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당신은 못 죽어.”
자식새끼 키워 봐야 다 소용없다더니.
역시 옛 현인들의 말은 옳다. 판타지 소설 주인공 데려다가 원래도 먼치킨인 녀석을 더 죽여 주는 먼치킨으로 키워 주고, 저놈을 위해 봉인까지 당했다 깨어났더니 12년 만에 한다는 소리가 또 저거였다.
열일곱 살에도 죽여주는 미남이었던 이르커스 사크리나 로베인은 나이를 먹더니 잘 익은 와인처럼 더 탐스러워졌다.
내가 봉인당해 있는 동안 알아서 잘 자란 이르커스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채 스무 살이 안 되었던 제자가 훌쩍 커 버려 내일모레 서른이라니. 이럴 때면 내게는 길기만 한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나는 처음에 우리가 맺은 계약과 달리, 날 못 죽여 주겠다는 배은망덕한 녀석의 아름다운 보라색 눈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마녀의 핏줄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주인공 미모 버프발인지, 매혹 마법 하나 안 걸고도 사람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네가 올해로 스물아홉이면 난 사백십칠 살이거든.”
“또 빌어먹을 나이 타령이나 하려고.”
“빌어먹을? 이 자식 이거, 나이 들더니 입만 험해졌네. 그래, 또 빌어먹을 나이 타령이다. 이쯤이면 나도 죽을 나이가 됐잖니.”
내 죽는다는 소리에 이르커스의 말끔한 눈썹 끝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어렸을 땐 저렇게 찡그리는 게 귀엽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꼴에 나이 좀 먹었다고 제법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래 봐야 나한테는 여전히 어린애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주름이 진 이르커스의 미간 사이를 엄지로 문질렀다. 사람 노화가 얼마나 빠른데 왜 자꾸 인상을 쓴담. 주인공이라고 언제까지 주름지는 걸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약속을 지켜. 우린 계약을 했다.”
“…….”
“제대로 대답 안 하는 걸 보니 역시 황제가 되었지? 제법 태가 나는구나.”
나는 이르커스의 미간을 문지르던 손을 조금 더 올려 잘 세팅된 밝은 금발을 쓰다듬었다.
한 제국의 황제라는 자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진짜인 건지, 이르커스는 제 머리 모양을 망가트리는 내 손길을 거부하긴커녕 오히려 고개를 숙여 담담히 받아들였다. 순종적인 태도와 달리 뱉는 말은 결국 똑같았지만.
“유안,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못 죽어.”
“넌 계약을 어길 수 없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내가 널 길렀고, 가르쳤으니까.”
열두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이르커스는 언제나 한결같은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애정을 갈구하는 눈, 인정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들 특유의 치기 어리고 열망으로 빛나는 시선.
어린아이의 사랑이나 동경은 괜찮다.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안 본 척해 버리면 끝이다.
그건 다행스럽게도 내가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 원하지 않아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 자란 이르커스가 여전히 내게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건 큰 문제였다.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묵은 마음이라는 건 이르커스에게나 나에게나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르커스와 내 사이에는 세기를 넘어서는 세월이 있다. 나는 불멸자고, 필멸자인 그는 언젠가 늙어 죽는다. 필멸자가 불멸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만큼 결말이 안 좋은 일도 없다.
그러니 나의 무심은 서로를 위한 일이었다. 이르커스도 당장은 내가 원망스러울 테지만, 세월이 좀 더 흐르면 내 대처를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당신이 한 번쯤은…….”
“안 돼, 더 말하지 마.”
“한 번쯤은 내 사랑에……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날 사랑한다면, 넌 날 죽여 줘야 해.”
“…….”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구나.”
417살이라…….
역시 너무 오래 살았다.
이르커스가 나를 죽여 주지 않으면 나는 또 수없는 세월 동안 나를 죽여 줄 만한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게 나타나더라도 이 세계의 주인공인 이르커스보다는 어떤 부분에서나 성공 확률이 낮을 터였다.
차라리 이럴 거면 영원히 봉인해 버리지. 죽을 수 없다면 모든 걸 기억에서 지워 낼 수 있게끔 영영 눈뜨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머리를 쓸어 주던 손을 거두자, 이르커스가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못하게 내 손목을 강한 힘으로 붙잡았다.
덩치만 커진 줄 알았더니, 손도 황제나 마법사보다는 검사의 것에 가까워져 있었다. 내가 무력하게 봉인되어 있는 동안, 꽤 고생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르커스가 잡아당기는 대로 순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정말 좋은 스승이라면 이 손을 보고 제자에게 그간 고생 많았다며 등이라도 두드려 줘야 할 텐데. 나는 그런 게 잘 안 됐다.
이르커스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서도 저 애가 나를 정말 죽여 주지 않을까 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이르커스의 유한한 삶 때문에 내가 죽고 싶어지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이 애가 죽기 전까지 살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감정에 휩쓸려 이르커스가 원하는 대로 연명한다면 나는 또 죽을 기회를 놓쳐 버린다. 늙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혼자 남아 이르커스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상상만으로 충분히 끔찍했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위치에 서자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이르커스가 어렸을 때는 내가 이 애를 안아 들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무력하게 올려다보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미안해.”
“유안, 제발…….”
“너도 알잖니. 나는 네 손에 죽기 위해 널 거둔 거야.”
혼자서 이 삶을 더 견디기에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세월은 내게 너무 많은 걸 앗아 갔다. 남은 것마저 전부 잃기 전에 죽음으로 도피하는 것만이 내 유일한 바람이었다.
대현자는…… 이만 죽고 싶다.
대현자는 죽고 싶어 1화
이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은 39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 17권짜리 장편 판타지 소설인 <이르커스의 서> 세계관에 떨어지기 전,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시점으로.
나는 한평생 판타지 소설에 관심이 없었다. 판타지 소설은 수능에 안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세계 트립물 시작이 그렇듯이, 나는 평생 관심 없었던 판타지 소설을 수능 전날 딱 한 번 들춰 봤다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만약 수능 전날 수능 국어 문학 지문이나 얌전히 읽었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수능 전날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 안 되는가?
거기엔 대략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수능 전날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 높은 확률로 트럭에 치여 빙의되기 때문에.
2. 보통 입시를 코앞에 두고 죽은 대한민국 고3은 이세계에 가면 먼치킨이 되기 때문에.
3. 그럼에도 그 먼치킨이 되기 전까지 온갖 개고생을 다 하기 때문에.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동급생 하나가 농담으로 그런 말을 했었다.
‘야, 수능 전날 판타지 소설 읽지 마라. 너 시험 보러 가다가 트럭에 치여서 그 소설에 빙의되는 수가 있어.’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 자식이야말로 예언자다. 대현자는 내가 아니라, 그놈이 됐어야 한다.
커튼을 치기 귀찮아서 내버려 뒀던 창을 타고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침 햇빛을 받은 먼지가 자기 주제도 모르고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내가 남쪽 숲에서 이르커스를 주웠던 날도 이렇게 햇볕이 쨍쨍한 맑은 날이었다.
그때의 나는 20년 정도는 잠만 처자야지! 하고 각오 아닌 각오와 함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으나, 침대에 보존 마법을 제대로 걸지 않은 탓에 등만 잔뜩 배긴 채로 5년 만에 깨어났다. 나무로 만든 침대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았기 때문이었다.
“길버트!”
무너진 침대 위에서 쌍욕을 하며 동거 떡갈나무 정령 길버트를 소리쳐 불렀던 게 내 400살 생일 아침의 첫 시작이었다.
????????????
‘독한 새끼. 수능 특강 닳겠다.’
‘9월 모의고사 만점 받는 놈들은 원래 다 저러냐?’
‘한유안, 너는 진짜…… 수능 전날 판타지 소설 같은 거 절대 읽지 마라. 너 같은 놈들이 꼭 수능 전날 트럭에 치이거든.’
‘그거 저주니? 내가 트럭에 치여 봤자 너흰 1등이 될 수 없어.’
‘공부에 미친 또라이 새끼…….’
‘나 같은 또라이가 대한민국 입시의 미래를 책임지는 거야.’
나는 수재다. 이 말을 내 입으로 하는 데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 사실이니까.
양심상 천재라곤 안 하겠다.
한 번 보면 암기하는 놈들이 널리고 널린,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나는 뭘 외우려면 적어도 세 번은 들여다봐야 했다. 그러니 며칠 밤을 새워도 멀쩡한 놈들 사이에서 하루만 못 자도 비실대는 내가 공부 머리를 타고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두뇌 연비 좋은 놈들이 널리고 널린 대한민국 입시에서 살아남기에 나의 ‘적당히 똑똑한 두뇌’는 너무 약체였다.
나보다 못하는 놈들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지만, 나보다 잘하는 놈들도 그만큼 널려 있었다. 전교권에선 놀아도 전국권에선 못 노는 게 그 반증이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똑똑한 놈들은 너무 방심을 잘한다. 타고난 기억력만 믿고 남들보다 한발 늦게 시작해도 자기가 1등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선행과 예습은 기본 중의 기본이거늘, 기본도 못 하는 놈들이 기고만장하기만 했다.
나는 천재들과 달리 후천적으로 똑똑한 새끼였기 때문에 언제나 경각심을 잃지 않았다. 중간치밖에 안 되는 두뇌 스펙이 도움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다.
덕분에 나는 교내에서 치러지는 모든 시험에서 늘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타고난 머리가 좋지 않으면 어떠한가? 그건 반복 학습과 요령 터득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한국 입시는 철학과 거리가 멀어서, 어느 정도 정해진 답과 풀이 방식이 항상 존재했다.
이해를 못 해도 잘 외우면 장땡이었다. 연비 나쁜 티코로도 벤츠 추월이 가능한 분야가 바로 대학 입시였다.
어떤 바보라도 수능 특강을 닳고 닳도록 읽어, 4단원 영어 지문 네 번째 줄이 뭔지 기억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면 모의고사 만점에 도달할 수 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될 순 없지만, 교과서가 닳도록 형광펜을 그으면 형광 그린 애호박이 될 수는 있었다.
시간과 의지만 있으면 재능 없이도 할 수 있는…… 그게 바로 대한민국 입시다. 의지가 박약하여 온갖 유흥거리에 시선을 빼앗긴 녀석들이나 입시가 운빨이라고 투덜거리는 거다.
그러니 우리 부모님부터 학교 선생님들, 심지어는 나를 질투하는 동급생들까지 내가 수능 고득점과 함께 명문대에 수월히 진학하리라 예상했다. 대학 입시를 망하기에 나는 너무 독한 고3이었으니까.
혹시 수시 납치라도 될까 봐 노리고 있는 한국 제일의 명문대 한 곳을 제외하면, 수시 원서조차 안 낸 데에는 그만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친…… 수능을 못 볼 줄이야.
한국어는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단 여기서 말하는 ‘못’의 의미는 내가 수능을 망쳤다는 게 아니라, 아예 치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나는 수능 보러 가는 날 아침,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에 치여 죽었다.
우리 부모님이 이렇게 허무하게 차에 치여 죽으라고 나를 금이야 옥이야 우리 아들은 천잰가 봐요…… 하면서 키운 게 아닐 텐데.
초중고 도합 12년을 공부하고 단 하루의 시험으로 지난 세월을 평가받으러 가는 길에 죽다니. 인생이 물건이면 이건 즉시 환불감이었다.
이렇게 뒈질 줄 알았으면 볼펜으로 허벅지를 찔러 가면서 공부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애들이 피시방 가자고 할 때 한심하게 보는 대신 끼어서 같이 놀고, 땡땡이도 한번 쳐 보고 그랬겠지.
하지만 원래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올해 수능이 물수능일지 불수능일지조차 모르는데 사람 앞날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간 내가 해 본 일탈이라곤 수능 전날, 아무 생각 없이 거실 책장에 박혀 있던 판타지 소설을 펼쳐 본 것뿐이다. 씨발…… 그러지 말걸. 이제는 먼 과거지만, 다시 돌이켜봐도 살면서 가장 잘못한 일 중 하나가 그거였다.
예언가 기질이 풍부했던 동급생이 경고까지 해 줬는데, 당시에는 열아홉 살밖에 안 돼서 너무 쉽게 허튼짓을 저질렀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해 버리고 마는 청개구리 적 심리 현상에 그대로 걸려 버린 것이다.
하지만 원래 인간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분홍색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고 하면 더욱 구체적으로 그 코끼리를 상상하는 동물이니 별수 없었다.
전자책도 아니고, 종이책으로 출간된 오래된 판타지 소설은 <이르커스의 서>라는 직관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궁서체 타이포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표지는 누가 봐도 촌스러웠고, 문체는 무슨 수능 국어 비문학 지문 같았다. 딱 우리 아버지 세대가 즐겼을 법한 판타지 소설 그 자체였다.
소설 내용은 대충 이랬다. 주인공, 이르커스 사크리나 로베인은…… 무슨 이름이 이렇게 길어?
아무튼, 이 이르커스라는 놈은 로베인 제국의 3황자인 동시에 마녀의 후손이다. 작중에서 벌어지는 온갖 궁중 암투에도 불구하고, 이르커스는 핏줄을 잘 타고났다는 이유와 주인공이라는 사실만으로 최종 생존한다. 한국 사회나 판타지 사회나 일단 혈통이 좋고 볼 일이었다.
이르커스는 그 시절 판타지 소설답게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1권부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온갖 고생을 다 하게 된다.
하지만 이놈은 마녀의 핏줄이니만큼 타고난 마나 양을 측정할 수조차 없는 태생 먼치킨이었다. 성장형도 아니다. 그냥 파워 밸런스 조절 실패로 태어난…… 패치 안 된 게임 신규 캐릭터 같은 (그리고 개발자가 좋아하는 게 틀림없는) 놈이었다.
‘보유한 마나를 측정할 수조차 없다’는 서술만 보고도 다음 내용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국어 비문학 지문 마스터인 내게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이 자식…… 마법사가 되든 마검사가 되든, 뭐가 돼도 성공하겠구나.
그러나 1권 초반부에는 이르커스가 고작 열두 살이기 때문에, 1황자이자 황태자인 라단타 어쩌고저쩌고 로베인…… 이름 진짜 왜 이렇게 길어? 아무튼, 라단타 어쩌고에게 온갖 핍박과 고문, 살해 위협을 당하다가 소중한 것을 죄다 잃고 괴팍한 나무 정령들이 득시글거리는 남쪽 숲으로 도망치게 된다.
그렇다.
1권만 봐도 견적이 나온다.
주인공이 저 1황자를 싹 씹어 먹고 황제가 될 것이다. 이르커스 어쩌고 로베인이 갖은 고생 끝에 황제 돼서, 뭐 친구도 생기고 하렘도 차리고 그러시겠지.
열두 살짜리 외모 서술이 무슨 금발 자안의 기막힌 미소년이라고 적어 놓은 것만 봐도, 앞으로 이놈은 주인공 버프를 받아 무시무시한 미남으로 자랄 게 뻔했다.
주인공이 강한 데다 미남이기까지 해? 그럼 하렘도 차리셔야지. 17권이면 로맨스도 좀 있어야 수지타산이 맞는다.
진중한 문체와 유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스토리 진행, 그리고 두 권으로 압축해서 ‘짜잔, 이르커스가 황제 됐습니다!’ 하고 완결 내도 될 이야기를 17권까지 늘렸다는 점만 제외하면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양산형 판타지 소설이었다.
1권만 읽고 책을 덮은 건, 바로 다음 날이 수능이어서라기보다는 이어질 내용이 쉽게 예측됐기 때문이다.
시시하군……. 시시하다는 영어로 frivolous……. 잠드는 와중에는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있었으니, 사실 1권 내용도 절반쯤은 휘발된 상태였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수재지 천재가 아니다. 뇌 용량이 아주 한정적이라는 소리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이르커스 뭐시기와 라단타 뭐시기의 이름이 엄청나게 길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곤 세세한 내용 따위는 대충 잊어버렸다. 판타지 소설 1권 내용보다 수학 공식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게 중요한 날이었으니까.
하지만, 수능 당일의 결말은 이거였다: 엄마가 수능 잘 보라고 말끔하게 다려 준 교복을 차려입고 시험장으로 가던 중, 신호등 파란 불에서 졸음운전 하던 화물 트럭에 치여 사망.
내가 생각해도 정말 아까운 인생이었다. 나 같은 수재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갔어야 했는데……. 나는 부패한 한국형 주입식 교육에 적합한 인재였다. S대? Y대? K대? 다 따 놓은 당상이었다고.
하지만 부정부패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던 내 인생을 아까워한 게 나뿐만은 아니었던 건지, 나는 <이르커스의 서> 세계관 속에서 눈을 떴다.
뭐야…… 이세계 트립 전에 꼭 한 번 거쳐야 한다는 조물주와의 1:1 면담은 왜 스킵 됐어?
다시 생각해 보니 억울하다. 신이라는 작자 멱살 좀 잡고, 현역으로 S대 합격할 수 있었다고 진상 짓 좀 하려고 했는데.
내가 내 미래를 사전에 알았다면 수능 전날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게 아니라, 17권짜리 판타지 소설을 밤새 독파했을 것이다.
저기요…… 이세계 고등학생 깽판물 시킬 거면 앞으로는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예고 좀 해 주세요. 이렇게 복선도 징조도 없이 떨어트리면 수능 국어 문학 지문에는 들어갈 수 없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