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회: 7권 - 열도 파란 -->
어둠이 사방을 물들이기 시작한 도쿄의 저녁.
비행기가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짐을 챙긴 곽정수 기자는 출국 게이트를 지나자 혹시 자신을 마중 나온 사람이 있는지 기대했다.
하지만 서서히 걸으며 눈치를 봐도 출국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이는 없었다.
‘하긴. 비밀 방문인데 뭘 기대한 거야.’
성진의 갑작스러운 기사 제보 제의로 나는 듯이 달려온 곽정수 기자였다.
자신의 방문이 아무도 모르게끔 비밀로 해 달라는 요구도 받은 차였다.
그 때문에 자신의 출장 경비를 승인해 준 부장과 편집장 외에는 같은 신문사의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일본에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
대내비로는 그저 지방 출장으로만 처리되었지만 지금 이렇게 하네다 공항에 발을 디딘 곽정수 기자의 목적지는 성진과 협상단이 묵고 있는 트래블랜딩 호텔이었다.
바쁜 걸음으로 서둘러 출구로 나간 곽정수 기자는 주저 없이 택시 승강장으로 다가갔다.
하네다 공항이 비록 도쿄 중심 시가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항이긴 했지만 택시를 타고 도쿄 중심가로 가면 요금을 최소한으로 잡으면 8,000엔, 우리 돈 8만 원이 든다.
기자 월급으로도 상당한 부담이지만 지금 곽정수 기자는 대중일보 신문사의 출장 경비 지원을 받고 있으니 영수증만 끊으면 되는 상황이라 망설이지 않았다.
더욱이 특종을 안고 돌아갈 몸이신데 뭐가 대수랴.
“도쿄 쪽 트래블랜딩 호텔 앞까지 갈 수 있습니까?”
유창한 일본어로 택시 기사에게 질문한 곽정수는 곧 기사가 트렁크를 열어 짐을 싣는 동안 택시 뒷자리에 타서 생각을 정리했다.
‘한성진 회장이 부르는 일이라면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닐 텐데…….’
곽정수 기자의 뇌리 속에 성진이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 독도 문제뿐만 아니라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식민지 침략 지배 문제에 대한 내용까지 한꺼번에 다뤄질 것입니다.
지금껏 성진은 곽정수 기자에게 늘 불세출의 성공 가도를 달려가는 굉장한 능력의 기업가로 비쳐졌다.
그런 성진이 이제는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까지 일본에게서 답변을 이끌어 냈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한성진 회장이 이제는 정치적인 거물까지 되는 건가?’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는 엄연히 외교 차원의 문제다.
개인적인 의견 표시라면 모를까, 일본 정부에게서 사과를 받아 낸다는 건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일개 기업가인 성진이 함부로 접근할 만한 문제가 아님에도 성진에게서 그런 자신만만한 선언이 튀어나온 것은 이번 협상단 방문이 절대 방사능 제거 문제만은 아닐 것이라는 확실한 직감이 들었다.
‘뭐, 한성진 회장이 그렇게 거물이 되어 간다면 내 입장에서는 나쁜 일이 아니지.’
곽정수는 장차 대기자, 나아가 대중일보의 편집장을 노리는 입장이었다.
그런 곽정수가 성진 같은 엄청난 거물과 사적인 친분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장차 편집장이 되는 데 힘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편집장이 되어서도 상당한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다.
거기에 성진은 지금까지 곽정수 본인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무리하거나 부담이 되는 일은 단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이번 일도 특종을 거저 주겠다는 자리가 아닌가.
‘언제나처럼 내가 한성진 회장을 지원사격 하면 되는 일이겠지?’
곽정수 기자는 가슴 가득 기대감을 품고 택시 시트에 몸을 기댔다.
짧은 비행시간이었지만 늦은 저녁인지라 몸이 고단할 법도 할 텐데 곽정수 기자는 특종에 대한 열망과 기대감으로 피곤을 잊어버린 상태였다.
비록 등은 택시 시트에 기댄 상태였지만 두 눈에는 특종에 대한 기대감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한성진 회장님! 제발 초대박 특종일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발 특종이어야 한다고!’
특종을 열망하는 곽정수 기자를 태우고 택시는 하네다 공항 정문으로부터 네온 사인이 번쩍거리기 시작하는 도쿄 중심가를 향해 빠르게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 * *
곽정수 기자가 탄 택시가 트래블랜딩 호텔 근처에 도착했다.
먼저 내린 기사가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 주는 동안 곽정수 기자는 느긋하게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때 호텔 정문에서 정장을 차려 입은 남자가 곽정수 기자에게 다가왔다.
“곽정수 기자님이십니까?”
그 말에 곽정수는 즉시 옆을 돌아봤다.
기자로서의 직감과 특유의 본능 때문인지 곽정수는 최대한 티 내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신중하게 살펴봤다.
평범한 외모에 높낮이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말투.
위압감도 친근감도 느껴지지 않지만 묘하게 경계심을 사지 않는 절제된 움직임.
갓 30대가 된 듯한 단발머리의 젊은 정장 차림 남성을 보면서 곽정수 기자는 대충 감을 잡았다.
‘이 사람…… 훈련된 사람이구나.’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정부와 각 기관을 출입하면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절대 티를 내지 않고, 특히나 경계심을 사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다가가 접촉하는 사람들.
곽정수 기자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지만 어떤 사람들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보 조직 쪽 사람이 틀림없다.’
곽정수 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에 긴장했다.
포커페이스가 깨졌다는 것을 본인도 느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한 곽정수 기자를 보면서 젊은 남자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걸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저는 곽정수 기자님을 마중 나온 사람입니다.”
“마중이요?”
“그렇습니다. 한성진 회장님의 연락을 받고 오셨지요?”
그 말에 곽정수 기자는 다소 얼굴이 풀어졌다.
“예. 그렇습니다. 한성진 회장님이 보내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예. 알겠습니다.”
택시 기사로부터 짐 가방을 받아 든 곽정수 기자는 서둘러 호텔로 따라 들어갔다.
* * *
젊은 남성을 따라 호텔로 따라 들어간 곽정수 기자는 엘리베이터와 객실 복도를 거쳐서 vip 스위트룸으로 안내되었다.
스위트 룸의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와인 몇 병을 구비해 놓고 앉아 있는 성진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곽 기자님. 오시는 데 고생은 없으셨습니까?”
성진의 너스레에 곽정수 기자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별 말씀을요. 저야 한 회장님께서 불러 주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달려와야지요. 하하핫.”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저도 곽 기자님의 기사로 인해 많은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시다면야 저로서도 기쁜 일이지요.”
곽정수 기자의 너스레를 성진이 적당히 받아 주면서 대화는 시작되었다.
슬슬 눈치를 보면서 본론으로 빠르게 넘어가기를 바라는 곽정수 기자의 표정을 읽은 성진은 이 자리를 만든 진짜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독이 편치 않으실 텐데 여장을 푸시기도 전에 이야기를 들으셔도 괜찮겠습니까?”
“아이고 여독이라니요. 서울에서 도쿄까지 비행기 타니 지척입니다. 전 하나도 피곤하지 않으니 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녹음기와 수첩을 꺼내면서 두 눈을 말똥말똥 뜨는 곽정수 기자를 보면서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일본이 독도 문제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 것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 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곽정수 본인으로서는 그간 한일 외교 문제의 뜨거운 감자이자 국민과 일제 피해자분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아프게 해 왔던 문제가 해결될 조짐을 보이는 것이 못내 흥분되고 기대가 되었다.
기자로서 전 국민적 관심사가 변화할 단초를 최초로 취재한다는 것은 단순한 특종을 넘어 직업적 사명감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