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회: 7권 - 열도 파란 -->
“그동안 우리나라 정부와 국민들은 일본의 과거사 배상 문제 및 사과에 대해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예. 그랬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일본이 급속한 우경화 바람을 타면서 옛 식민 지배 상황을 미화하는 발언들을 연달아 했고 그래서 우리 국민들과 일제 식민 지배 피해자분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 피해를 겪은 모든 국가가 성토하며 비판하는데도 일본은 고집을 꺾지 않고 있었지요.”
“그래서 저를 비롯한 협상단은 이번에 방사능 기술 거래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과거사 청산 또한 같이 요구했던 것입니다.”
녹음기의 작동 상태를 점검하면서 곽정수 기자는 성진의 눈치를 살폈다.
엄연히 녹취가 되고 있는 이 대화는 향후 공식 기록으로 사용될 것이다.
성진이 말하기 곤란해 할 만한 질문은 애당초 최대한 피해 주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 곽정수 기자의 눈치를 알아차린 성진은 빙그레 웃으면서 미리 편하게 마음을 풀어 주었다.
“괜찮습니다. 궁금한 건 얼마든지 물어봐도 좋습니다, 곽정수 기자님.”
“하핫. 그러시다면 실례지만 궁금한 건 몽땅 물어보겠습니다 한성진 회장님.”
“예. 부담 갖지 말고 물어보세요.”
성진은 곽정수 기자가 어느 정도 민감한 질문을 하는 것도 용인해 줄 생각이었다.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곽정수 기자가 궁금해 할 만한 질문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만한 질문거리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방사능 기술 거래를 통해 일본 정부에게 일종의 압력을 행사하신 건 아닙니까?”
“압력이라기보다는 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호소였다는 게 옳을 거 같군요. 뭐 방사능 기술 관련 안건을 말한 것이 사실이긴 했지만 결코 그 이유로 일본 정부가 우리의 요구를 들어 주기로 한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역사의식에 대한 올바른 공감대가 통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성진으로서는 밖으로 알려져도 크게 문제가 없는 선에서 인터뷰 내용을 마무리했다.
받아 적는 곽정수 기자도 굳이 민감하고 예민한 의문을 연달아 던질 생각은 없었다.
국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동안 옹고집 쇠심줄로 일본 우익의 억지 주장을 되풀이해 오기만 하던 과거 답답한 현실 속에서 드디어 전환점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일본 정부가 확실하게 자신들의 과거 과오로 가득한 역사를 인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한일 외교 관계의 거대한 변화이자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로 인해 향후 일본 각계의 반응은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아무래도 논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논란이 두려워서 옳은 길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역사의 물꼬를 트는 중대한 일인 만큼 확실하게 관철해 나가도록 양국이 모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성진의 힘 있는 단호한 어조에 곽정수 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럼 협상 과정에 이르는 다른 에피소드라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곽정수 기자는 그 외에 다른 기삿거리가 될 만한 흥밋거리를 부지런히 성진에게 물어봤다.
그때마다 성진은 다른 방에서 쉬고 있던 다른 협상단 단원 및 수행원들에게까지 찾아가 질문하면서 최대한 곽정수 기자가 흥미를 가질 만한 기삿거리들을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제공해 주기까지 했다.
인터뷰가 마무리 되어 갈 즈음 성진은 마지막으로 곽정수 기자를 보면서 단서를 달았다.
“윤진만 변호사님의 역할이 이번 협상에서 아주 중요했다고 밝혀 두겠습니다.”
“윤진만 변호사님이요?”
“예. 윤진만 변호사님이 협상 과정에서 수행하신 역할에 대해서는 따로 첨부해서 정리해 보내 드리겠습니다.”
성진은 곽정수 기자를 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윤진만 변호사가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야 일개 변호사에 불과합니다. 다른 협상단원분들이 워낙 훌륭하셨으니까요.”
민망한 나머지 겸손을 보이는 윤진만 변호사였지만 성진은 계속 단호하게 윤진만 변호사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아닙니다. 윤진만 변호사님은 저희 협상 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성진은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그러는 성진을 보면서 곽정수 기자는 왜 하필 성진이 자신을 이 타이밍에 이렇게 부른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곽정수 기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회장님. 제가 외람되지만 감히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성진은 그런 곽정수 기자의 눈치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도 한성진 회장님께서는 윤진만 변호사님에 대해 특별한 기대를 걸고 계신 모양이군요?”
곽정수 기자는 말을 하면서도 가볍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널찍한 vip 스위트 룸.
방 안에는 성진과 곽정수 기자, 윤진만 변호사 세 사람뿐이다.
곽정수 기자는 눈앞의 두 사람을 보면서 자신이 지금 입에 올리는 이야기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리고 그 의심이 반쯤 사실임이 성진의 대답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맞습니다. 저는 윤진만 변호사님께 아주 특별한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구체적으로 밝힐 수가 없군요.”
성진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곽정수 기자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더 이상 묻는 것은 사족이었다.
‘이쯤 들었으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면 기자가 아니지.’
곽정수 기자는 거기까지 질문을 하고 마무리했다.
“알겠습니다.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다만 개인적인 호기심이었거든요. 방금 드린 질문은 기사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곽정수 기자님.”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저야말로 번번이 한 회장님께 이런 특종을 신세지다 보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물론 앞으로도 곽정수 기자님의 신세를 종종 질 일이 있을 거 같네요. 그때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그럼 전 이제 제 방으로 돌아가서 기사를 마저 작성하겠습니다.”
“보도 기간 엠바고는 반드시 지켜 주십시오. 일본 정부가 발표하기로 한 시각과 동시에 기사화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믿고 불러 주셨는데 그런 약속은 철저하게 지켜야지요. 절대 약속을 어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믿어만 주십시오.”
곽정수 기자의 호언장담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곽정수 기자님.”
성진의 당부를 전해 들은 곽정수 기자는 그대로 소파에서 일어나 스위트 룸을 나섰다.
객실 복도를 지나서 자신이 묵고 있는 숙소로 들어가 외출복을 벗으면서 곽정수 기자는 성진과 윤진만 변호사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항간에 윤진만 변호사가 잠룡으로 거론되면서 뜨고 있었지?’
정치 경력은 전무하다시피 한 40대 초반의 검사 출신 변호사.
하지만 최근 사회와 국민들은 윤진만 변호사의 행보에 크게 주목하면서 정치가 후보로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여론의 향배가 윤진만 변호사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한성진 회장이 그 윤진만 변호사에게 공을 돌리려 하고 있다는 건…….’
여기까지 깨달은 이상 곽정수 기자는 앞으로 어떤 그림이 펼쳐질지 대충 수를 읽을 수 있었다.
‘차기 대통령 선거는 볼만하겠군. 이거 윤진만 변호사에 대한 특집 기사도 따로 준비해 놔야겠는걸?’
곽정수 기자는 일본으로 와서 특종 한 가지만 얻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일거양득의 대박 소득을 얻은 기분이었다.
‘역시 한성진 회장 같은 거물이 부를 때마다 이런 대박 기삿거리가 들어오는군.’
앞으로도 곽정수 기자로서는 한성진 회장의 기사 제보가 연이어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곽정수 기자는 가슴 가득 기대감을 품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샤워 물이 슬슬 여독으로 피곤해지는 곽정수 기자의 전신을 기분 좋게 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