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회: 7권 - 삭초 제근 -->
하재혁 회장의 두 눈에 망설임이 번졌다.
‘그자에 대해 내가 직접 발설한다면 나를 적으로 돌릴 텐데…….’
하재혁 회장은 슬쩍 성진의 눈치를 살폈다.
성진이 어디까지 아는지를 살필 심산이었다.
하지만 성진은 그런 수작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만약에 제공하는 정보가 불확실하거나 뻔히 아는 걸 말하지 않는다면 협상은 없습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소.”
성진의 눈치를 살피면서 하재혁 회장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이자가 어디까지 아는지 알 수가 없으니…….’
게다가 그자는 엄연히 양지에 속하는 자신과 강후 그룹에 대해 음지에서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완전히 감춰진 자이니 후환이 어떨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그자가 어떤 자인지 알고 있소? 그자는…….”
“후환을 두려워하시는가 본데 저는 그자가 어떤 인물이든 대한민국의 공권력을 상대로 싸워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하재혁 회장의 육정철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정보를 떠올렸다.
‘하긴…… 어차피 내친걸음이 아닌가.’
결국 하재혁 회장은 모든 것을 발설하기로 결정했다.
“좋소. 내가 모든 걸 말해 주리다.”
“생각을 아주 잘하셨습니다.”
성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후후. 어차피 모든 걸 말한다 해도 당신의 죄를 온전히 용서해 주지는 않을 생각이오, 하재혁 회장.’
성진 개인에게 위해를 끼치려 한 비겁한 수작은 용서해 준다 해도, 하재혁 회장이 강후 그룹을 통해서 지은 죄는 너무도 컸다.
성진은 차후에 하재혁 회장이 지은 죄에 대해 폭로하는 것은 봐준다 해도 강후 그룹에 끼친 비리와 모든 탈세 문제를 자진 해결하게 하고, 강후 그룹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끔 만들 작정이었다.
‘어차피 선택권은 없어.’
자신뿐만 아니라 주요 임원진, 그리고 하재혁 회장의 자녀인 계열사 사장들이 모조리 감옥에 갈 수 있는 대규모 사안인지라, 하재혁 회장으로서는 망설일 여지가 없을 것이었다.
대개의 대기업 비리 수사는 증거가 불확실해 수사가 어려움을 겪지만 지금은 성진이 증거마저 확실히 틀어쥔 채 언제든 폭로를 할 수 있는 상황이니 더더욱 외통수였다.
칼자루를 성진이 쥐고 있기에 가능했다.
“그자의 나이는 아무도 정확히 모르지만…… 내 선친을 만날 때에도 중년의 모습이었다니 아마 예순은 넘었을 거 같소……. 그자는…….”
그런 성진의 속마음을 모른 채 하재혁 회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정재계를 오랫동안 암중 지배해 온 베일 속에 감춰진 실력자에 대해서.
* * *
하재혁 회장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게 된 비밀들은 충격적이었다.
‘그런 자가 이 나라에 암약하고 있었다니…….’
정체불명의 인물인 어르신은 정재계를 가리지 않고 불법, 합법적인 수단을 모두 동원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오히려 양지에서 법의 테두리를 속일지언정 벗어날 수는 없는 일반 기업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영향력이 막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추악한 힘도 이제 끝이다.’
성진이 하재혁 회장을 통해 분명하게 존재를 파악하게 된 이상 그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영화를 누릴 수 없다.
애당초 용서해 줄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심각하고 가혹한 폭력 범죄까지 벌여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꾸준히 채워 온 작자들이었다.
성진은 결단코 확실한 처단을 결심했다.
‘철저하게 응징해 줘야 한다.’
하재혁 회장이 말한 정보들을 실마리로 삼아서 성진은 철저한 사냥을 시작해야 했다.
도처에 널려 있는 그 노인이 가진 세력을 하나하나 부수려면 여유를 주어선 안 된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조리 들이닥쳐서 박살을 낼 심산이었다.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에게 지시했다.
“지금까지 준비한 걸 보여 줘.”
- 알겠습니다. 마스터.
성진의 지시에 인공지능 팔찌가 미리 준비된 데이터를 시야 앞에 출력했다.
- 먼저 합법적 사업체를 보유한 자들의 목록입니다.
인공지능 팔찌가 먼저 출력한 데이터는 비교적 합법적인 형태의 사업체를 가지고 활동하는 자들과 그 세력의 추정 구성 목록이었다.
“허어? 세금은 그래도 꼬박꼬박 냈네?”
뒤로는 추악한 짓을 저지르던 자들이 합법적 기업의 얼굴을 하고서 모범 납세 성실 기업으로 표창까지 받았다.
물론 전부를 낸 것은 아니라 상당한 탈세를 해 대었지만 표창을 받았다는 사실에 성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자들의 탈루와 탈세 혐의 내역들을 증거와 함께 국세청과 각 시도 지자체에 언제든지 전송할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준비해 두도록 해. 경찰청에도 같이.”
-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가 서류를 정리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던 성진은 휴대폰을 들었다.
통화할 번호의 주인공은 바로 대중일보의 곽정수 기자였다.
* * *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의 발표 직전, 급보 특종 정보를 과감히 게재한 대중일보는 삽시간에 네티즌들의 광클릭을 유도하면서 엄청난 화제몰이에 성공해 냈다.
다른 곳도 아닌 유력 일간지가 올린 특종 정보였음에도 글을 읽는 독자들을 비롯 네티즌들은 반신반의했다.
일본의 평소 행보를 생각하면, 갈수록 우경화되어 가는 일본 정부의 발표 내용이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직후 일본 내각 총리가 나와 직접 발표까지 해 댔으니 전 국민적인 주목을 사기에 충분했다.
“으흐흐흐. 아주 좋아. 아주 훌륭해. 이거 결과가 정말 좋아.”
대중일보 사회부 부장인 전우필은 부하 기자인 곽정수를 보면서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가지고 온 특종 덕분에 사회부의 입지는 물론 부장인 전우필 또한 편집장과 신문사 경영진들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은 상황이었다.
당연히 기사를 가져온 곽정수 기자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위에서 내려온 특별 보너스.”
전우필 부장이 내미는 봉투는 꽤나 두툼했다.
그 봉투를 본 곽정수 기자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이게 웬……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런 건 보통 통장으로 찔러 주지 않나요? 웬일로 이렇게 현금을…….”
“어! 원래는 통장에다가 꽂아 줘야 하는데 내가 특별히 현금으로 달라고 부탁했다.”
“예? 아니 왜요?”
“왜긴. 네 안사람 되시는 분께서 용돈이 박하다며? 너 틈만 나면 그거 가지고 씨부렁댔다고 하던데 딱해서 현금으로 준비했다.”
“예? 아니 그럼 이건…… 비자금을 조성하라는 센스?”
그제야 뭔가 깨달았다는 곽정수 기자를 보면서 전우필 부장은 윙크를 하며 말했다.
“뭐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래도 좋은 남편이라면 공돈을 혼자 날로 처먹어선 안 되느니라.”
“예엡! 부장님.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소신 앞으로도 계속 사회부와 전 부장님의 건승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치겠나이다.”
짐짓 감동한 체하는 곽정수 기자의 마음은 반쯤 진심이었다.
정말로 가뜩이나 용돈이 떨어져 가던 찰나였기 때문이었다.
그 모양을 보던 전우필 부장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됐다. 너한테 충성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 친구야. 대신 특종이나 좀 더 물어 와라. 너 진짜 다음에 더 제대로 된 특종을 물어 오면 말이야/ 그때는 네 기자 인생? 내가 확실하게 밀어 줘서 탄탄대로로 만든다. 더 열심히 좀 해봐.”
대놓고 특종을 요구하는 전우필 부장의 말에 곽정수 기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하…… 예에. 저도 물론 전 부장님과 사회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아하하하하.”
그러면서 곽정수 기자는 특종이 어디 쉽냐는 말을 뱉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실 기자 인생을 확실하게 밀어 준다는 말도 믿음이 안 갔다.
대중일보의 사장이 직접 곽정수 기자를 눈도장 찍었다면 모를까, 일개 부장이 곽정수의 기자 인생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당사자이자 직속 상사인 전우필 부장 앞에서 뱉는다면 대중일보 신문사를 그만두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차피 기자 커리어는 어떤 기사를 뽑아내느냐에 달려 있지.’
이번에 곽정수가 터트린 기사만 해도 본인의 커리어에 계속 붙박여서 앞날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었다.
그만큼 기자에게 있어서 보도한 기사란 곧 경력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 돌아가서 일 보도록 해요. 곽정수 기자.”
“옙. 부장님.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곽정수 기자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전우필 부장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때 곽정수 기자의 휴대폰이 요란한 진동음을 때렸다.
- 부르르르릉. 부르르르릉.
“응?”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휴대폰을 꺼내든 곽정수 기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헉! 이건…….’
휴대폰에 찍혀 있는 번호는 바로 성진의 번호였다.
곽정수 기자의 머릿속에 이미 최고의 VVIP로 낙인이 찍혀 있는 성진의 번호가 휴대폰에 찍혀 있는 것을 본 순간 곽정수 기자는 잽싸게 폰을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한성진 회장님이십니까?”
- 예 곽정수 기자님. 저입니다, 한성진.
성진의 또렷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리자 곽정수 기자는 긴장과 또 다른 기대감으로 침을 삼켰다.
‘한성진 회장이 연락해 왔다면 내가 기자로서의 역할을 하길 바랄 때뿐이겠지.’
곽정수 기자는 성진이 자신에게서 기대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것은 기자로서 익힌 감이었고 당연히 파악하고 있어야 할 역할이었다.
상부상조가 아닌 이상 성진이 자신에게 기삿거리를 계속 던져 줄 이유는 없다.
암묵적인 계약관계의 룰을 곽정수 기자는 철저하게 이행할 필요가 있었다.
“요즘 한창 바쁘실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연락 주셨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 허허. 뭐 제가 곽정수 기자님을 뵙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직접 만나 뵙고 청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일전의 일과 비슷합니다.
성진의 말에 곽정수의 머릿속 안테나가 요동을 치며 작동했다.
‘또다시 특종인가!’
곽정수 기자의 얼굴 위로 환한 흥분의 빛이 번졌다.
“가, 가겠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갈까요?”
- 가능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제 집무실로 오시죠.
성진의 대답에 곽정수 기자는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예 한 회장님! 지금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 예. 그러면 이따가 뵙겠습니다.
“예.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한 회장님.”
잠시 후 전화가 끊어지자 곽정수 기자는 재빨리 자신의 데스크로 달려가 취재 가방을 꾸린 뒤 나는 듯한 속도로 사무실을 벗어나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