 되면, 그냥 영생을 받아들이자. 천 살쯤 살면 나도 획기적인 자살 방법이 떠오르겠지…… 라고 생각했던 게 이르커스를 만나기 5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세계의 주인공 이르커스가 내 400살 생일 선물로 포장 리본 하나 매지 않고 남쪽 숲에 굴러들어 온 것이다.

    예카리나의 후손이자 이 세계의 주인공이니만큼 어떻게든 황제가 될 놈이…… 날 죽이러 와요! 하고 고래고래 소리치지도 않았는데 넝쿨째 굴러들어 왔다.

    이 세계에서 제일 오래 사는 생물인 드래곤도 보통 500살 먹기 전엔 죽는데, 나도 500살 되기 전엔 죽여 주려고 이 세계가 노력한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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