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61화 (161/185)
  • <-- 161 회: 7권 - 귀국 -->

    이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본 성진은 조용히 작게 박수를 쳤다.

    ‘정치가로서 적당히 처신하면서도 요구 사항은 전부 들어 줬군. 완전히 썩어 빠진 정치가는 아니었어.’

    성진은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해 줄지에 대해 일말의 불안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은 모두 들어 준 점에 대해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의 계획대로 일본 정계가 재구성 된다면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 문제에 대한 조례가 성립되고 한일 외교 관계는 다시 짜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뒤편에서 일본의 인터넷과 각종 여론에 대해서 성진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준비하고 있지?’

    성진의 지시에 인공지능 팔찌는 간단히 대답했다.

    - 물론입니다, 마스터. 지금도 인터넷 홈페이지 커뮤니티와 각종 사이트 등에 토론 주제와 의견 표시 등을 지속적으로 게재 중입니다.

    ‘좋아. 일본 국민들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도록 객관적인 기회를 주는 데 애쓰라고.’

    - 물론입니다, 마스터.

    성진이 인공지능 팔찌에게 지시한 것은 이 상황을 뒤집도록 억지 주장을 쓸지 모르는 불순한 세력의 움직임을 억제하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인터넷 곳곳에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진실은 명백한 것이고, 그것을 억지와 거짓으로 뒤덮으려는 세력을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새로이 시작된 계기를 막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어…….’

    성진은 이 기쁜 소식으로 떠들썩할 조국 대한민국으로 어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 그곳에서 다시 싸움을 치러 내야 한다.’

    성진은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이 아직도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언제든 단호하게 응징할 채비도 준비되어 있었다.

    ‘비행기 표는 예약이 되어 있겠지?’

    - 물론입니다, 마스터. 지시하신 내용대로 내일 아침 일정으로 비행기 표를 예약했습니다.

    ‘좋아.’

    성진은 떠들썩한 충격과 흥분으로 가득한 발표회장을 뒤로 두고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인터넷 신문 기사를 확인해 보니 곽정수 기자의 국제일보가 타이밍 좋게 대박 특종을 터트린 상태였다. 

    골자는 성진과 윤진만 변호사의 활약이 이번 발표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해냈다는 점이었다.

    ‘좋아. 이것으로 일본에 온 목적은 다했다.’

    발표회장을 빠져나와 시트에 기댄 성진은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성진이 탄 자동차는 인공지능 팔찌가 직접 운전하면서 상단이 묵고 있는 트래블랜딩 호텔로 향했다.

    *   *   *

    성진을 비롯한 협상단이 탑승한 비행기는 하네다 공항을 뜨자마자 순식간에 현해탄을 건넜다. 

    비행기가 이륙한 지 불과 두 시간여 만에 대한민국의 영토가 가까워지자 드디어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실감이 협상단 인원들의 표정에 가득 번졌다.

    “이번 협상의 고무적인 성과는 오랫동안 회자될 겁니다.”

    협상단 인원 중 외교부 소속에서 차출되어 실무를 맡은 차관은 얼굴 가득 흥분이 깃들었다. 

    그로서도 외교관으로서 이토록 전 국민적인 관심과 집중 조명을 받게 된 사건에 한몫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없이 기쁘고 흥분되었다. 

    노년을 바라보는 고위 공직자로서, 이런 괄목할 성과를 내는 것은 공무원으로서의 성취감을 채울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성진은 그런 그의 심정을 이해하고 감사와 격려를 보냈다.

    “모든 분께서 제각각의 몫을 열심히 해 주신 덕분에 이런 좋은 성과가 나온 것입니다. 저 역시도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성진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협상단으로 가득한 일등석 자리에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번져 갔다. 

    사실 이들로서는 제각각 협상 과정에서 분명한 몫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협상 과정이 최대한 자연스럽고 위화감 없이 진행되는 것으로 비치길 바라는 성진의 바람으로 연출된 것이기도 했다.

    진정으로 일본의 내각 총리가 왜 그러한 파격적인 선언을 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 국가 정보기관 소속의 수행 요원들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비밀을 지키고 있었다. 성진을 따라나선 상황에서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와 성진 간에 벌어졌던 설전, 그리고 뭔가 그들로서도 따로 짐작이 가지 않는 심증뿐인 물밑 협상은 오직 성진만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정보기관 요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요란한 주변의 흥분과는 상관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성진은 그런 정보기관 요원들을 슬쩍 바라보다가 격려와 감사의 의미로 악수를 건넸다.

    “이번 협상 진행 과정에서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악수를 받는 부장급 요원은 내색하지 않고 미소만을 지은 채 대답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저희로서는 저희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기회를 얻었기에 여한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로서는 그저 최선을 다할 기회를 얻은 것 자체가 감사할 뿐이지요.”

    “예. 어쨌든 여러분 덕에 협상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으니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성진이 그렇게 대답하고 마무리를 하려는데 순간 부장급 요원이 눈빛을 빛내며 성진에게 말을 걸었다.

    “헌데 이번 협상 과정에서 왠지 모르게 수월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일본의 정보기관 요원들도 절대로 만만치 않은 인물들인데 지나치게 조용했다고 해야 할까요? 마치 우리 협상단 자체에는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부장급 요원은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이번 협상 과정에서의 순탄함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았다고 말을 했다.

    역시나 오랜 세월을 정보 계통에서 근무한 관록 때문인지 부장급 요원의 추측에는 꽤나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었다.

    성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따로 생각했다.

    ‘역시 한 분야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의 직감이란 무섭군.’

    하지만 성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정보기관 요원으로서 유능한 사람이라면 이번 협상 과정에서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쯤은 눈치챘을 수도 있다. 

    허나 그뿐. 

    이들에게 따로 조사할 기회나 시간적 여건이 주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성진은 간단하게 대답하면서 부장급 요원의 의문을 일축했다.

    “뭐 그 친구들도 따로 바쁜 일이 있었나 보지요? 아니면 우리에게 신경을 써도 여러분의 유능함 덕에 건질 게 없었다든가요. 하하하.”

    “아하하. 칭찬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성진의 칭찬에 부장급 요원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노심초사해 왔던 경호 작전이 잘 마무리된 것과 동시에 협상 결과도 예상외로 무척 좋으니 역사적 사건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할 만했다. 

    성진이 대충 살펴봐도 그로서는 이번 사안에 대해 더 의문을 가지거나 할 동기나 여유는 없을 상황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거기까지 마무리한 성진은 슬슬 분위기를 띄우고자 화제를 돌렸다.

    “이번 협상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애를 써 주셨지만 저는 윤진만 변호사님께 특히 큰 공을 돌리고 싶습니다.”

    성진은 협상단원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윤진만 변호사의 이름을 대놓고 크게 호명했다. 

    이름이 불린 윤진만 변호사는 순간 약간의 민망함을 담아 얼굴을 붉혔지만 곧 성진의 얼굴을 보고 당당히 고개를 쳐들었다. 

    ‘당당하십시오, 윤진만 변호사님.’

    성진의 눈빛을 받은 윤진만 변호사는 어색해 하던 표정을 버리고 겸손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모두의 눈빛을 받았다.

    “뭐 저희도 윤진만 변호사님께서 수행하신 공로에 대해 다들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협상단원들은 저마다 훈훈한 눈빛으로 윤진만 변호사의 공을 칭찬했다. 

    그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주요한 협상 과정 국면에서 성진은 윤진만 변호사에게 큰 역할을 일부러 떠넘기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왔다. 

    성진의 은밀한 조언과 어시스트 덕에 큼지막한 역할을 해 온 윤진만 변호사는 이미 협상단 내부에서 만장일치로 인정하고 있는 일등 공로자였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윤진만 변호사는 겸양을 보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변변치 못한 저한테 이렇게 과분한 칭찬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협상단의 여러 훌륭하신 분 앞에서 감히 주름잡을 주제가 못 되는데 말입니다.”

    너스레를 떨면서 엄살을 피우는 윤진만 변호사를 보면서 협상단원들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저로서도 여러분으로서도 이번 협상 과정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명심하면서 본래 가진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성과와 여러분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윤진만 변호사는 적당한 겸손을 보이면서 다른 협상단원들에게 슬쩍 공을 돌렸다. 

    적절한 겸손이야말로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는 일. 

    성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 윤진만 변호사는 성진과 짧은 눈빛을 교환했다.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면 그때부터 윤진만 변호사는 대통령 선거 출마라는 커다란 도전을 향해 달려야만 했다. 

    성진과 윤진만 변호사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조용히 얽히는 사이 기내에서 기장의 굵직한 안내 방송 음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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