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회: 7권 - 약속 -->
화려한 야경이 한강과 함께 창문 너머로 일렁이는 도심의 레스토랑.
레스토랑 내부 곳곳에 울려 퍼지는 잔잔한 바이올린 선율과 식당 내부를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이 저녁의 식사 분위기를 한층 더 낭만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내부 인테리어와 절도 있고 예의 바른 웨이터들의 태도만 봐도 상당히 고급에 속하는 정통 레스토랑이었다.
성진의 취향과는 달랐지만 혜영의 기분을 맞춰 줄 겸 모처럼 대접할 생각에 인공지능 팔찌가 고른 장소였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절도 있게 다가온 젊은 웨이터가 깍듯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성진에게 질문을 건넸다.
“혜영 씨. 바로 주문할까요?”
“네. 저도 배고프네요.”
혜영이 활짝 웃으며 대답하자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바로 주문하겠습니다.”
성진이 대답하자 그제야 웨이터는 손에 들고 있던 메뉴판을 혜영과 성진에게 건넸다.
성진이 메뉴를 보며 목록을 훑어보는데 그때마다 인공지능 팔찌는 성진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캐치하여 해당 요리에 대한 정보와 유사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시야에 출력했다.
‘흐응. 이 요리는 영 안 끌리는데…… 어, 이건 좀 괜찮겠네.’
메뉴 하나당 가격이 상당했지만 성진은 가격 부분은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성진은 그중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몇 개 정한 뒤 혜영에게 물었다.
“전 정했는데 혜영 씨는 먹고 싶은 거 정했어요?
“어…… 글쎄요. 뭘 먹어야 할지…….”
혜영이 망설이는 듯하자 웨이터가 눈치를 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고민이 되시면 제가 오늘의 추천 요리를 말씀드려도 될까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시죠.”
“예, 손님. 오늘의 메인 추천 요리는 갈릭 소스를 곁들인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입니다. 프랑스 남부 지방인 프로방스 지역의 전통 요리 방식으로…….”
웨이터는 미리 교육받은 대로 손님의 식욕을 돋우기 위한 음식의 배경 설명을 충실히 읊었다.
다 들은 혜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분 좋게 음식을 주문했다.
“예. 그럼 그걸로 주문할게요.”
주문이 끝나자 간단히 받아 적은 웨이터는 다시 절도 있는 목소리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문 감사합니다, 손님. 말씀하신 메뉴의 준비에는 최대 1시간 정도가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테이블 위에 있는 초인종을 눌러서 호출해 주십시오.”
절도 있는 태도로 인사한 뒤 발소리 하나 내지 않으며 식당을 가로지르는 웨이터의 모습을 보니 성진은 이 식당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역시 비싼 식당은 비싼 서비스의 대가를 보여 주는군.’
돈은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다고 한다.
물론 비약과 과장이 섞였지만 돈을 들인 만큼 서비스와 제품의 질이 좋다는 뜻으로 줄곧 통용되어 온 말이기도 하다.
성진은 그 점을 실감했고 적어도 식당의 서비스 수준은 높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 성진의 눈치를 살폈는지 혜영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 식당이 좀 유별날 정도로 엄격한 편이에요. 원래부터 재력이 상당하신 분들만 애용하는 곳이거든요. 저희 아버지도 부담스럽다고 자주 안 데려와 주셨어요.”
혜영이 혀를 삐죽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자 성진도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런. 박 회장님께서도 감당하기 힘든 가격인 모양인데요? 저 오늘 여기서 지갑이 다 털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어머?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가장 잘나가는 재계 기업인이 성진 씨인데 엄살 피우기에요? 실망인데요, 이거.”
혜영이 눈을 흘겼지만 그러다 피식 웃을 뿐이었다.
사실 성진은 사치를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가진 돈을 굳이 쓰지 않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
거기에 혜영에게서는 업무로 도움을 받고 있으니 평소에는 자신이 영 오지 않을 이 비싼 식당에서 가끔 혜영에게 밥을 한 끼 사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여자들은 이런 분위기에 끌린다고 하니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는 있겠지.’
물론 평소의 성진으로서는 웬만해선 안 올 곳이지만 아무래도 여성인 혜영이 상대이니 신경이 쓰였다.
“전 사실 이런 곳에 처음 와 보네요.”
“어머 그래요?”
“예. 제가 원래 유복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최근에는 일만 하느라 이런 곳에 와 볼 시간이 없었구요.”
“아…… 참 그랬죠. 제가 그러고 보니 비서로서 좀 소홀했던 것 같네요. 이런 곳이 아니더라도 성진 씨가 재충전할 계기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사실 전 이곳에 온 게, 상대가 혜영 씨니까요.”
“네? 저 때문에요?”
성진의 그 말에 혜영은 살짝 양 볼을 붉혔다.
성진은 그 모습이 귀엽다고 느껴졌다.
어두운 조명 톤 가운데 테이블만을 비추는 엷은 조명 때문일까.
자신의 눈앞에서 눈을 반짝이는 혜영의 모습에서 성진은 더없이 매력을 느꼈다.
‘이거…… 아무래도…….’
성진의 가슴속에서 두근대는 심박 수가 느껴지자 성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내가…… 혜영 씨를…….’
그런 속마음을 깨달은 성진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어색함을 느낀 혜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어색한 분위기에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어색한 시간이 흐르며 대화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두 사람은 웨이터가 식사를 가져온 뒤에야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었다.
“손님. 주문하신 메뉴가 준비되었습니다.”
웨이터가 식사를 늘어놓는 사이 성진은 혜영을 보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기, 혜영 씨.”
“네?”
깜짝 놀라 반문하는 혜영에게 성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식사 끝나고 저랑 산책 좀 하시겠어요?”
“어…… 저기 그거…….”
성진의 말뜻을 눈치챈 혜영의 양 볼 위로 살짝 홍조가 어리기 시작했다.
“데이트 신청. 맞는 거죠? 성진 씨.”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했다.
“네. 순서가 좀…… 하하. 이상하게 되긴 했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말해야겠네요. 혜영 씨.”
성진의 말이 떨어지자 혜영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성진은 본론을 꺼냈다.
“저랑 사귀어 주시겠어요?”
“네? 아…… 저, 그…….”
혜영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방금 성진이 자신에게 해 온 말이 무슨 뜻인지 머리로는 아는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마음이 받아들이기가 벅차오르는 까닭이었다.
“저…… 무, 물론이죠. 물론이에요, 성진 씨.”
혜영은 온몸을 살짝 떨면서 눈앞의 성진을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 * *
사귀게 된 뒤로 성진은 자신이 혜영을 생각하는 감정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는 일이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혜영이 눈앞에서 웃고 살짝 떼쓰고 기대는 모든 일이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기쁨과 만족을 준다는 사실에 성진은 자신이 처음으로 겪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게 정말 말로만 듣던 사랑이겠지?”
성진의 중얼거림에 옆에서 듣던 종연이 부러워 죽을 것만 같은 표정으로 엄살을 피우며 말했다.
“야 이 인간아. 천하의 바람둥이 녀석 한성진아. 너 학교 다닐 때는 우리 무역과의 여신이었던 희진이랑 그 청순하던 미란 씨도 꼬시더니 이제는…… 어흐흐흑. 세상은 왜 이리 불공평한 거야.”
얼마 남지 않은 휴가 기간인지라 모처럼 불러내 만난 종연과의 술자리.
성진이 혜영과의 일을 들려주자 종연은 눈물을 흘리는 시늉까지 하면서 성진의 여복을 부러워하기 바빴다.
그 와중에 나온 바람둥이라는 말에 성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항의했다.
“야. 바람둥이라니 그건 정말 억울하다. 난 이전까지 누구 한 사람하고도 사귄 적이 없었어, 인마.”
성진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지만 듣고 있던 종연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성진을 흘겨봤다.
“흥. 웃기고 있으시다. 정말. 너 가증스러운 거 아냐? 야 희진이는 학교에서 자기 좋다는 남자들이 줄을 섰는데도 너 하나만 보면서 졸업반이 될 때까지도 버티고 있어, 인마.”
“정말이야? 아휴. 희진이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좋은 남자 만날 줄 알았는데…….”
성진은 희진의 마음을 받아 주지 못하는 입장이기에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리라 생각했다.
한데 희진이 아직까지도 사귀는 남자가 없다니 못내 부담이 되었다.
그런 성진을 보면서 종연이 살포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성진아 솔직히 말해서 나…… 네가 연애 시작했다니까 좀 기쁘다.”
“응? 내가 연애 시작한 게 왜 기뻐?”
엉뚱한 종연의 말에 성진은 의아해 했다.
그런 성진을 보면서 종연은 진지하게 말했다.
“나 말이다. 사실 희진이 계속 좋아해 왔거든.”
“뭐?”
성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종연의 고백에 웃음이 나왔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네가 잘해 봐.”
“솔직히 네가 이제 임자 만났다니까 희진이도 슬슬 마음 변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이 씨. 나나 희진이나 이제 졸업반이잖냐. 1년밖에 안 남았다.”
종연의 걱정이 가득한 우려에 성진은 피식 웃으면서 종연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야. 걱정하지 마라. 1년이나 시간이 남아 있잖아. 열심히 대쉬해 봐라, 종연아.”
“그래. 나 진짜 큰맘 먹고 희진이한테 대쉬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아 참. 성진아.”
종연이 장난스럽게 희죽 웃으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왜에?”
“야. 너 그 여자분하고 확 결혼해 버리는 건 어떠냐? 그래야 희진이가 포기를 해도 제대로 할 것 같은데.”
“뭐? 야 무슨 소리야. 내가 희진이 포기시키려고 결혼까지 해야 해?”
“웃자고 한 말이다 친구여. 흥분하지 마시게나.”
성진은 종연의 어처구니없는 장난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지만 순간 자신이 혜영과 결혼한 모습을 진지하게 떠올렸다.
“결혼이라…….”
성진이 나직이 말하자 종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
“왜? 너 진지하게 결혼 생각해 보게?”
“글쎄. 뭐 안 될 건 없을 거 같기도 해. 당장 결혼한다 해도 감당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니까.”
성진은 요즘 혜영과 만나면서 부쩍 가정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아직 나이가 젊은 편인데도 결혼 생각이 진지하게 드는 것을 보면 결국 답은 하나였다.
‘소유욕이겠지.’
혜영이 좋아지는 만큼 성진은 혜영과 계속 함께 있고 싶은 소유욕을 느끼고 있었다.
“하긴 너라면 당장 결혼한다 해도 문제될 건 없겠지. 이 나라에서 가장 잘나가는 회장님 아니시냐. 하하하.”
종연의 너스레에 성진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딜 가도 주목받고 우러러보는 생활이 당연시 된 지금 자신 앞에서 스스럼없이 친구로 남을 수 있는 존재는 종연뿐이기도 했다.
“졸업하면 뭐 할 거냐?”
“글쎄? 뭐 그냥 회사원 되겠지. 무역이 전공이니까 무역 회사 들어갔으면 하는 거고.”
“우리 회사도 무역 관련 파트가 있으니까 관련 부서에 입사 지원해 보는 거 어때? 너라면 합격 보장권일 거다.”
성진이 가볍게 제안하듯 말했지만 종연은 정색하고 딱 잘랐다.
“아니다. 내가 취업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친구 도움 받아서 직장 잡아야겠냐? 더더군다나 네 밑에 있기는 이 엉님이 좀 쫀심이 있잖냐. 하하하하하.”
특유의 너스레를 떨면서 자신감을 보인 종연에게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래. 하긴 그래야 문종연이지. 자, 건배나 하자.”
“그래. 우리의 창창한 앞날을 위하여! 에 또 그리고…… 그 혜영 씨와 성진이의 행복한 미래를 위하여! 하하하.”
종연의 장난 섞인 축배 제안에 성진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