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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168화 (168/185)
  • <-- 168 회: 7권 - 약속 -->

    *   *   *

    종연과의 술자리 이후 성진은 부쩍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그런 생각은 혜영과 있는 시간에도 이어졌다. 

    여자의 육감이 민감한 탓일까. 

    성진이 자신과 같이 있음에도 무언가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혜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성진의 눈치를 살폈다.

    “성진 씨.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고민이요? 아아…… 저기 그게 말이죠.”

    성진이 혜영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최근에 혜영 씨가 너무 좋아져서요.”

    “네에?”

    전혀 예상 못한 돌직구에 혜영의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감돌았다.

    “어머 참. 성진 씨도…….”

    “그게…… 거기서 끝나는 고민이 아니라 제가 혜영 씨하고 진지하게 미래를 약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네에? 성진 씨 그건…….”

    성진의 말에 혜영은 깜짝 놀랐다. 

    지금 성진이 하고 있는 말은 자신이 가끔씩 꿈꿔 오던 종류의 것이었다.

    “성진 씨. 호, 혹시…….”

    “네.”

    성진은 침을 꿀꺽 삼킨 뒤 뜸을 들인 후 다시 말했다.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로.

    “혜영 씨. 우리 결혼할래요? 제가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 말에 혜영은 입술을 샐쭉거리더니 성진과 얼굴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머 어떻게 해. 지금 얼굴이 마주치면 너무 창피해.’

    자신의 표정이 어떻게 보일지 몰라 겁이 난 혜영은 성진의 시선을 피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참 뒤에야 혜영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조, 좋아요. 성진 씨. 우리 결혼해요.”

    그 대답을 하는 혜영의 마음속은 수십 킬로미터를 질주한 것처럼 쿵쾅거리고 있었다. 

    성진은 활짝 웃으면서 혜영에게 준비한 반지를 내놓았다.

    “혜영 씨. 이거 약소하지만 선물이에요. 우리 꼭 행복하게 잘살아요.”

    성진이 직접 손가락을 잡아끌어 반지를 끼워 주자 혜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네. 성진 씨. 우리 꼭 행복하게 잘살아요.”

    공원에 뜬 푸르스름한 달빛만이 두 청춘 남녀의 새로운 미래를 고요하게 축복하고 있었다.

    *   *   *

    성진이 결혼할 사람이라며 데려온 혜영을 보자 부모님은 깜짝 놀라셨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시며 환영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이른 나이에 일만 매진하면서 연애를 멀리하는 성진의 모습이 대견하고 기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이성 교제를 멀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다른 문제가 생길까 은근 염려한 탓이었다.

    “우리 성진이가 너무 이성에 관심이 없다 보니 나는 이런저런 걱정이 좀 있었거든.”

    어머니가 입을 손으로 가리시면서 수줍음을 감추시며 말씀하셨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참한 아가씨를 데려온 거 보니 역시 난 며느리 복이 있는 거 같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혜영은 점수를 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예쁜 짓을 했다.

    “제가 앞으로 최선을 다해서 모실게요, 어머님.”

    “아유 어쩜. 말하는 것도 싹싹하고. 참 우리 아들 배필로 딱이야, 딱.”

    “호호. 감사합니다, 어머니.”

    그 와중에 아버지는 다른 생각을 하시는 듯했다. 

    혜영의 모습을 살짝 살피시던 아버지는 은근한 어조로 말씀을 건네셨다.

    “그런데 아가씨하고 우리 성진이가 나이가 모두 어린 편인데 결혼을 이렇게 일찍 해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

    아버지의 걱정은 바로 그 점이었다. 

    둘 사이의 교제 기간이 짧고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혹시라도 충동적으로 결혼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요 인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치는 결정인데 두 사람이 결정 자체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만큼 확신이 있는지 나는 그 점이 알고 싶어요.”

    아버지의 지적은 타당했다. 

    그 말에 옆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성진은 혜영의 손길을 감싸 잡으면서 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버지. 저희 두 사람도 충분히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고 무엇보다 우린 행복하게 살아갈 자신이 있습니다. 다른 걸 떠나서 결혼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구요.”

    성진의 확신을 담은 말에 옆에서 혜영은 기쁨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두 사람이 그렇게 뜻이 확고하다면 난 말리지 않아. 이른 나이에 짧게 연애해서 결혼한 사람 중에 잘사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도 하루빨리 손주 보면 좋지 뭐. 허허허허허.”

    아버지가 손주 욕심을 은근히 드러내자 혜영은 양 뺨을 가리면서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참하다는 느낌을 받으셨다.

    “그런데 사돈 되실 어른께서는 너희가 결혼 결심한 것을 알고 계시고?”

    “예. 일이 바쁘셔서 전화로만 말씀을 드렸는데 크게 기뻐하시면서 승낙하셨습니다.”

    혜영의 아버지인 박천중 회장이 성진을 사윗감으로 욕심내 온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로서는 기쁜 소식에 토 달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식은 나중에 천천히 하더라도 상견례는 해 둬야겠구나. 사돈 되실 어른이 많이 바쁘시더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식사라도 한 번 하자고 말씀 올리렴.”

    아버지의 말에 혜영은 다소곳이 웃으면서 미소로 대답했다.

    “예. 아버님.”

    “허허 아버님 소리를 이렇게 빨리 들을 줄이야. 허허허.”

    아버지의 웃음에 성진과 혜영은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   *   *

    캄캄한 밤바다 위로 작은 통통배 한 척이 거센 엔진 소음을 뿌렸다. 

    출렁이는 바다 물결 앞에 초라한 통통배는 속절없이 요동을 쳤다. 

    그 배의 갑판 위에서 반쯤 엎드려 난간을 붙잡고 있는 젊은 여자가 조타실을 향해 소리 질렀다.

    “이거 너무 소리가 큰 거 아니요? 어찌 밤 한가운데 이리 소리가 큰데 몰래 들어갑니까.”

    “아이고 이 아가씨가 의심도 참 많으시네. 이봐요. 엔진 소리보다 당신 목청소리가 더 커. 위험하니까 빨랑 안으로 들어오기나 하슈!”

    선원 특유의 억센 기운이 섞인 으름장을 놓는 선장이었지만 젊은 여자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사실 겉보기로 보기에도 그녀의 몸뚱이는 너무도 가느다랗고 볼살에는 살점이 하나 없어서 피골이 상접했다. 

    오랜 시간을 고초 속에서 버텨 온 그녀였다. 

    그러나 눈빛만은 전혀 기가 죽어 있지 않았다. 

    저 바다 건너 눈앞의 대한민국까지 무사히 도착해 오빠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만나야만 했다. 

    그때 조타실 구석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흐으으…… 우리 영석이…… 영석이 볼 수 있는 거니? 영석아…….”

    그 소리에 그녀는 얼른 조타실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오마니! 오마니 정신 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오라버니가 저기 바다 건너서 기다리고 있소. 오마니…… 오라버니를 생각하시라요. 오라버니를…….”

    여자는 늙은 어머니의 양손을 꽉 붙잡고 염을 외우듯이 오라버니를 읊어 댔다. 

    마치 그 오라버니라는 말이 마법의 주문인 것처럼 그녀는 간절했다. 

    오랜 고초와 지옥 같은 생활 속에서 엉망이 된 늙은 어머니의 육신은 부스러질 것처럼 너무도 작고 비참해져 있었다. 

    그 입으로부터 언제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중년 여인의 가느다란 숨결이 흘러나왔다가 끊어졌다가 하고 있었다. 

    다시 이어지는 간격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사방에 울려 퍼지는 커다란 파도 소리와 요란한 엔진 소리는 점점 커져 가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내쉬는 숨결은 주변의 소음 속에 파묻히려는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오마니…… 오라버니가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그녀는 어머니의 의식이 떠나갈까 무서워 계속 오라버니를 열심히 읊었다. 

    그러는 와중이었다. 

    갑자기 선장의 눈앞에 기다란 빛줄기가 보였다.

    “으억! 저, 저거!”

    선장은 깜짝 놀랐다. 

    얼굴과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확실히 기가 질려 있었다. 

    여자는 선장을 보면서 무언가 엄청난 게 닥쳐 왔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에요?”

    “저, 저기! 저기…….”

    선장이 조타실 창문 밖 위에 빛기둥을 앞세우고 날아오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여자는 그것이 북한에서 직승기라 부르던 헬리콥터임을 알아차렸다.

    “젠장! 저게 한국 해경 헬기면 사는 건데…… 중국 공안이면……. 이런 젠장…….”

    도주는 포기했다.  

    헬기를 상대로 도주해 봤자 떨칠 수 없다. 

    곧 경비함이 달려올 것이고 출력이 떨어지는 이 통통배로는 도망칠 수 없다. 

    “빌어먹을! 젠장! 젠장!”

    선장은 망연자실했다.

    대한민국의 영해인지 공해인지, 혹은 아직 중국 영해의 끝을 못 벗어난 건지 영 애매한 구간이었다. 

    선장은 자신의 배를 잃고 인생의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썩는 게 아닐까 무서워 덜덜 떨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젊은 여자가 느끼는 공포는 차원이 달랐다. 

    저 눈앞의 헬리콥터가 중국 공안의 헬기라면 아마 그녀와 어머니는 죽음을 면키 힘들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상범이 탈출을 하다 잡혔다면 자비를 바라기 힘들었다.

    “아바지…… 오마니를 살려 주시라요. 도와주시라요.”

    그녀는 이미 숙청당해 죽은 지 오래인 아버지를 마음속에 그리며 진심을 다해 살려 달라 기도했다.

    그때 배 위로 따라붙은 헬기로부터 익숙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대한민국 해양 경비대다. 귀 선박은 현재 대한민국의 영해를 무단으로 침범했다. 즉시 엔진을 정지시키고 갑판 위로 모든 인원이 나올 것을 명령한다……. 반복한다. 즉시 엔진을 정지시키고 갑판 위로 모든 인원이 나올 것을 명령한다…….”

    익숙한 한국어가 들려오자 선장과 여자는 서로를 번갈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직후에는 중국 선박일 가능성 때문인지 중국어 경고음도 들려왔으나 중국 공안이 한국어 경고를 할 리가 없으니 두 사람은 안도할 수 있었다.

    “하아…….”

    “흐으으윽…….”

    여자가 내쉬는 한숨은 금세 울음과 섞여서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아 이 아가씨야. 이제 다 끝났는데 왜 울고 그래.”

    선장은 언제 걱정에 빠져 있었냐는 듯 화통하게 웃으면서 엔진 시동을 정지시켰다. 

    곧 통통배는 출력을 정지하고 망망대해 위에 그대로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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