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회: 7권 - 삭초 제근 -->
잠시 후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젊은 남성이 들어왔다.
젊고 냉막한 인상의 젊은 남성을 보자마자 하재혁 회장은 그가 바로 성진임을 알아보았다.
신문 지면이나 방송 화면으로만 보아 왔지만 요즈음 연달아 회자되는 화제의 신성임은 물론 자신을 골머리에 시달리게 만든 상대이기에, 하재혁 회장은 성진의 얼굴을 이미 뇌리에 철저히 심어 넣은 상태였다.
“어서 오시오 한 회장. 정식으로 인사하리다. 이 사람은 강후 그룹의 회장인 하재혁이요.”
하재혁 회장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성진에게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다.
그는 이 정도만으로도 지극히 정중한 예의를 차렸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참 젊은 연배의 상대를 향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의 수고를 보여 준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악수를 받는 성진의 인상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미간이 좁아졌다.
“하재혁 회장님? 저한테 폐를 끼친 적이 있으실 텐데 태도가 무척 당당하시군요.”
생각보다 반기지 않는 성진이었다.
아니 오히려 노골적으로 질책하려는 듯한 성진의 태도에 하재혁 회장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폐…… 라니. 이렇게 만난 초면에 그렇게나 불편한 감정부터 앞세우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소? 한성진 회장.”
하재혁 회장 또한 인간인지라 몹시 찔리기는 했으나 초반부터 꿀리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초반부터 접고 들어갈 작정이었으면 애당초 이런 자리는 만들지도 않았다.’
그 나름은 절묘한 시점에 자신이 최대한 잇속을 차릴 만한 협상 타이밍이라 생각하여 성진과의 만남을 제안한 것이었다.
상당한 계산하에 성진에게 만나자는 제의를 넣은 것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성진 또한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을 만나고자 직접 나선 것이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눈앞에 서서 오연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성진에게서는 하재혁 회장이 평소 남들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설마…… 나를 대놓고 적대하겠다는 건가?’
하재혁 회장은 자신에게 낯선 이 감정이 곧 노골적인 적대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내 곧 최대한 당혹감을 감추려 애쓰면서 하재혁 회장은 속으로 침을 삼켰다.
‘허허. 이거 너무 쉽게 본 모양이로구만.’
성진은 아직 젊으니 대국적인 판단보다도 감정을 먼저 앞세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여전히 하재혁 회장은 성진이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애송이라 여기는 참이었다.
눈앞의 젊은 청년이 아무리 최근 잘나가는 재계 거두라 해도 자신이 쌓아올린 관록에 미치기란 한참 멀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후후. 좋아. 그렇게 단순한 놈이라면 오히려 더 쉽다.’
하재혁 회장이 눈을 빛내면서 막 설득의 언변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성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재혁 회장님. 저는 회장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업적인 큰일에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뚝뚝하고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허나 그 안에 소름이 돋도록 냉정한 무언가가 얼음장처럼 서려 있었다.
하재혁 회장은 성진의 두 눈을 차분히 지켜보려 애썼지만 자꾸만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눈길이 자꾸만 처졌다.
‘이게,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대체 이게…….’
성진은 하재혁 회장의 동태를 보면서 다소 화가 났다.
때문에 성진의 의도가 반 텔레파시 능력을 통해 하재혁 회장에게 전달되었다.
“지금까지는 자신감이 있으셨죠?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저 같이 새로이 커 가는 신인은 전통과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강후 그룹의 유화적인 제스처를 감히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으로 말이지요?”
성진이 대놓고 하재혁 회장 본인의 계산을 직접 찔러 들어오자 하재혁 회장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밀어붙여 오는 이런 상황은 완전히 하재혁 회장의 계산 밖이었다.
“하재혁 회장님은 이 자리에서 2가지 실수를 하셨습니다. 첫 번째로 여기 이 자리까지 저를 불러내시기 전에는 제가 최악의 수를 가졌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셨어야지요.”
“최악의 수라니…… 그게 무슨?”
당혹해 하는 하재혁 회장을 외면한 성진은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 가방을 열어서 서류 뭉치들을 하재혁 회장 앞에 밀어 넣었다.
그 서류를 재빨리 집어든 그는 곧 서류의 내용을 보고서 얼굴 위의 생기가 하얗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이건…… 이건! 한성진 회장 이건! 대체!”
하재혁 회장이 본 서류는 바로 강후 그룹이 그토록 노심초사 감추려 애쓰는 부정 회계 자료와 탈세 관련 기록들이었다.
분식 회계라는, 기업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중한 범죄 중 하나를 저질렀다는 강력한 증거.
“보통 규모가 아니더군요. 그 정도면 이 나라가 세워진 이래 엄청난 기업 스캔들이 될 거 같더군요.”
“하, 한성진 회장! 이, 이걸 대체…….”
하재혁 회장은 목이 무언가에 꽉 메여 잠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깜짝 놀라 덜덜 떨리는 목을 움직여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심장이 떨리고 혀가 마음대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눈앞의 시야마저 흔들리려 하는데 그 사이에 성진의 천둥 같은 음성이 하재혁 회장의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는 회장님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굉장한 자신감을 보여 주시더군요. 저에 대해 잘 모르시면서 너무 넘겨서 짚으셨습니다.”
의자에 천천히 앉아 팔짱을 끼는 성진을 보면서 하재혁 회장은 자신을 지탱하던 세상의 질서와 규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하재혁 회장은 자신의 뇌리 위로 끝장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건…… 이건 정말 끝장이다…….’
눈앞에서 차갑게 조소하는 성진을 보면서 하재혁 회장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런 하재혁 회장을 보면서 성진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황해 하시는 거 같은데 지금 그럴 여유가 있습니까?”
“하, 한성진 회장! 그, 그것이…….”
하재혁 회장이 떠듬거리면서 변명거리를 애써 찾으려 했다.
아니, 변명거리가 아닐지도 몰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를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어떻게 말을 해야, 어떤 행동을 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인가!
‘이건…… 이건 최악이다!’
하재혁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하아…….”
바짝바짝 마르는 목구멍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성진은 그런 하재혁 회장의 고민을 참아 주지 않았다.
“상황 판단을 할 기회는 충분히 드렸으니 이제 선택하십시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진은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성진을 보면서 하재혁 회장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한성진 회장. 뜻대로 말씀하시구려.”
완패였다.
어떻게 해도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지독한 외통수.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나 이미 하재혁 회장 본인과 강후 그룹은 모조리 성진의 외통수에 걸려들어 있었다.
“어차피 저를 상대로 그런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신 순간부터 저와 하재혁 회장님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던 겁니다. 인정하십니까?”
성진의 단호한 일갈에 하재혁 회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와서 버텨 봤자 좋을 게 없다.
의미가 없기도 했다.
상대가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서 버티고 서 있는데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볼까? 아니면…… 저 한성진이만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한다면…….’
하재혁 회장의 마음속에 순간 악심이 들었다.
그러나 성진이 과연 해코지당한다고 해서 보유한 자료가 그대로 묻히도록 허술하게 만들었을까?
그렇게 허술한 인간이라면 확실한 자료들을 확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이전에 그런 무리한 수단을 썼다가 오히려 실패한 끝에 이 정도까지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았던가.
‘그룹의 명운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다.’
하재혁 회장은 승률이 지독하게 낮은 이 위험하고 비참한 상황을 도박판으로 만들어 버릴 마음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런 하재혁 회장의 마음속을 뇌파 해석을 통해 빤히 들여다보는 성진은 속으로 하재혁 회장이 떠올리는 제3의 인물을 읽어 들였다.
‘그 망할 늙은이! 어르신이라 부르라고? 흥! 이 망할 늙은이가 무모한 짓거리를 부추겨서 일이 이 지경이 됐어!’
하재혁 회장의 그 넋두리에 성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르신이라고?’
표정이 굳은 성진은 이제야 자신의 적이 결코 강후 그룹과 하재혁 회장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호라.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단 말인가?’
성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토록 막강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며 자신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제야 자신과 박천중 회장을 위협했던 불순한 세력의 진면목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었다.
“하하하하하.”
성진은 아주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하게 웃어 대는 성진을 보면서 하재혁 회장은 의아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무, 무슨 뜻이요? 그 웃음 소리는…….”
“하재혁 회장님. 아주 운이 좋으시군요.”
“무, 무슨 뜻이요 그게?”
“사실 저는 이 자리에서 하재혁 회장님과 강후 그룹의 비리 정보를 보여 드린 뒤 곧바로 언론과 각급 정부 기관에 전송할 작정이었습니다.”
“그, 그런! 그것만은 제발…….”
하재혁 회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이라도 꿇으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성진은 그 광경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짓은 하지 마십시오. 무릎을 꿇어 봤자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애당초 무릎을 꿇거나 우는 일 따위로 결정에 영향을 주는 기업 오너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재혁 회장님은 남이 그런다고 해서 결정을 번복하신 적이 있습니까?”
성진의 빤한 물음에 하재혁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하긴. 무릎 따위를 꿇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도 강후 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을 수십 년간 이끌어 온 몸.
철저한 실리가 부딪히는 기업 경쟁 세계에서 남이 무릎 꿇고 사정한다 해서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맞소. 내가 바보짓을 하려 했구만.”
“예. 하지만 아주 운이 좋으십니다. 최소한 강후 그룹의 비리를 제가 직접 폭로하는 일만은 하지 않도록 하지요.”
그 말에 하재혁 회장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성진이 방금 한 말은 그야말로 강후 그룹에 구원의 동아줄이나 진배없었다.
“그,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내가…….”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그게 뭐요?”
성진은 하재혁 회장의 눈초리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들이 어르신이라 부르는 존재에 대해 자세하게, 아니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어르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