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69화 (169/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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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 경비 임무를 수행하는 감시선이 통통배로 가까이 다가온 뒤 승선한 대원들은 언제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늙은 부인을 발견했다.

    “본부. 여기 위급한 환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명이고 노년 여성으로 보입니다.”

    - 위급 환자? 그러면 그 환자부터 즉시 헬기로 이송하도록. 구급 장비는 충분한가?

    “예 확보되어 있습니다. 응급조치 후에 헬기로 바로 이송하겠습니다.”

    - 알겠다. 치료 가능한 병원을 연락 조치하겠다. 향후 지시에 따르도록.

    “예. 알겠습니다.”

    본부와 교신한 경비대원들은 즉시 환자를 구급 침대에 눕혀 헬기에 올려 보낸 뒤 산소 호흡기를 설치했다. 

    헬기에 먼저 타서 날아가는 어머니를 본 여자는 따라가려 했지만 경비대원은 허락하지 않았다.

    “어딜! 지시에 따르시오.”

    “우리 오마니란 말입네다. 내 오마니요!”

    “알았으니까 지시에 따르고 기다리시오. 당신들이 탈북자인지부터 확실히 확인해야 하니 돌아가고 나서 조사를 받은 뒤에 만날 수 있습니다.”

    단호하고 엄격한 경비대원의 태도에 여자는 입술만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현재 자신들은 엄연히 밀입국자 신분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여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여성 대원이 다가가 여자를 위로하며 말했다.

    “정말 당신이 탈북자라면, 자유 대한민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머님은 병원에서 치료받으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한시가 급해서 헬기로 모시는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에 여자는 그제야 자신이 죽음의 위협이 가득하던 수용소에서 대한민국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오라버니…… 영석이 오라버니…… 나랑 어머니가 왔어요. 여기 한국 땅에 왔시오.’

    그 순간 안도감과 동시에 온몸을 팽팽하게 지탱하던 긴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눈이 차츰 감긴 그녀는 곧 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주희야! 정신이 드니?”

    오빠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주희라 불린 여자, 수용소를 탈출해 사선을 수도 없이 건너 마침내 대한민국에 도착한 그녀는 마침내 오빠 차영석을 눈앞에서 맞았다.

    “오, 오라버니!”

    “주희야!”

    부둥켜안으면서 기뻐하는 남매를 멀리서 지켜보는 남자, 성진은 감격적인 해후를 지켜보면서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그 직후 한창 여동생과 해후의 기쁨을 나눈 차영석, 한때는 김형석이라 불렸지만 성진의 도움으로 신분이 복권된 차영석은 감사의 뜻을 담아 성진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어허. 여기 병원 복도입니다. 이런 데서 나를 창피 줄 셈입니까?”

    성진이 말리자 그제야 차영석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두 눈에는 성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득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받은 은혜를 언제 다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요. 우리 사이에 했던 약속을 지킨 것뿐이지 않습니까. 참 차영석 씨가 본래 신원을 회복했으니 하는 말인데 이제는 우리 네오 테크비젼 사의 정식 직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때요? 비록 하는 일이야 다르겠지만 정식 직함으로 괜찮을 것 같은데.”

    성진이 명함을 내밀자 그 안에는 네오 테크비젼 사의 제3 영업팀 국제 파트 과장 차영석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어엇…… 회장님. 이건…….”

    “대외적으로는 내세울 신분이 필요할 겁니다. 이제 가족도 생겼으니까요. 가족한테 무슨 일을 하는지는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지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차영석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려 하자 성진은 바로 어깨를 짚어 만류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면 가족과 해후를 충분히 나눈 뒤에 언제든지 출근하세요. 한 달 정도 휴가 주겠습니다. 차영석 과장.”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일본에서 나를 도와준 공에 대한 보너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결혼 준비가 바쁘시다고…… 박 회장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음? 하하하. 들었군요. 좋아요. 나중에 꼭 하객으로 참석해 주세요. 가족도 같이 왔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나중에 보죠.”

    “예. 살펴 가십시오, 회장님.”

    성진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걸 싫어했기에 그렇게까지 인사하지 않았지만, 차영석은 성진이 병동 복도를 나설 때까지 고개를 펴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건다 했던가? 

    성진은 단 한 번도 차영석의 목숨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진의 목숨이 위험해질 상황이라면 차영석은 언제든 몸을 바치리라 다짐과 맹세를 속으로 품었다.

    *   *   *

    성진의 위상과 더불어 윤진만 변호사는 이제 확실한 차기 대권 주자, 잠룡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였다. 

    일본에서 전격적인 과거사 사죄를 끌어낸 배경에 윤진만 변호사의 활약이 있었다는 것을 언론에서조차 대서특필할 정도였다.

    많은 이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모두가 이런 상황을 환영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 상황을 대체 어쩔 거냔 말이야!”

    강후 그룹의 회장실. 

    정치 면 기사를 읽고 있던 하재혁 회장은 노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신문지를 내동댕이쳤다.

    “회, 회장님!”

    비서실장이 뛰어 들어와 보니 바닥에는 정치 기사 면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윤진만 변호사가 정치적으로 주목받으며 비상하고 있다는 분석이 실린 논평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 윤진만이라는 작자 뒤에 그 한성진 그 녀석이 얽혀 있는 거 같은데…… 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 꼬라지냔 말이야. 이거 벌써부터 차기 대권 주자로 유력하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 대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 회사는…….”

    하재혁 회장은 이마 위로 치솟아 오르는 혈압을 느끼면서 고개를 의자 목 받침에 급히 기댔다.

    그런 하재혁 회장을 보면서 비서실장은 극도로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성진을 먼저 건드리고, 어설픈 수작으로 원수지간이 되어 버린 뒤에 정부의 견제를 받으면서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물론 자신들이 저지른 불법적 관행 때문에 발목이 잡힌 것이었으니 변명할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이런 마당에 차기 대통령이 한성진 회장과 친밀한 인물이 된다면…….’

    꼭 성진이 정치권력을 앞세워서 자신들을 치리라 공언한 적이 없었음에도 하재혁 회장과 비서실장 모두 그렇게 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모두 자신들이 대를 물려 가며 써먹던 수법이었고 자신들에게는 세상을 지탱하는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성진이를! 그 한성진이를 꼬꾸라뜨리지 못하면 우린 망한다. 아니 망하는 것보다 더 비참해질지도 몰라. 나나 비서실장 자네 모두 감옥에서 여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고!”

    “회, 회장님…….”

    비서실장은 하재혁 회장의 핏발 선 두 눈을 보면서 두려움에 질려 어찌 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확실히 우리가 한 짓이 모두 터지면 답이 없어진다…….’

    그동안 대기업으로서 갑질의 횡포라고 불릴 만한 시비가 강후 그룹과 얽혀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엄청난 금융 비리가 잠재해 있다는 점이었다.

    “분식 회계를! 그것들을 아직 해소하지 못했어…….”

    현 정권은 물론이고 지금처럼 차기 대선 주자로 발돋움한 인물과도 껄끄러운 관계가 예상되는 시점에 대규모의 금융 비리 스캔들이 터지면 감당할 수가 없다.

    게다가 대규모 탈세가 얽혀 있는 사안인지라 마음먹고 밝혀냈을 경우 아무리 친밀한 관계의 정권이라 해도 결단코 봐주지 않을 일이었다. 

    기업의 대규모 탈세를 봐준다는 건 곧 국가를 망하게 한다는 뜻이었다.

    “망할. 외통수에 몰린 기분이로구만.”

    하재혁 회장은 인생의 최대 고비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회장님. 분식 회계 건이 터지면 그 책임은 전부 제가 안고…….”

    비서실장 나름대로 최대의 충성심을 발휘해서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하재혁 회장은 노기를 띄었다.

    “책임? 비서실장이 책임을 지겠다고? 이 나라의 공권력이나 수사기관들이 죄다 허수아비 같이 판단되나? 비서실장 혼자서 다 설계하고 짜고 쳤다고 하면 다 그러려니 할 거 같냐고!” 

    수사관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리고 국세청의 전문가들이 끼어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다. 

    비서실장은 자신의 충언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바보 같은 소리를 했습니다.”

    “됐어.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무슨 수단을 쓰든 간에 이거 답을 내야 한다고.”

    핏기가 빠진 얼굴로 이빨을 딱딱 부딪혀 대는 하재혁 회장을 보면서 비서실장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만류했다.

    “회장님. 아직 윤진만 변호사가 차기 대통령으로 확정된 것도 아닌데 너무 걱정이 이르신 게 아닌지 우려됩니다.”

    “우려? 걱정이 이르다? 지금 밖에 나가면 일본 총리가 일제 식민지 문제에 대해 사과한 걸 가지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떠들어 대기 바쁘다는 거 모르나? 그 주역으로 윤진만이가 꼽히고 있어. 윤진만이가 지금 이 나라 온 국민 마음속에는 차기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고!”

    고함을 치는 하재혁의 심정은 정말이지, 난감하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다. 

    정부의 갑작스러운 견제에 허둥지둥 대응하다 보니 갑자기 성진이 일본에서 돌아와 윤진만 변호사를 전 국민적인 스타이자 영웅으로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로 꼽히게 되는 이런 일련의 흐름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하재혁은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듣고 있던 비서실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처든 그는 안면 가득 긴장의 빛을 담은 표정으로 하재혁 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장님. 정 그렇다면…… 최후의 수단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뭔가? 혹시 그 망할 어르신한테 연락하는 거라면 관두게. 지금 그 늙은이는 아무런 도움이 못 되고 있어!”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회장님. 한성진 회장과 접촉해서 다시 협상을 해보시지요.”

    “협상?”

    하재혁 회장의 눈에 이채로운 빛이 어렸다. 

    “협상이라니? 우리가 한성진이와 교환할 조건 같은 게 남아 있나? 뭐 새롭게 윤진만이의 약점이라도 잡은 게 있는 건가?”

    그간 강후 그룹은 성진과 윤진만 변호사의 약점을 잡아내기 위해 재물과 인력을 아끼지 않고 상황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왔다.

    그러나 현역 검사 시절에도 뇌물 의혹 한 번 없었고 단체로 술 마시는 회식 외에는 유흥업소 비스무리한 곳조차도 간 적이 없는 인물이 바로 윤진만 변호사였다.

    더더군다나 성진은 비리와 부패, 불법적인 일을 극도로 멀리해 온 지라 대통령인 육정철조차도 성진의 약점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마당에 성진과 윤진만 변호사의 약점을 새롭게 하나라도 밝혀낸 게 있다면 협상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게 하재혁 회장의 요즘 숙원이었다.

    그러나 비서실장의 대답은 하재혁 회장의 기대를 산산이 무너뜨렸다.

    “아닙니다, 회장님. 저희는 한성진 회장에게 내걸 만한 협상 조건이 없습니다.”

    “응? 아니 그렇다면 그게 무슨…… 자네 지금 무슨 뜻으로 협상을 하자고 한 건가?”

    하재혁 회장의 의문스러워하는 질문에 비서실장은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다시피하며 하재혁 회장에게 읍소했다.

    “회장님! 이렇게까지 몰려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길은 하나뿐입니다. 한성진 회장에게 사과를 하십시오.”

    “뭣? 사과? 사과라니!”

    하재혁 회장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사과하라고 했나? 자네 지금 나보고 한성진이한테 사과를 하라고 했나?”

    하재혁 회장은 멍한 표정으로 비서실장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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