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60화 (160/185)
  • <-- 160 회: 7권 - 열도 파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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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정수 기자가 대중일보 사무실로 엠바고가 걸린 긴급 특종 기사를 송달한 지 얼마 후. 

    일본 총리는 일본의 정재계는 물론 국가와 국민, 그리고 전 세계에 의미 있는 변화를 줄 혁신적인 내용을 발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단상 위에서 일본의 현 총리인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낭랑하고 힘 있는 음성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친애하고, 존경하는 일본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일본이라는 국가가 앞으로 동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지에 대해 깊은 고민과 반성을 거듭한 후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일본 국민들의 소중한 한 표가 모여 이 자리에 당선된 사람으로서 늘 각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다소 상투적인 연설 도입부가 지나고 드디어 본론이 나올 때가 임박했다. 

    일본 정부가 사전에 중대 발표라고 연이어 홍보를 해 놓았기에 일본 기자들과 특파원들은 가슴 가득 기대감을 안고 새로운 특종에 대해 듣고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들려온 총리의 발표문은 그들의 청력을 순간이나마 의심스럽게 만들 정도로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과거 대한민국에 대한 식민 지배 과정에서 일어났던 위안부 문제, 그리고 강제 징용 등의 피해자들이 입었던 피해에 대해 사과하며 과거 일본 제국 시절 일본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놀라운 발표문이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의 입에서 떨어지자 좌중은 충격으로 술렁거렸다. 

    개중 가장 보수적인 매체에서 일하는 기자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연신 입을 벌린 채 사방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반면에 어느 정도 진보적인 면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역사를 바라봐 왔던 매체에 근무했던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총리대신 각하! 도대체 당신이 방금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는 있습니까? 당신이 하는 말로 인해서 이 나라 일본이 범죄자 국가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멍에를 씌울 작정이요!”

    몹시 흥분한 기자 한 명이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에게 바락바락 고성을 지르기까지 했다. 

    장년의 그는 머리가 희끗희끗한데다 대기자로서 오랫동안 카스미가세키를 출입해 온지라 많은 일본 기자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도 그 기자의 이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이요 신보의 야마무라 켄쇼인가?’

    올해 나이가 육십을 바라보는 그는 다이요 신보라는 지극히 보수적인 매체에서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해외에서는 꼴통 취급을 받을 정도로 일제강점기와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해 미화를 쏟아내는 사설을 쓴 적이 있을 정도로 편향된 역사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허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정부가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온 과거 역사에 비춰 볼 때 일개 기자가 총리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호통을 치는 것은 최근 일본에서 전례가 없었다. 

    그 정도로 지금 이 백발 노기자는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의 발표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대경실색한 발표장 경호관들이 그를 끌어내려 했지만 총리는 한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고 재차 말을 이었다.

    “다이요 신보의 야마무라 켄쇼 기자가 맞소?”

    “그렇소! 난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전후 일본의 정신을 고취시키고 국민들의 자부심을 북돋아 주기 위해 기자로서 애를 써 왔소! 그런데 총리 당신은 지금 일본 국민들의 자부심을 팽개치고 있어!”

    그 말을 들은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표정을 굳히더니 힘주어 말했다.

    “아니요, 야마무라 켄쇼 기자. 난 일본 국민들의 진정한 자부심을 지켜 주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용기를 내고 있는 겁니다.”

    “용기? 지금 일본의 자랑스러운 대동아 공영을 모욕하는 주제에! 용기라니!”

    노호성을 터트리는 야마무라 켄쇼 기자 앞에서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국민 여러분! 우리 일본 국민들은 그동안 저를 비롯한 정치가들의 그릇된 판단으로 잘못된 역사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그동안 일본 제국 시절 우리가 동아시아 국가에 끼친 만행은 그들 국가가 주장하는 그대로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총리의 직권으로 기밀문서들을 해제하는 바입니다.”

    곧 총리의 손짓을 본 보좌관들이 굳은 표정으로 두터운 서류 가방을 여럿 들고 단상으로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본 좌중의 시선은 엄청난 흥분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동안 일본 정부가 일본 제국 시절의 만행에 대해 직접 인정하고 그 증거 문서들까지 공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도리어 내가 당할 수 있다.’

    기왕 호랑이 등에 올라 탄 이상 확실하게 성큼성큼 앞서 나가야 한다.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의 적이 어떤 이들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일본의 과거와 치부를 드러내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이들. 

    미화된 과거를 국민들에게 주입하면서 자신들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자들.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의 적은 바로 그들이었고, 그들이 찍소리도 못할 만큼 확실하게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일본 제국 시절 관동군의 생체 실험 만행과, 만주 지역에서 행한 학살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러분.”

    그 기록이 공개되자마자 해외 특파 기자들, 특히 중국에서 온 기자들이 얼굴이 벌게진 채로 흥분해서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중국이 관동군으로부터 당한 난징대학살은 중국인들 마음속에서 언제나 공분을 자아내는 서글픈 역사이자 전 국민적인 아픔이었다. 

    지금 그 증거가 눈앞에서 드러나자 눈물을 흘리는 기자들도 있었다.

    “여러분! 저는 이 나라의 정치가로서, 언제까지나 국민 여러분에게 거짓된 역사를 가르치면서 주변 국가들로부터 진정한 우정을 끌어내지 못하는 거짓말투성이의 변명을 끝내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 일본은 주변 국가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합니다.”

    “사과라니! 대동아 공영을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왜곡하는 거요, 총리!”

    “총리가 되고서 어떻게 이 나라 일본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할 수가 있어!”

    보수적인 매체의 기자들이 분노로 들끓는 와중에 총리를 비난했다. 

    그러나 총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사과는 꼭 필요합니다. 일본은 늘 아시아의 리더가 되기를 열망해 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경제력과 기술력이 우수하다고 해서 아시아의 리더로 인정하는 국가가 몇이나 있습니까? 과연 그들이 모두 사악하고 이기적이라서 이 나라 일본에 사과와 배상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치가들은 국민들에게 잘못 미화된 역사를 가르치면서 올바르게 판단할 기회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것은 국민들의 자부심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할 용기를 빼앗았습니다. 또 이웃 국가들과 진정한 신뢰 관계를 구축할 기회마저 빼앗았습니다. 이제 저는 국민 여러분에게 잘못된 정치로 인해 빼앗아 간 권리를 돌려 드리고자 합니다.”

    용기 있게 일본을 위하는 자신의 명분을 밝히는 듯한 모습의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살짝 눈물이 맺힌 표정으로 단상을 내려왔다. 

    그러면서 주변의 반응과 앞으로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계산을 치밀하게 계속했다.

    ‘좋아. 이렇게 시작하는 거다. 앞으로는 결국 여론에 달려 있다.’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일본을 위해 진실을 밝힌 자신의 용기와 그로 인한 국민들의 충격 그리고 거짓된 역사 교육을 강조해 온 기존 정치 세력과 자신의 차별화에 대한 복안과 구상이 철저하게 짜여져 있었다. 

    이 계획은 성진이 준 usb 메모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기도 했다.

    ‘후후. 한국에서 온 사업가라고 했나? 예사 사업가는 아닌 거 같던데…… 어쩌면 한국 정부의 심복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상관은 없다. 

    이제 계획대로만 된다면 향후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오직 자신만을 따르는 정치가들만을 모은 새로운 정당을 창설할 예정이었다.

    ‘좋아. 이제 시작이다.’

    보통의 정치가라면 결코 하지 않을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선택. 

    그러나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성공할 확률도 매우 높다고 보았다. 

    그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일본은 확실히 변할 것이다. 

    그 개인은 일본의 정계를 죽을 때까지 지배하다시피 하게 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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