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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영식이 어머니 상태를 점검해 봐야 하는데.’
성진은 휴대폰을 꺼내 영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영식의 밝은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 성진이 형?
“어 그래 영식아. 어머님 상태는 좀 많이 나아지셨니?”
- 예, 형. 의식을 차리셨어요.
“아 그래? 그러면 너도 알아보셨겠구나.”
성진은 갑자기 들려온 영식의 기쁜 소식에 안도했다.
- 그런데 저하고 통 대화를 안 하려고 하세요.
다소 침울한 영식의 목소리에 성진은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미안한 마음에 영식이와 대화를 못하는 모양이군.’
영식을 버리다시피 헤어진 후 수 년 동안 연락이 끊어진 채 살아왔다.
얼굴도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민망할 것이 틀림없었다.
“영식아. 네가 잘해 드리고 싶다면 계속 잘해 드려. 어쨌든 어머니를 용서할지 어떨지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다.”
- 에이, 용서라니요. 부모 자식 간에 용서가 어딨겠어요. 전 어머니 미워하지 않아요.
영식의 따뜻한 말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래도 역시 어머니 찾으니 좋은가 보구나.”
- 예. 감사해요 형.
진심이 전해지는 영식의 목소리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래, 어머니 잘 돌봐 드리고 이만 끊자.”
- 예, 형. 나중에 봐요.
성진은 전화를 끊은 후 곧 자신의 어머니가 뇌리에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요즘 바쁘다 보니 자주 얼굴도 못 비쳐 드렸지.’
장성해서 큰일 하는 자식이라 하며 성진에게 개인적인 연락조차 아끼시던 부모님이었다.
성진은 여러 가지 큰일을 처리하느라 부모님께 아들 노릇을 한 지가 한참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정작 내 가족에게 소홀했던 거 같아.’
성진은 모처럼 자신이 얻은 휴식을 가족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아끼는 데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진은 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자 집무실 입구 앞에서 비서로서 대기 중이던 혜영이 깜짝 놀라 성진에게 물었다.
“회장님. 무슨 일이신지요?”
“아, 혜영 씨. 다른 게 아니라 나 휴가 좀 쓸까 해요. 한 열흘 정도면 적당할 거 같은데.”
“열흘씩이나요? 어 회장님 그건 좀..”
혜영은 난처한 표정으로 성진의 눈치를 살폈다.
“음? 안 되나요?”
성진은 이미 사전에 인공지능 팔찌를 통해 스케줄을 모두 점검해 둔 상태였다.
중요한 일은 거의 없는 시점인지라 열흘 정도는 휴가를 써도 된다는 계산을 이미 내린 상태였다.
그런데 정작 비서인 혜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어…… 회장님. 휴가 계획이 어떠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
혜영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자 성진은 손사래를 치면서 혜영을 만류했다.
“에이, 혜영 씨. 둘만 있을 때는 눈치 보지 말기로 했잖아요. 나한테 딱딱하게 격식 차리지 마요.”
“헤헤…… 네에.”
혜영이 표정을 풀고 성진에게 스스럼없는 모습을 보여 주자 성진은 웃으며 말했다.
“가족하고 같이 보내려고 해요. 못 만났던 친구들도 만나 보구요. 마침 제 여동생이 얼마 전에 대학 입시를 치러서 지금은 예비 대학생이거든요. 온 가족이 시간 보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이니까요.”
“어머! 그래요?”
성진의 말에 혜영은 눈을 빛내며 양 손뼉을 마주쳤다.
“성진 씨. 그렇다면 저도 성진 씨 친구 만나는 자리에 같이 갈 수 없을까요?”
“네? 어…… 그건..”
“어머. 안 되나 봐요? 흐응…….”
혜영이 짐짓 실망한 목소리로 풀이 죽은 표정을 짓자 성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급히 손을 흔들며 성진은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혜영 씨. 혜영 씨도 같이 가요. 아마 친구들도 혜영 씨같이 성격 좋은 미인이면 좋아할 겁니다.”
“어머, 그거 진심으로 칭찬하는 거 맞죠? 고마워요, 성진 씨.”
혜영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성진에게 말했다.
“그럼 휴가 잘 다녀오세요, 회장님. 제가 휴가 결재 처리해 놓겠습니다.”
“아니에요. 이미 내가 결재 서류는 올려놨으니까 따로 내가 결재할게요.”
“네. 그럼 친구분들이랑 만나실 때 저 꼭 불러 주세요? 가족분들하고 계실 때 불러 주면 더 좋지만…….”
혜영은 대놓고 성진에게 기대감 어린 눈빛을 보내면서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눈치를 성진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고개를 긁적이며 애매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 그건 가족 모임이라서…….”
“에이~ 가족 모임에 예비 가족이 참석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호호.”
“네? 어…… 허허.”
노골적으로 성진에게 밀착해 오는 혜영을 보면서 성진은 왠지 전처럼 강하게 부정하거나 밀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성진은 혜영을 부모님에게 소개시켜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그렇게 된다면 그건 그야말로…….’
결혼을 앞둔 커플이 부모님께 인사를 올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 성진은 아직 본격적으로 사귀기도 전인 혜영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한 게 영 어색했다.
“혜영 씨. 그럼 이만 전 가 볼게요. 혜영 씨도 별일 없으면 제 휴가 기간 동안 출근하지 않아도 됩니다. 허흠.”
허둥지둥 회사를 빠져나가는 성진을 보면서 혜영은 뭔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이거 뭔가 예전하고는 다른데?’
여자의 직감이란 무서운 법.
혜영은 성진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부쩍 달라졌음을 깨닫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접근을 성진이 쉽게 떨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혜영은 더욱 확신이 들었다.
‘좋아! 때는 이때다. 밀어붙여야 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쥔 혜영은 사랑의 욕심에 불타는 한 여전사였다.
* * *
성진이 휴가를 선언하면서 집에 들어오자 집 안에는 활기가 돌았다.
부모님은 겉으로는 크게 내색하지 않으시면서도 모처럼 장성한 아들이 돌아와 여러 날 집에 있겠다는 것이 나쁘지 않은 눈치셨다.
아버지는 성진과 마주 앉아 바둑을 두시면서도 좋은 내색을 감추느라 표정 관리를 하시곤 하셨다.
“성진아. 너 그룹 회장님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휴가를 오래 써도 되는 거야?”
아버지의 염려스러운 말씀에 부엌에서 간단한 다과를 내오시던 어머니가 핀잔을 주셨다.
“아이구. 우리 아들 성진이가 오죽이나 잘하겠어요? 당신은 바둑이나 즐겁게 두세요.”
“다 내가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 아니겠어.”
다정하게 두런두런 말씀을 나누는 부모님을 보면서 성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 할 일 다 잘 처리해 놓고 잠깐 휴가를 낸 거니까요. 두 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참. 어머니하고 아버지 저하고 잠깐 쇼핑이라도 나가실래요? 봄이 됐으니까 옷이라도 새로 사 입으시면…….”
성진의 말에 어머니는 양손을 흔들면서 고개를 저으셨다.
“아이고 저번에 네가 사 준 옷도 한참 쌓여 있다. 옷을 매번 사서 쌓아 두면 뭐하니. 우린 됐으니까 네 동생이나 좀 챙겨 주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에서 성진의 동생이 후다닥 뛰쳐나왔다.
“오빠아! 이제 막 대학 캠퍼스에 발을 딛는 이 여동생을 챙겨 줘야지, 왜 그렇게 무관심한 건데?”
“야아…… 한성희 너 이미 부모님한테서 잔뜩 받아 낸 거 다 알거든.”
성진이 도끼눈을 하고 부릅떠서 노려보자 성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기세를 높였다.
“오빠아! 요즘 대학 들어가는 여동생한테 옷 선물쯤은 친오빠들이 당연히 해 준다고. 내 친구 누구는 시계도 선물해 줬다더라.”
그 말에 성진은 심드렁한 어조로 짧게 말했다.
“그러면 그 오빠한테 가서 사 달라고 해.”
성진이 무표정한 기색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성희는 아차 싶었는지 성진의 옆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사근사근하게 깔았다.
“아이잉~ 오빠아~ 그러지 말구웅, 힘들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 합격한 이 동생한테 고생했다고 선물 쫌 해 줄 수 있는 거잖오? 응?”
그 말에 성진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경고하는데 성희 너 나한테 콧소리 섞어서 말하지 마라. 짜증이 좀…….”
“에이 씨. 그러지 말고 좀 사 줘어~ 돈도 많으면서.”
“늘 말하지만 이 오빠 돈은 네 돈이 아니야.”
“아이잉~”
“콧소리 섞지 말랬다.”
“아이 씨!”
한창 남매끼리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한 말씀을 하셨다.
“아들! 성진아 그냥 사 줘라. 성희 쟤가 요즘 대학 들어간다고 한창 신입생 기분이잖니.”
어머니의 말에 성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어! 정말이지? 오빠 진짜 사 주는 거 맞지?”
“그래. 사 줄게.”
“아싸!”
성희는 오빠 성진의 말이 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빨리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요란스럽게 옷치장에 바쁜 것을 보니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은근히 눈치를 주셨다.
“으이구 결국은 사 줄 거면서 그래?”
“에이 쉽게 사 주고 그러면 애 버릇 나빠집니다, 어머니.”
그러면서도 성진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여동생에게 옷을 사 주는 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옷 몇 벌쯤은 선물해 주는 게 오빠로서 기분 좋은 일이기도 했다.
잠시 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성희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출을 졸라 댔다.
“오빠! 빨리 가자, 빨리!”
“그래그래. 알았다.”
성진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기분이 바뀌는 데는 3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2시간까지는 그럭저럭 참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3시간을 계속 백화점을 도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하아…… 무념무상의 자세로 버티는 거다, 한성진.’
성진은 최근에 일본에서 위험천만한 추적을 뿌리친 일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괴로웠다.
“오빠! 저기로 가자. 아까 봤던 그 옷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그리고 그 매장에 예쁜 옷이 꽤 있었거든. 다른 데서는 더 예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거기가 제일 낫네?”
“너 그 말을 대체 몇 번째 하는 건지 아냐?”
성진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룰루랄라 콧소리를 내며 흥얼거리는 성희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눈치였다.
어쩌면 들려도 일부러 무시하는지도 몰랐다.
“오빠아~ 빨리 와아~”
“하아…….”
성희는 나는 듯한 발걸음으로 백화점 곳곳을 누볐지만 그 뒤를 따르는 성진은 그저 지겨워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때였다.
“어머어어어~ 성진 씨이. 여기 계셨네요? 여기서 쇼핑 중이셨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돌아보니 역시 익숙한 여성이 서 있었다.
“혜영 씨?”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혜영이었다.
성진은 헤영이 자신이 있는 백화점에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
놀란 듯 말하는 혜영의 목소리에 과장이 섞여 있어서 혜영의 연기력이 빵점이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안 거지?’
성진은 그 점이 가장 궁금했다.
“혜영 씨. 여긴 무슨 일이에요?”
“네? 아 그게 저는…… 그러니까…… 어어…… 어! 쇼핑이죠. 쇼핑. 하하…….”
난처해 하는 혜영에게 갑자기 지원 투수가 등장했다.
“어머! 혜영 언니. 왔어요?”
살짝 윙크하면서 다가온 성희가 혜영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성진이 살짝 황당한 듯 말했다.
“혜영 언니? 성희 너, 혜영 씨하고 아는 사이였어?”
“어머 그러엄? 얼마 전에 혜영 언니가 나한테 찾아왔는걸? 오빠 비서라고도 하고…… 친구라고도 하고 그래서 친하게 지내기로 했지.”
“호호. 성희야, 잘 있었어?”
반가워하며 떠드는 두 여자를 보면서 성진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실감했다.
혜영은 자신의 여동생에게까지 공략해 올 정도로 적극적인 여자였던 것이다.
‘이런…… 이런 건 정말로 예상 못했다.’
아마도 성희가 자신이 있는 백화점 위치를 혜영에게 알려 준 모양이었다.
‘혜영 씨도 참. 언제 성희하고도 친해진 거지?’
성진으로서는 혜영의 적극성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휴우…… 참. 어떻게 된 일인지는 대충 알겠습니다.”
성진의 말에 성희는 딴청을 피우면서 뻔뻔하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 참. 오빠 난 이만 집에 가야겠다. 오빠 나 택시 타고 갈 테니까 택시비 좀 줘.”
“응? 왜? 내 차로 돌아가면 되지, 택시를 굳이 왜 타?”
“엉? 아 이 눈치 없는…… 아아 참. 아니지 언니? 나 택시비 좀.”
“응? 어어…….”
혜영이 재빨리 지갑을 열어 성희에게 택시비를 쥐어 주자 성희는 성진의 손에 들려 있던 쇼핑백을 재빨리 챙겨서 잽싸게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 뒤로 돌아 손을 흔들며 외쳤다.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 호호홋.”
그 말에 성진은 자신이 혜영과 둘만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어…… 시간이 좀 늦었는데…… 저하고 같이 저녁 식사 어떠세요?”
머뭇거리며 말하는 혜영을 보면서 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
그 말에 혜영은 기쁜 미소를 지으며 성진의 손을 잡았다.
“좋아요! 빨리 가요 성진 씨.”
성진의 손을 잡아끌며 걸음을 옮기는 혜영을 보면서 성진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