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70화 (170/185)

<-- 170 회: 7권 - 매듭 -->

“그, 그…… 애송이 같은 한성진이한테…… 새파랗게 어린 젊은 놈한테 내가 사과를…… 사과를 하라고? 이 국가의 흥망사를 같이 해 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강후 그룹의 총수인 내가?”

분노의 감정이 그의 두 눈에 차오르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사실은 그 방법밖에는 없지 않는가 하는 위기감과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감정이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재혁 회장이 불안한 상념을 떨쳐 내려고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비서실장이 재차 말을 이었다.

“회장님! 전대 회장님의 유언을 잊으셨습니까? 늘 그룹의 안위를 우선하라고 하셨습니다. 회장님 개인의 안위보다도 이 강후 그룹의 안전과 번영을 최우선으로 두라고 하셨던 게 전대 회장님의 뜻이었습니다.”

“크으으읏!”

차마 부정은 못한 채로 이빨만 갈던 하재혁 회장은 한참 몸을 떨었다.

“그래. 맞아.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는 이내 기운이 빠진 채로 축 늘어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순간에 십 년은 늙어 버린 듯해진 그를 보면서 비서실장은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조금 후회했다. 

그러나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방법만이 최선이었다.

“맞아. 전대 회장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지. 나 역시도 그렇게 하고자 늘 맹세했다. 이 강후 그룹을 위해서 온몸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했지.”

하재혁 회장은 이제 인생을 살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 왔던 것을 내려놔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착각이었구나. 내게 자존심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강후 그룹의 안전이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나마 유일한 사명감과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찾으려 한다면 기꺼이 강후 그룹을 지키기 위해서 분골쇄신하리라 맹세해 왔던 다짐뿐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한성진이…… 아니 한성진 회장에게 연락을 하게. 이 하재혁이가 직접 만나서 인사를 하고 싶다고. 부탁한다고 전하게. 진심으로 부탁한다고.”

“예. 바로 전하겠습니다 회장님.”

비서실장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하재혁 회장의 용기 있는 결단에 마음속 깊이 감격했다. 

하재혁 회장 또한 자신이 강후 그룹을 위해서 평소 애송이로밖에 생각해 오지 않았던 성진을 직접 만나 사과를 청하겠다는 결정이 놀랍도록 파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회장님께서 직접 나서서 사과의 제스처를 보이는 걸 안다면 한성진 회장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강후 그룹은 한국 최고의 그룹이다. 

게다가 성진은 지금 강후 그룹이 감추고 있는 치부에 대해 전혀 모를 것이니 사과의 청하기에 적당한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맞네. 자네의 충고가 아주 큰 빛을 발했어. 나 역시도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네.”

하재혁 회장은 자신의 용기 있는 결단을 자화자찬했다. 

비서실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성진의 정보력은 자신들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고, 그 정보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용도별로 처리하는 능력은 지구상의 어떤 슈퍼컴퓨터와 최첨단 정밀 분석 인력들을 총동원해도 따라가기 힘든 정도였다. 

그렇기에 성진이 이들의 전격적인 사과도 아닌 그저 관계를 개선하려는 제스처에 불과한 인사 제의를 받아들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하재혁 회장의 용기 있는 결단에 감탄사를 보낸 비서실장은 곧바로 플루토 투자 그룹의 비서실을 향해 은밀한 연락을 보냈다.

*   *   *

플루토 투자 그룹의 회장 집무실 안은 다른 여느 대기업의 회장실과는 달리 비교적 아담했다. 

규모를 으리으리하게 만드는 대신 성진의 사생활과 기업 보안이 보장되도록 방음 설비와 도청 방지 장비가 구역 전체를 커버하면서 실시간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물론 가장 강력한 도청 방지 체계는 바로 성진의 팔에 들린 인공지능 팔찌였지만 대외적으로도 보안에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성진의 집무실에 도청 시도를 하려는 작자들로부터 귀찮은 일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도청 방지 장비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보안실 직원들은 성진이 각별하게 보안에 신경 쓴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또 하나의 장치였다.

“다 됐습니다 회장님. 이상 없습니다.”

정기 점검을 나온 보안실 직원들이 이상 없음을 보고하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수고했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 그럼 돌아가서 일들 보세요.”

“예. 회장님.”

보안실 직원들은 장비를 챙겨서 조용히 성진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직후 다시 성진은 업무에 다시금 집중했다.

“자. 이제 일을 다시 해볼까? 결재 서류를 불러와 줘.”

- 알겠습니다, 마스터.

성진의 명령에 따라 인공지능 팔찌는 즉시 시야 한가득 전자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를 즐비하게 대기시켰다.

“흐음…… 아무래도 다음 중남미 자원 시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겠군.”

성진은 세계 증권 시장은 물론 자신이 투자한 자원 펀드와 갖가지 투자 분야에 대한 점검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러면서도 회사 내부의 업무 진행 상황에 대한 점검 또한 거의 동시에 처리하고 있었다.

“좋아. 이건 괜찮은 아이디어 같네. 승인해.”

- 알겠습니다, 마스터.

성진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성진의 멀티태스킹 능력과 서류 처리 속도는 갈수록 빨라져 가고 있었다. 

때문에 성진 밑의 바로 직속 간부들과 이사진, 여러 각 부서의 직원들은 성진이 밤을 새워 가며 따로 정리해 놓은 서류들을 한꺼번에 결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인간이 그 많은 서류를 그렇게 빠르게 처리해 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허나 세상의 편견과 상관없이 오직 인공지능 팔찌의 정보 처리 시야 제공만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성진의 집무실 안에는 으레 보일 법한 종이 서류 뭉치나 결재 서류 보관함 등이 전혀 없었다. 

성진의 눈앞에 있는 노트북에는 어느 정도 회사 관련의 결재 서류들이 저장되어 있었지만 그 또한 눈속임을 위한 요식행위였다. 

회사 중앙 전산 서버에 따로 백업되는 결재 대기 서류를 실시간으로 받아서 처리하는 성진의 인공지능 팔찌가 그것들을 성진의 시야 앞에 직접 출력하니, 성진의 업무 처리 효율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와중에 집무실 앞 비서 데스크에 대기 중이던 혜영으로부터 내선 전화가 걸려 왔다.

“응? 무슨 일이지?”

성진은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주의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혜영의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혜영 씨?”

- 회장님. 강후 그룹의 비서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강후 그룹이요?”

성진의 뇌리에 묘한 생각이 스쳐 갔다. 

강후 그룹에 대해서는 성진이 따로 응징하기 위한 복안이 서 있는 참이었다. 

철저히 응징을 가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재기 불능으로 만들 참이었는데 이런 기묘한 타이밍에 연락이 오다니, 성진은 어처구니없는 느낌에 속으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무슨 일이랍니까?”

대충 짐작은 갔다. 

그쪽도 기본적인 판단 능력은 있을 테니 상황이 불리해지는 것을 직감한 누군가가 자신과 접촉을 시도한 것이리라. 

역시나 혜영의 말은 성진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 회장님과 직접 면담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면담을 요청한 사람은 바로 총수인 하재혁 회장입니다.

“하재혁 회장이? 흐흥…… 그렇군요.”

저절로 비틀린 미소가 걸린 성진의 입에서 비웃음 섞인 조소가 흘러나왔다. 

전화기 너머 혜영도 성진의 기분을 눈치챈 것인지 바로 말을 이었다.

- 만나기 곤란하시다면 면담을 거절할까요? 회장님.

“아니요. 곤란할 이유는 없습니다. 걱정 말고 약속을 잡으라고 하세요, 혜영 씨. 약속 장소는 내가 잡죠. 플로티나 호텔, 비즈니스 라운지 대회의실로 하도록 하세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성진은 곧 인공지능 팔찌에게 특정 서류의 출력을 명령했다.

“강후 그룹의 비리 관련 정보들을 출력해 줘.”

- 알겠습니다, 마스터.

 곧 인공지능 팔찌가 자체 저장 중인 정보 중 여러 가지가 성진의 시야 앞에 떠올랐다.

“자. 과연 나한테 어떤 제의를 해 오시려나?”

물론 당한 게 있는 만큼 성진이 순순히 받아 줄 용의는 없었다.

“뭐라고 떠드는지 정도는 들어 줘야겠지.”

차갑게 조소하는 성진의 뇌리 속에는 여전히 강후 그룹에 대한 응징의 계획이 철두철미하게 작동 중이었다. 

*   *   *

하재혁 회장은 자신을 만나자고 한 장소인 호텔 플로티나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성진을 마약 스캔들과 성적 추문에 빠트리려 함정을 판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하필 이런 장소를 고른 건가…….’

아마도 그 뜻에는 자신을 향한 경고가 있을 것이라고 하재혁 회장은 생각했다. 

어쩌면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려는 뜻인지도 몰랐다. 

‘아니다. 어차피 젊고 팔팔한 혈기만 믿는 애송이다. 이 나라 최고의 저력을 자랑하는 강후 그룹의 총수인 이 몸을 상대하면서 미리 각을 세우고 신경전을 벌이려는 심산이겠지.’

하재혁 회장은 그렇게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신감에 찬 그는 강후 그룹에 비하면 장래성 정도만 인정받았을 뿐 기업의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턱없이 못 미치는 성진이 감히 자신과 관계를 개선할 기회를 걷어차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애당초 사과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그나저나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오지 않다니 이런 식으로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할 참인가?’

하재혁 회장은 인생을 살아온 동안 학생 시절을 지난 뒤로는 약속 장소에서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이 별로 없다. 

때문에 그는 이런 하염없는 기다림조차도 낯설고 무척 거슬렸다. 

그로서는 성진이 자신을 흔들려고 일부러 약속 장소에 늦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역시 어린 나이에 성공했다 해도 나를 상대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건가? 하하핫. 하기야 강후 그룹의 이름이 결코 가볍지 않지.’

성진이 대외적으로는 욱일승천하는 젊은 거물이지만 이런 식으로 심리전을 시도하는 것이라면 자신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재혁 회장은 크나큰 자신감에 젖어서 스스로와 강후 그룹의 이름값에 성진이 부담을 느낀다고 믿어 버렸다. 

그 정도로 아직까지는 자신에 차 있는 하재혁 회장이었다.

‘이제 이 젊은 녀석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요리해 준다?’

한창 성진을 어찌 상대할지 골몰하는 하재혁 회장의 표정에 그늘이라고는 없었다. 

자신이 만나자는 제안을 해 온 것에 흔쾌히 동의해 온 것만으로도 성진은 아직 자신의 영향력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회의실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와중 드디어 아래층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 회장님. 한성진 회장이 로비로 진입했습니다. 

“어. 그런가? 좋아. 자네들은 계속 수고하게.”

- 예, 회장님. 

휴대폰을 집어넣은 하재혁 회장은 이제 성진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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