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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2화 (2/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2화

    책 빙의와 이세계 트립에는 상도덕이 세 가지 있다.

    1. 언어는 배운 적 없어도 통하게 해 준다.

    2. 한국인의 검은 머리 검은 눈을 핍박하지 않는다.

    3. 적어도 아는 등장인물 하나는 빙의하자마자 나오게 해 준다.

    누가 나를 <이르커스의 서>에 빙의시켰는지 몰라도 정말 상도덕 따윈 없는 놈이다. 저 세 가지 상도덕이 골고루 없기도 힘든데, 참 공평하게도 다 없었다.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지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이 <이르커스의 서> 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처음엔 빙의인지 차원 이동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아무리 21세기 사람이라도 판타지 소설이랑 친했던 편이 아니었으니, 용어 구분을 제대로 못 한 것도 있었다.

    빙의라면 남의 몸에 들어가는 건데 나는 한유안 본체 그대로였고, 차원 이동이라고 하기엔 1권밖에 안 읽었긴 하지만 이곳이 <이르커스의 서>에 적힌 세계의 모습과 지나치게 유사했다. 빙의인지 차원 이동인지 이세계 트립인지 구분하는 건 여기 떨어진 지 한 사흘 만에 그만뒀다.

    그 시절 판타지 소설답게 내가 떨어진 이펜하임 대륙 하늘에는 달이 세 개나 떠 있었다.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려고 해 봐도, 지구에서 달이 세 개 뜬 하늘을 관측할 수 있는 동네는 없다. 나는 수재였으므로 트럭에 치인 뒤 눈뜬 곳이 현대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받아들였다. 안 받아들이면 어쩌겠는가? 눈앞에 달이 세 개 떠 있는데.

    물론, 여기가 <이르커스의 서> 속이라는 걸 눈치챈 뒤에도 나는 엄청나게 당황했다.

    수능 보러 가던 길이었기 때문에 교복 차림으로 난데없이 황궁 정원 가운데 위치한 호수에 처박혔는데, 안 당황하는 놈이 있다면 그놈이야말로 비범한 놈이다.

    400살이 한참 넘은 지금이라면 아…… 노인 공경 모르냐? 곱게 떨어트려라…… 하고 하늘을 향해 중지라도 들어 보였을 테지만, 19살의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가득한 인문계 남중 남고에서 인생의 3분의 1을 버렸는데, 이 세계 사람들은 말 안 통하는 건 둘째치고 머리와 눈 색이 너무 오색찬란했다.

    저렇게 다채로운 컬러를 보유하며 살아가다가 수수하기 짝이 없는 검은 머리를 보니까 당연히 놀라지. 말도 안 통하는 마당에 황궁 정원 한가운데 떨어진 나는 바로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그때는 날 왜 잡아가는지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황궁 무단 침입이었으니 잡혀갈 만했다. 그래.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지면 아무래도 체포하고 봐야지.

    <이르커스의 서>에 빙의한 지 하루도 안 돼서 황제 앞에 끌려갔던 기억은 다른 기억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생하다. 그 당시 내 심정이 어땠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속으로 쌍욕을 했다는 건 확실했다.

    남들은 읽다 만 소설 빙의하면 호의호식하면서 성인으로 떠받들어지고 그러던데. 수능 당일 트럭에 치였을 때부터 내 운수가 더럽다는 걸 알아봤어야 했다.

    누가 봐도 폭군처럼 생긴 황제 앞에 끌려간 내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주어졌다.

    1. 황궁 무단 침입죄로 깔끔하게 사형당하기.

    2.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타고난 희소성 있는 애완 인간으로서 요즘 우울한 황비, 예카리나를 기쁘게 해 주기.

    말이 선택권이지, 햄릿도 울고 갈 사느냐 죽느냐의 갈등에 불과했다.

    그냥 여기서 뒈질래, 아니면 내 황비 좀 달래 주다 뒈질래?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수능 수학 마지막 주관식 단답형 문제보다 까다롭다.

    금발 머리의 황제는 죽여주는 미남이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이미 연산군을 공부했었던 나로서는 저 잘생긴 황제가 또라이 새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연산군이 아닌데, 무척이나 연산군 같아. 가장 한국적인 것이 역시 제일 이세계적인 것이다. 연산군의 현신 같은 또라이 황제는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선택권을 내밀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지? 상태였기 때문에 대충 2번을 골랐다. 1번은 오답일 확률이 높으니까.

    그 결과 죽지는 않았는데, 목에 목줄을 찬 채로 황비의 애완 인간으로 전락했다.

    이세계로 트립한 고3은 원래 깡패여야 하는 건데……. 난 시작부터 노예였다.

    ????????????

    [유안. 사람이 찾아왔어.]

    “하…… 또 어떤 새끼니.”

    [또라니……. 전에 제자로 받아 달라고 난리 치던 마법사 이후로 누가 찾아온 건 5년 만인걸.]

    “5년밖에 안 된 거겠지. 숲에는 어떻게 들어왔대? 보통 사람이면 못 들어올 텐데.”

    [입구 결계를 뚫었어.]

    “마법으로?”

    [아니. 마나 보유량은 엄청나지만, 아직 제대로 된 마법사는 아니야. 본능적으로 마법을 사용하긴 사용한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떡갈나무긴 하지만 그냥 나무는 아니야, 같은 개소리니?”

    복구 마법으로 침대를 새것으로 만든 뒤 다시 잠들려고 했는데. 눕자마자 떡갈나무 정령, 길버트가 침입 신호를 보내왔다.

    인간이 이래서 빨리 뒈져야 귀찮은 게 없다. 사람이 100년만 살아도 인생에 적이 조지게 많아지는데, 400년을 사니까 진짜 적이 두 손으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아졌다.

    저 별로 도움 안 되는 떡갈나무 정령 놈은 그게 내 나이 때문이 아니라 내 성격 탓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타고난 수명이 몇백 년인 이종족들은 대개 남들한테 꼭 칼 맞아서 죽었다. 드래곤만 봐도 그랬다. 맨날 드래곤 슬레이어가 와서 비겁하게 레어 안에 처박혀 잘 자던 드래곤 목 치고 그러잖아.

    [침입자는 어린애야. 인간 나이로 열두 살 정도 돼 보이네.]

    “부모가 버리고 갔나?”

    [그건 잘 모르겠어. 애를 제외하곤 다른 인기척은 없거든.]

    “그럼 그냥 둬. 한 열흘 헤매면 알아서 출구 찾아 나가든가, 여기서 굶어 죽든가 하겠지.”

    열아홉 살의 나라면 기꺼이 뛰어나가 미아보호소를 찾아 줬겠지만, 나는 무려 400살이었다. 백 살 넘은 노인에게도 새파랗게 어린놈이……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대―꼰대 상태인데 열두 살짜리 어린애? 감당 불가였다.

    애초에 내가 틀어박힌 남쪽 숲은 평범한 어린애가 접근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숲 이름도 별다른 명칭 없이 그냥 ‘남쪽 숲’. 로베인 제국과 카만 왕국의 경계선 노릇을 하고 있는 이 숲은 고집 세고 인간을 배척하는 나무 정령의 군락지다.

    길버트를 비롯한 나무 정령들은 대부분 인간을 싫어했다. 그냥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혐오했다.

    대부분의 이종족들이 인간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나무 정령들은 그중에서도 아주 유별나게 인간을 경계했다. 하긴 나 같아도 허구한 날 나무 베고, 숲 황폐하게 만들고, 맨날 불 지르는 놈들이면 싫기는 할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나무 정령들이 살짝 괴팍하긴 해도, ‘인간 박멸! 인류 멸종!’을 외칠 만큼 대단히 호전적이진 않다는 것이다.

    나무 정령들은 침입자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그들끼리 합심해 숲을 미로처럼 만들어 굶겨 죽이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냥 죽이는 것보다 그렇게 해야 시체에서 양분이라도 많이 얻는다나.

    물푸레나무 정령인 데인 말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존재 자체가 민폐라고 그랬다. 나도 인간이지만 그건 맞는 소리였다.

    다른 나무들에 비해 천성이 온화한 편인 길버트 역시 내가 귀찮아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남쪽 숲에 흘러들어 온 수많은 떨거지를 온갖 방법을 써서 내쫓는 데 일조했다.

    인간들도 벌목을 그렇게 해 댔으니 양심은 있는지, 수 세기 동안 남쪽 숲이 자기들 소유라고 머리채 잡고 싸우긴 했어도 숲을 가로질러 통행하지는 않았다. 다들 운 나쁘게 숲에 발을 들였다가 객사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부모나 보호자도 없이 어린애가 혼자 남쪽 숲에 들어왔다? 내가 쳐 둔 결계까지 싹 뚫고서? 알고 들어왔든 모르고 들어왔든 숲 한가운데서 객사하기 딱 좋았다.

    그러니 나는 이 객사 희망자를 그냥 무시하려고 했다. 알아서 죽겠다는데 어떡해.

    내가 죽이는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기어들어 와서 알아서 죽는 건데 내가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 잠이나 더 자고, 중간에 깨면 길버트와 둘이서 단출하게 400살 생일 기념으로 오랜만의 도시 나들이나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평소라면 그래, 저런 허접한 침입자는 신경도 쓰지 마, 라고 했을 길버트의 반응이 이상했다.

    길버트는 사려 깊은 떡갈나무긴 해도 별수 없는 나무 정령인지라 인간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숲에 들어온 인간이 누구든, 굳이 살려서 데려와야 한다는 소리를 하진 않는단 뜻이다.

    [유안, 저 애는 아무래도……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도와주자고?”

    나무 정령이 숲에 들어온 인간을 도와줘야 한다고 말한 적은 내가 남쪽 숲에 틀어박힌 몇십 년간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쯤부터 나는 숲에 쳐들어온 침입자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무 정령들은 인간보다 몇 배는 더 예민하니까.

    “왜? 난 자원봉사는 150년쯤 전에 지겹도록 했어.”

    [데인이 그러는데 저 애, 마녀의 후손이래.]

    데인은 이곳의 나무 정령 중에서도 젊은 축에 속했다. 또한 대체로 성정이 차분한 물푸레나무 정령답지 않게, 인간이 남쪽 숲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서 뿌리로 묶어 두거나 길부터 막는 놈이었다. 젊어서 그런 게 아니라 천성이 포악해서 그런 것 같지만…….

    어쨌든 그런 놈이 길버트한테 굳이 어린 침입자의 정체를 얘기해 준 게 이상했다. 보통은 가두고 굶겨 죽인 다음, 시체를 땅에 묻어서 숲의 양분으로 삼았다고 보고하는 게 다였으니까.

    [마녀의 후손이라는 얘기 외에는 별말이 없는데, 직접 가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세계에서 마녀나 마법사는 별로 배척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현대 사회로 치면 그냥 수학자나 과학자 같은 거라서, 평범한 사람들은 마녀와 마법사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다: 종종 재수 없긴 하지만 똑똑하고 편리하다. 가만히 놔두면 생활 마법도 개발해 주는 기발한 놈들.

    굳이 따지자면 일반인에 비해 마법사나 마녀가 희귀한 편이긴 했다. 현대 사회에서도 수학자랑 과학자 수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사람보단 마법사와 마녀가 더 많았다. 역시 한국인이 쓴 판타지 소설 세계관다웠다.

    물론 마녀는 마법사에 비해서도 희귀한 편이긴 하지만, 고작 희귀하다는 이유 하나로 그 까다롭고 호전적인 데인이 인간의 침입을 두 눈 뜨고 봐줄 리가 없었다.

    데인은 공식적으로 전 대륙에 딱 하나 있는 대현자인 나를 처음 봤을 때도 일단 죽이자고 했다. 나무 정령들이 모두 데인 같았으면 인류는 진작 멸종했을 것이다.

    “예카리나의 후손인가?”

    그러니 데인이 길버트에게 침입자의 정체를 직접 알아보러 오라고 할 정도라면 평범한 마녀의 후손이라는 뜻은 아닐 터였다. 적어도 날 애완 인간으로 길렀던 황비, 예카리나의 핏줄이거나 이 세계의 주인공쯤은 된다는 의미겠지.

    길버트의 가지가 미약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긍정의 의미였다. 지겨웠던 일상에 활력이 도는 순간이었다.

    예카리나의 후손인데 마녀가 아니야? ‘마녀가 아닌 예카리나의 후손’은 이 긴 세월 동안 처음 보는 존재였다.

    400살 생일 선물이 내 거처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신이시여, 이제 드디어 절 죽여 줄 마음이 드셨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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