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3화
<이르커스의 서> 세계관에 떨어진 이후, 나는 애타게 주인공 이르커스를 찾았다. 내가 알 법한 인물이 소설 주인공인 그놈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악역으로 나오는 라…… 뭐시기의 존재도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악역보다는 주인공이 찾기 더 쉬울 것 같았다. 죽여주는 미소년이라잖아. 눈에 딱 들어오겠지.
그런데 못 찾았다.
‘이르커스’라는 이름을 가진 죽여주는 미소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지구나 이 세계나 미소년은 희귀종이었다.
당시의 나는 소설 속에 떨어졌어도 <이르커스의 서> 작중 시점에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보다 한참 전으로 떨어졌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현대 한국으로 치환해서 설명하자면 21세기로 올 줄 알았는데 17세기로 기어들어 온 것이다.
주인공 설정이나 간신히 기억하는 마당에 작중 연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세계사 시험 본다고 외웠던 쿠바 미사일 위기가 1962년에 터졌다는 건 지금도 기억하지만, 판타지 소설 단골 첫 문장인 제국력 몇 년 같은 소리를 단번에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 숫자를 진지하게 읽는 놈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된단 말인가.
말은 안 통하는데 검은 머리 검은 눈은 불길한 취급 받고, 간신히 1권 읽은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은 약 4세기쯤 지나야 나온단다.
실화인가? 누가 나를 여기에 빙의를 시켰는지는 몰라도 진짜 상도덕 없는 새끼다. 윤리와 사상 기출 문제를 풀게 시키면 9등급 나올 게 분명했다.
나는 결국 주인공을 찾지 못한 채 황비, 예카리나의 애완 인간으로 몇 년을 허비했다.
노예치곤 보람찬 생활이긴 했다. 고3이나 노예나 별로 다를 건 없었다. 하는 게 공부가 아니라 잡일이라는 것만 좀 다르지,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와 체력 다할 때까지 노동해야 한다는 점에선 똑같았다.
고등학교 3학년은 이세계에 오면 깽판 치고 다닐 수 있다고 했는데……. 역시 다 옛말이다.
‘난 유안, 네가 희소성 있는 미인이라서 좋아.’
‘황비님은 미인이기만 하면 아무나 다 좋아하잖아요.’
‘싸가지 없는 것까지 너무 내 취향이야. 다윈보다 유안, 너를 먼저 만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널 황제로 만들어 줬을지 누가 아니?’
황비, 예카리나는……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금사빠에 얼빠 기질이 다분한 마녀였다. 마녀가 아니었으면 어디 가서 사기당하는 바람에 훨씬 일찍 요절했을 거다.
한 제국의 황비에게 하기는 뭐한 말이지만, 푼수도 이런 푼수가 없었다. 금발 미남인 황제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려는 이유가 그냥 그놈이 잘생긴 데다 성격 취향에 맞게 싸가지도 없어서, 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취향이기만 하면 다 퍼 줘도 돼? 예카리나에 대한 내 첫인상은 ‘덕질도 저 정도면 중증인 호구’였다.
심지어 예카리나 정도 되는 강력한 마녀가 제 발로 인간 하나 도와주겠답시고 인간 사회에 개별적으로 간섭하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세계관 파워 밸런스 조정의 여파인지, 마녀에게는 마법사에 비해 너무 많은 제약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황제와 무슨 대단한 계약이나 거래가 오고 간 것도 아니고, 오로지 ‘사랑’ 때문에 예카리나는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한 마녀였다. 좋게 말하면 세기의 로맨티시스트고, 나쁘게 말하면 세기의 낭만 또라이였다.
<이르커스의 서>에서 마녀는 마법사보다 월등하게 강한 존재로 나온다. 마법사는 정식으로 마법을 배우고 스승으로부터 교육을 받아야 마법을 구사할 수 있지만, 마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마법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녀는 보통 인간에 비해 빨리 자라고, 쉽게 늙지 않았다. 인간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엘프나 드워프도 아니고, 드래곤도 아니고, 정령도 아니다. 마녀들은 아주 오랫동안 인간인 동시에 인간이 아닌 이질적인 존재로 그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러니 세계관 파워 밸런스 조정을 위해 마녀의 개체 수는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사람들이 마녀를 일부러 사냥하거나 배척하는 게 아닌 데도 그랬다.
바다 상어가 민물에서 살 수 없듯이, 마녀들은 평범한 인간들과 섞여 살면 높은 확률로 병에 걸렸다.
이 세계에 마녀 같은 강력한 개체들이 쉬이 간섭할 수 없게끔 작가가 손을 써 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법사에 비해 마녀가 강하긴 하지만, 효율이 떨어진다는 소리가 괜히 나왔을 리가 없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강하고, 축복과 저주에 모두 능하지만 같은 마녀가 아닌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 병들어 죽는다.
‘마녀’라는 명칭에서부터 알 수 있겠지만,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이상 후손이라고 해도 마녀가 될 수는 없다. 마녀는 현대 한국인의 입장에서 설명해 보자면 멸종 위기의 흰 반달가슴곰 같은 거였다.
또라이 황제는 그런 마녀를 제 미모 하나로 사로잡아 로베인 제국을 손에 넣었다.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볼 일이다.
‘다윈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말이야, 얼마나 눈빛이 싸가지가 없던지……. 나한테 냅다 야! 거기 마녀! 라고 부르는데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 거 있지.’
‘취향 진짜 나쁘네요.’
‘존중해 줘. 원래 사랑은 그런 거야. 남들은 다 미쳤다고 하지만, 나만 좋으면 되는 거. 그래도 난 운 좋은 마녀란다. 목숨 바쳐 사랑할 사람을 찾은 거잖니?’
마녀 예카리나는 황제의 잘생긴 얼굴이 정말 취향이라고 했다. 특히 그 농익은 꿀 같은 밝은 금발 머리가 끝내주게 좋다고 그랬다.
얼굴 보고 접근했더니, 심지어 그 황제는 성격도 예카리나의 취향대로 개또라이였다. 취향이 더럽고, 사랑을 동경했던 마녀는 그렇게 또라이 황제에게 홀딱 반해 버렸다.
예카리나는 제가 반한 상대가 원하는 대로 세계의 규율을 잔뜩 어겨 가며 제국의 황제를 바꿨다. 역사 공부하는 놈들이 분명 예카리나를 조금은 욕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라이 황제는 자신에게 굴러들어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기한테 반한 마녀를 놔주지 않고 황비로 앉힌 것이다. 그러고는 온갖 곳에 다 가져다 썼다.
마법으로 이것 좀 지어 줘, 국고 좀 채워 줘, 쟤 좀 죽여 줘, 전쟁에 참전해 줄 수 있지…… 등등.
마녀는 강하고 아름답지만 신은 아니다. 정도를 넘어선 능력 남용은 언제나 부작용을 부르기 마련이었다.
내가 보기에 황제 놈은 예카리나를 연인으로서 사랑하지 않았다. 중소기업 만년 과장이 제 옆에 끼고 저 대신 일 시키는 대리를 아끼듯이, 소중히 대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예카리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이 빌어먹을 사랑에 지치고 우울해진 예카리나에게 황제가 하사한 게 바로 나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더라, 예카리나! 불길하긴 하지만, 보기 힘든 검은색 보고 화 풀어. 황제가 보내는 메시지는 이거였다. 빨리 화 풀고 국정 운영 좀 마법으로 도와줘! 아주 개새끼였다. 역시 내가 나서서 참수를 시켰어야 하는데.
왜 멀쩡한 사람들은 종종 저런 개새끼에게 끌리는 걸까?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현대 한국에서도 수 세기 동안 해결되지 않은 의문점이다.
뭐, 결과적으로는 해피 엔딩이었다. 예카리나는 황제에게 나를 선물 받고 정말 기분이 풀렸으니까. 내가 워낙 귀여워야지.
‘내가 죽기 전에 너도 마법사가 되는 게 어떻겠니? 내가 네 스승이 되어 줄 테니.’
‘이 세계는 노예도 마법사 시켜 주나요? 이야, 편견 없네.’
‘아차, 너 노예였지.’
‘자꾸 까먹지 마세요, 황비님. 황비가 어떻게 노예의 스승이 되나요? 이 미친 신분제 사회에서…….’
‘네가 너무 당당해서 가끔 네가 노예라는 걸 까먹어. 그래도 못할 게 뭐니? 이 미친 신분제 사회에서 내가 황비인데.’
예카리나는 나사 하나가 반쯤 풀려 있긴 했어도 근본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따지자면 나에겐 은인 같은 존재였다. 예카리나가 아니었으면 안 그래도 하드 모드인 이세계 생활이 크레이지 모드로 발전했을 테니까.
말이 애완 인간이지, 따지자면 말도 안 통하는 노예 신분이었던 내게 예카리나는 기꺼이 호의를 베풀어 줬다.
호의의 이유는 터무니없었다. 내가 나름…… 이 판타지 소설 세계에서도 잘 먹히는 귀여운 인상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역시 얼굴만 보고 또라이 황제를 도와준 황비다운 면모였다.
빙의자인 내 입장에서는 아주 땡큐였다. 루키즘에 절어진 발언이지만, 역시 사람은 시각적인 것에 약해서 어느 정도 잘생기고 예쁘게 생기면 나처럼 이상한 세계에 홀몸으로 떨어져도 목숨이 자동 연장되는 것이다.
예카리나는 내게 대륙 통용어부터 고어까지 직접 가르쳐 주고, 마법사가 될 수 있도록 스승의 역할을 자처했다.
마법 수식은 입시 수학이랑 결이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너무 재밌었다. 입시 공부? 개껌이다. 몸 쓰는 것보다 머리 쓰는 게 200배는 쉽다.
마녀는 모두 이과로 타고나는 거고, 마법사는 공부해서 이과가 되는 놈인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법에 관한 어색함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부는 역시 모든 걸 해결해 준다.
내가 이 세계에서 지낸 긴 세월 동안 진심으로 의지할 수 있었던 인간은 예카리나가 유일했다.
당시 내 신분이 노예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예카리나를 제외하곤 모두가 나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렸기 때문이었다. 현대 한국에서도 못 가 본 군대를 판타지 소설에서 이딴 식으로 체험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원래 좋은 사람은 단명한다. 이건 거의 모든 세계에서 통하는 공식이다.
마녀는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긴 시간을 살지만, 불사는 아니다. 게다가 요구 많은 황제 덕분에 사람들이 득시글대는 황궁에서 몇 해나 마법 능력을 남용한 예카리나의 몸은 이미 잔뜩 축난 상태였다. 마녀 주제에 새치가 났다. 그 예쁜 얼굴에 주름도 지더라. 역시 그 황제 새끼를 내가 나서서 참수시켰어야 했다.
결국 예카리나는 내가 애완 인간으로 들어온 지 몇 년 되지 않아 병들어 죽었다. 돌이켜 생각해 봐도 안타까운 일이다. 어쩌다 저런 또라이 황제를 사랑하게 돼서 마녀 생을 이렇게 조진단 말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널 축복해 줄게.’
‘됐어요.’
‘튕기지 말고 줄 때 받으렴. 넌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똑똑하고 잠재력 있는 아이야.’
‘저도 제가 수재인 건 알아요.’
‘재수 없긴.’
‘축복이고 뭐고 그냥 자기 몸이나 챙기라고요. 황비님 곧 죽어요. 아시면서.’
나는 내게 호의를 베풀어 준 예카리나를 좀 좋아했다. 연애적인 의미로 말고, 인간적으로 말이다.
예카리나가 없었으면 난 대륙 공용어를 배우기도 전에 뒈졌을 것이다. 내 상황은 갑자기 사자 우리에 던져진 햄스터와 비슷했다. 언제 죽어도 놀랍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런데 예카리나가 날 사자 우리에서 건져 금이야 옥이야 길러 준 것이다.
내게 있어 예카리나는 은인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예카리나가 바라는 것 중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이뤄 주고 싶었다.
진지하게 임종을 지키러 오지도 않는 또라이 황제를 예카리나를 대신해 죽일 생각도 했었다. 난 원래 역모와 탄핵의 민족, 한국인이다. 예카리나가 딱 그 은혜도 모르는 황제 새끼 좀 죽여 줘…… 라고 한마디만 했어도 몇 년이 걸리든 구체적으로 혁명을 준비했을 터였다.
‘알아. 난 곧 죽게 될 거야.’
‘…….’
‘그러니까 넌 죽으면 안 돼, 유안.’
하지만 예카리나가 내게 남긴 유언은 그 새끼 죽여서 나랑 같이 순장시켜 줘, 가 아니라 너는 죽으면 안 돼,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