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회: 6권 - 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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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대신과 만나기로 했던 약속 장소는 도쿄 나가타초의 총리 관저로부터 가까운 작은 음식점이었다.
나가타초라고 하는 말은 일본 사회에서 국회의원이나 국회 그 자체를 지칭하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인지 작은 음식점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이 자주 찾은 기념 사진이나 명패, 방문 기록 등이 빼곡하게 벽면 한쪽을 채워넣고 있는 기묘한 느낌의 가게였다.
‘이런 식으로 가게를 홍보하려는 것인가?’
성진은 그런 벽면을 보고서 이 가게가 정작 일본의 국회의원들보다는 이 나가타초 지역을 찾은 다른 지역의 방문객들이나 외국의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홍보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했다.
근처의 국회의원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면 이렇게 굳이 대놓고 국회의원들의 방문 기록이나 횟수 등이 훤히 드러나도록 전시까지 해 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작은 가게에 그런 기념사진 등을 일부러 전시해놓다 보니 어떤 면에서는 품격이 떨어져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면 여러 가지로 아늑한 분위기에 제법 운치가 있어 보이는 가게였다.
성진은 총리 대신을 기다리기 전에 아침을 걸러 허기진 자신의 수행원들을 챙길 겸 간단한 식사류 등을 주문하기로 했다.
“여기서 뭐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만한 것을 주문하세요.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성진의 말에 양 옆에 앉아 있던 경호 요원들과 수행원들이 가볍게 사양의 뜻을 전했지만 결국 성진의 강권에 간단한 식사류등이 주문되었다.
성진이 미리 계산하려 카드를 건네려 하자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며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핫! 한 성진 회장이시오? 그 식사 비용은 내가 계산하도록 하지요.”
현관 쪽 계단 아래에서 아직 상대방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목소리. 목소리에는 고저도 없고 상대방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 하는 듯한 천진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성진은 그의 몸 전체에서 오랜 정치 생활의 관록이 배인 듯한 권력의 패기를 분명히 느꼈다. 권력의 정점을 향해서 오래도록 탐하고 추구하면서, 또한 그 것을 어느 정도 성취해보기까지 한 인간만이 뿜어낼 수 있는 권력가 특유의 오만함.
성진은 거기까지 목소리를 읽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총리 대신께서 드디어 오셨군요. 저는 한국에서 온 한 성진이라고 합니다. 저에 대해서는 많이 들으셨을 것으로 압니다.”
성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후후. 내가 고개를 숙인 것은 예의상 방금 한번 뿐입니다. 총리.’
성진이 속으로 읊조리는 사이에 어느새 현관 계단을 타고 올라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총리 대신이 성진을 바라봤다.
바로 고개를 든 성진은 눈 앞의 자신만만해 보이는 나이 든 정치인을 바라봤다.
그동안 언론과 미디어에 노출된 총리 대신의 모습은 수도 없이 봐왔지만 자신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총리 대신의 직접적인 모습에는 연출된 사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야심과 권력욕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었다.
성진은 그런 총리 대신을 보면서 오늘의 협상이 절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심했다.
‘후후후. 적어도 자기 자신의 욕심이 우선인 사람은 원하는 것만 보장한다면 다루기 어렵지 않다.’
성진은 그가 그 자신의 조국인 일본에 대한 충실한 애국심이라든지 기타 다른 이유로 성진의 예상을 벗어나는 입장에 서지 않을까 우려 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개인적인 권력욕과 사리사욕에 충실한 인간이라면 성진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과 가장 원하고 탐욕을 드러내는 부분만 만족시킨다면 될 일이었다.
성진은 이 협상을 자신의 뜻대로 완전히 이끌어나갈 자신감이 확실해졌다.
“처음 만납니다. 한 성진 회장. 나에 대해서는 당신도 미리 잘 알고 있겠지만 이 일본의 총리 대신을 맡고 있는 사람이오.”
총리 대신은 옷매무새를 가볍게 가다듬고 특유의 오만한 자세로 성진에게 악수를 건넸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 나라의 총리 대신. 타치바나 케이타라고 하오.”
성진은 그런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에게 마주 손을 건네면서 당당한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지요? 제가 누구인지도.”
“물론이요.”
간단히 대답한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등 뒤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아 보시겠소? 나의 가장 중요한 부하 직원인데 말이오.”
성진이 뒤쪽을 바라보자 그 곳에는 엔도 츠요시가 서 있었다.
비록 몸 곳곳에 붕대와 깁스를 하느라 불편한 자세로 우두커니 선 채 성진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닌자 가문의 후예라는 자존심 하나로 억지로 아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성진은 그런 엔도 츠요시를 슬쩍 바라보았다가 간단하게 부정해버렸다.
“글쎄요. 저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부정하는 성진의 말을 들은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이채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성진을 노려보았다.
“오호. 그렇습니까?”
성진은 그러는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엔도 츠요시를 저렇게 만들어 놓았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마지막 순간에 결국 마츠시마 장관을 확보한 사람은 총리 대신도 여당의 총재도 아닌 결국 성진인 셈이었다.
성진의 면담 요청과 동시에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 왔으니 자신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 성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인정해 줄 수는 없지.’
성진은 총리의 의심을 대놓고 만족시켜줄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가 가장 고대하던 선물은 내 줄 생각이었다.
“참. 이 자리에 아주 어렵게 모신 손님이 와 계십니다.”
성진의 말 속에서 무언가를 느낀 총리 대신은 드디어 오늘의 메인 디쉬가 나오는 것인가 하고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그 손님은...”
“그렇습니다. 바로 이 분이시지요.”
성진이 뒤로 눈짓을 하자 큰 벙거지 모자를 쓴 채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장년 남자가 안경을 쓰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마츠시마 장관! 그 동안 어디 있으셨습니까.”
총리 대신이 한달음에 달려 나가며 손을 잡으려 하자 마츠시마 장관은 몇걸음 뒤로 물러나 총리의 손을 거절했다.
“죄송합니다만 총리 대신 각하. 저는 말씀을 듣기에 앞서 총리 대신께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마츠시마 장관의 태도를 본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성진을 돌아보면서 노려 보았지만 정작 성진은 모른 척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아니 이렇게 다시 만났는데 무슨 물어볼 것이 남았단 말이오? 그러지 말고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부터 소상히 말을 나눠 봅시다. 자아 어서..”
마츠시마 장관을 끌고 들어가려 하는 총리 대신의 손길을 슬쩍 뒤로 물러나 물리치면서 마츠시마 다사키 장관 본인은 강한 어조로 따져 물었다.
“먼저 총리 대신 각하. 저의 몸 속에 있었던 의문스러운 발신기 장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이유로 숨겨져 있었던 것인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아, 아니 그 것은...”
총리 대신은 마츠시마 장관 본인이 자신의 몸 속에 있던 발신기에 대해 물어오자 약간 당황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노련한 베테랑 정치인답게 뻔뻔한 안면몰수로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을 상대했다.
“그거야 마츠시마 장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한 고육지책이었소. 그 덕분에 이렇게 마츠시마 장관이 발신기의 신호를 추적하여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 않소?”
총리 대신은 자신의 행동이 모두 마츠시마 장관을 위한 것임을 주장했지만 정작 그 발신기가 자신도 모르게 숨겨진 채 감시당했던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 본인으로서는 진의가 의심스럽기 그지 없는 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발신기를 숨겨놓고 모든 게 자신을 위해서라고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정말 죄송하고 황송합니다만 그런 말씀은 갓 소학교에 들어가는 어린 아이도 듣지 않을 유치한 변명으로 들립니다 총리 대신 각하. 총리 대신 각하께서 그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향후 정국에 있어서 총리 대신 각하께 어떠한 도움도 드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단호하게 말을 끊는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을 보면서 총리 대신은 잠깐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솔직히 사실을 진술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그렇소. 내가 마츠시마 장관을 감시하려고 발신기를 심어 놓았던 것이 사실이오. 내가 처음부터 마츠시마 장관을 중용한 것도, 또 방사능 제거 기술 도입에 관련하여 추진을 위한 첨병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오.”
총리 대신의 솔직한 말에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은 설마 하며 짐작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결국 저를 희생양 내지 장기 말로 삼으시려고 했던 것이군요. 목숨을 바쳐서 총리 대신 각하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말입니다.”
자신은 일본 국토의 안전과 일본 국민들의 안전한 미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과정들이 사실은 총리 대신의 정치적인 야심을 위한 것이었다는 게 직접 드러나자 마츠시마 장관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신념이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강요된 것이라는 사실이 유쾌하게 생각되거나 아무런 충격 없이 받아들여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별 수 없는 일이었소. 그보다도 마츠시마 장관 당신에게도 요긴한 일 아니오? 어차피 방사능 제거 기술 도입은 정치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나같은 사람이 마츠시마 장관 당신을 지원해야만 성사될 수 있는 일이오. 당신은 후손들의 미래와 건강을 위해 방사능 제거 기술 도입을 주장해 왔었는데 그 목적을 실현시켜줄 존재인 나한테 감사를 청해야 할 것이오.”
도리어 뻔뻔하게 마츠시마 장관에게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총리 대신을 보면서 마츠시마 장관은 실망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치적인 역량이 일천한 데다가 평생 기술 관료로만 살아 오면서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하고 좋게 말하면 정직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츠시마 장관의 표정을 본 총리 대신은 뒤늦게 사과의 뜻을 청했지만 감정이 퍽 상해버린 뒤의 일이었다.
“미안하오 마츠시마 장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내 진심으로 사과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국가적인 대의를 위해서는 마츠시마 장관도 내각의 주요 요인으로서 책임과 일익을 맡은 것이라 생각해 주시오. 그러자면 당연히...”
중언부언 말이 길어지는 총리 대신의 변명을 들으면서 마츠시마 장관은 돌연 짧게 말을 끊었다.
“그만 됐습니다. 어차피 저 역시 총리 대신 각하의 요구대로 방사능 제거 기술 도입을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할 사람이니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마츠시마 장관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자 총리 대신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로서는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마츠시마 장관이 자신에게 전격적으로 협력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마츠시마 장관의 말은 그로서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대신에 저도 조건을 좀 걸어야겠습니다. 이는 방사능 제거 기술을 제공해 줄 한성진 회장, 아울러 대한민국의 정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최우선 사항이기도 합니다.”
슬쩍 성진을 바라보는 마츠시마 장관의 눈빛이 성진의 눈빛과 허공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자 총리 대신은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것이 무슨 요구 사항이길래 그러는 것이오? 어서 말을 해보도록 하세요.”
“그건 바로...”
마츠시마 장관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을 살짝 망설이자 성진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말했다.
“제가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는 가운데 성진은 또박또박 자신의 뜻을 전했다.
드디어 자신을 비롯한 협상단이 이 일본에 온 가장 중대한 목적이 뚜렷하게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저희의 방사능 제거 기술을 일본에 도입하는 대가로 우리는 독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영유권에 대한 더 이상의 간섭 불가와 절대적인 포기 선언, 그리고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식민지 침략 지배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성진이 밝힌 말은 그동안 한일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뜨거운 화두이자 전통적인 양국의 분쟁 요소 중 하나였다.
그런 예민한 문제가 협상의 우선 조건으로 밝혀지자 듣고 있던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 대신은 기함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그, 그런.. 그런 조건을 내걸다니... 진심으로 한국의 정부가 그런 조건을 내걸었단 말이오? 한 성진 회장 당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꿈뻑이는 총리 대신을 보면서 성진은 여유롭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물론입니다. 총리 대신님. 우리는 이 조건을 위해 이 일본 땅에 직접 발을 디딘 것입니다. 절대 재고의 여지는 없으니 어서 선택하도록 하시지요.”
성진의 말에 타치바나 케이타 총리는 입을 떡하니 벌린 채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