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53화 (153/185)

<-- 153 회: 6권 - 대면 -->

성진이 제의했던 면담 날짜가 다가왔다. 약속한 당일 아침이 되자 협상단 중 성진을 수행하기로 한 인원들 몇몇이 차비를 마치고 객실 문을 나섰다.

“한 회장님. 저희는 준비를 마쳤습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시면 나오시길 바랍니다.”

경호를 맡은 국정원 요원이자 현장 책임을 자처하는 부장급 요원이 성진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성진이 직접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명령을 내리거나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지만 그들의 직접적인 주요 경호 대상이 성진인지라 경호 등의 협상 지원 업무는 거의 다 성진의 편의 위주로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협상단의 진행상황을 사실상 책임지고 지휘하는 당사자가 진이니만큼 모든 진행 상황에 있어서는 성진에게 형식적인 보고나마 빠지는 법이 없었다.

그런 의례적인 보고였지만 성진은 단 한 차례도 건성으로 듣지 않고 성심 성의껏 주변 사람들을 똑바로 마주 보면서 응대했다. 

“예. 그러면 저도 잠시 외출 준비를 하고 바로 나가겠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한 회장님. 저희는 잠시 나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성진은 잠깐 부탁을 한 뒤 가볍게 세수를 하기 위해 욕실에 들어갔다.

신속하게 간단히 몸을 씻은 성진은 즉시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의 기다림 후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김형석이었다. 

- 예 회장님. 장관님과 저는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 다음 지시만 내리시면 됩니다.

성진은 자신만만한 김형석의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좋습니다. 이제 숙소에서 나오세요. 오늘 김형석 씨가 장관님을 데리고 가야 할 목적지는 총리와의 약속 장소입니다. 가는 중간에 위험을 맞닥뜨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마츠시마 장관님의 신변에 위협이 생긴다면 바로 나를 불러주기를 바랍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려서야 되겠습니까? 오늘을 끝으로 이 일본에서의 지긋지긋한 고생을 마무리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다 후련합니다. 하하하하.

김형석의 쾌활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성진은 드디어 모든 일이 마무리가 되어간다는 실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성진의 뇌리를 먼저 채워나갔다.

“하지만 말 그대로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려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니 철저하게 각오해주셔야 합니다. 

성진은 마지막이 코 앞이라 해서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축구 골대까지 열심히 공을 몰았다가 갑작스럽게 닥치는 태클에 공을 뺐기는 것보다 어이 없는 일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물론입니다. 방심해서 당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마츠시마 장관님을 철저하게 보호해드리겠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김형석의 호언장담에 성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그럼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도록 하지요.”

- 예.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제 목숨과 바꿔서라도 임무를 달성해 보일테니 회장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김형석의 간곡한 말에 성진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하하. 여기까지 와서 무슨 목숨 타령을 입에 올립니까. 절대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지요. 모든 일들이 다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으니까요. 어차피 오늘 하루만 제대로 긴장해주시면 됩니다. 위험은 전부 걷혔다고 보셔도 무방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진은 김형석을 적당히 달래면서 기분 좋게 말을 받았다. 비록 주의는 주었지만 목숨을 바쳐서라도 임무를 달성해 보이겠다는 김형석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내가 가족들을 구할 돈을 건네줬기 때문이겠지...’

성진은 김형석이 왜 자신에게 충성심을 보이는지 그 이유를 가족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첫 만남부터 악연이라 할 수 있었고 성진의 강제적인 요구로 시작된 관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형석은 성진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 성진이 그 당시 즉석에서 건네준 10억이라는 커다란 금액이 아니었다면 김형석은 가족들을 수용소에서 탈출시키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점에 생각이 미친 성진은 생각난 김에 김형석에게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수용소에 갇혀 있는 가족들 소식은 진전이 좀 들려 오고 있습니까?”

- 아.. 예. 

그 질문을 듣자 김형석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흥분과 기쁨이 감도는 것이 휴대폰 너머도로 느껴졌다. 

- 다행히도 수용소 안에 갇혀 있던 가족들과 연락이 닿았다고 합니다. 저의 어머니와 남은 동생들 모두가 살아 있는 것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기쁜 기색이 역력한 김형석의 목소리를 들으니 성진도 덩달아 기쁨이 느껴졌다. 

‘그래. 가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 했으니 더 할 나위가 없겠지.’

성진은 그런 김형석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파격적인 제안을 건넸다.

“잘 되었습니다 김형석 씨. 아니 차영석 씨. 가족들이 입국한다면 당신이 정식으로 망명 탈북자 신분을 얻을 수 있도록 내가 힘을 써 보겠습니다. 더 이상은 김형석이라는 가명으로 살지 않아도 되도록 말입니다.”

- 그,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저는...

김형석은 성진의 뜻밖의 제안에 놀란 듯 말을 더듬었다. 사실상 자신의 원래 이름으로 살아가리라는 것은 포기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상당한 범죄 공작을 하면서 더러운 뒷세계에 몸을 담았던 전력이 있지 않았던가

성진은 그런 김형석의 망설임과 우려에 대해 추가로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김형석 씨가 범죄 사실에 연루되었던 전력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지고 반성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성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 휴대폰 너머에서 침을 꿀꺽 삼키는 김형석의 긴장감을 느낀 성진은 다시 말을 이었다.

“바로 김형석 씨가 방사능 제거 기술 협상을 위한 국가적 중대사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 주었다는 점입니다. 국가적인 공헌을 한 이상 김형석 씨의 죄가 경감될 수 있도록 정식적으로 대통령께 요청을 하겠습니다.”

성진이 믿는 것은 대통령의 사면권이었다.

자신이 모든 임무를 마무리하고 목표를 달성한다면 육정철 대통령은 한일 외교 역사의 지긋지긋한 골칫거리이자 문제였으며, 어떻게 보면 국가적으로 부당한 시비라고 할만한 독도 관련 문제를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그런 마당에 성진이 김형석의 거취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요청을 한다면 대통령의 고유 권한 중 하나인 사면권으로 김형석이 저지른 지금까지의 잘잘못들을 가볍게 처벌해 주도록 배려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 안에서는 여러 가지 법적인 절차의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겠지만 성진은 큰 문제가 있으리라 보지 않았다.

커다란 국가적 중대사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김형석의 역할이 상당한 기여가 있었음을 성진이 분명하게 피력한다면 육정철 대통령은 물론 내각의 여러 주요 인물들도 김형석의 존재와 과거를 기밀 처리하여서 보호해 줘야 마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만한 일에 대해 공을 세웠다면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지.’

성진은 김형석이 당연히 이 정도 대우는 받을만한 일을 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정작 성진의 말을 듣는 당사자인 김형석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 했던 파격적인 제안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정말이십니까? 정말로 제 신분을 보장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까? 한 회장님.

김형석은 성진의 제안이 쉽게 믿겨지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힘을 지닌 성진이라고 해도 비밀스럽게 밀입국한 채로 범죄 조직에 연루되어서 살아왔던 자신의 과거가 면천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오지 않았다.

그저 성진이 지급해 준 비밀스러운 신분으로 평생동안 어둠 속에 묻혀 살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성진이 갑자기 정식으로 신분을 회복시켜주겠다고 하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김형석 씨의 가족들이 대한민국 영토에 들어온 이후에도 가족들에게 진짜 이름을 숨긴 채 낯선 가명으로 나타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그야.. 말씀만으로도 저야 당연히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하핫. 적어도 김형석 씨가 이 일본 땅에서 나를 도와준 만큼은 보답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김형석 씨는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지만 이 곳에서 김형석 씨가 행했던 일들은 내 개인의 회사 일을 도운 것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커다란 외교 문제를 도운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더 큰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성진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김형석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회장님. 저에게 가치 있는 일을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진은 그런 김형석이 자신에게 감사의 말을 하는 것에 대해 공치사를 들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자신을 돕는 김형석이 스스로 당당한 자부심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이었다.

“나에게 감사하기보다는 앞으로도 올바른 마음으로 항상 가치 있는 일을 해나가며 살아갈 마음을 먹도록 하세요. 김형석 씨의 앞날을 밝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김형석 씨 뿐입니다. 지금까지 김형석 씨가 해 온 노력에 대한 격려일 뿐이니 나에게 지나친 감사인사를 해 올 필요는 없습니다.”

성진은 냉정하게 말했지만 그 안에 김형석에 대한 배려와 격려의 말 뜻이 충분히 담겨져 있었다.

그러한 성진의 본심을 알아차린 김형석은 감사의 말을 멈추고 말했다.

- 예. 그러면 이제 말씀하신 약속 장소로 마츠시마 장관님을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약속 장소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마츠시마 장관 외에 다른 누구에도 김형석 씨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예. 회장님.

성진은 그 말을 듣고 휴대폰의 전화 수신을 끊었다. 가족의 앞에 당당히 회복된 신분으로 나설 수 있다는 성진의 말에 기뻐하는 김형석의 목소리를 들으니 문득 성진은 생각나는 얼굴이 따로 있었다.

‘이런 참. 그동안 바빠서 영식이에게 크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구나.’

성진이 먼저 나서서 영식의 어머니를 찾아 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동안 여러 바쁜 일이 연이어서 쏟아지다시피 하다 보니 성진은 영식의 부모님을 찾는 일에 직접적으로 크게 전력을 쏟지 못하였다.

‘정작 내가 찾아주겠다고 나선 내 의동생의 부모님은 찾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가족은 구해주려고 하고 있으니..’

성진은 속으로 영식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씁쓸함을 느꼈다.

하지만 영식의 가족을 찾는 일에 대해 성진이 그동안 소홀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김형석에게 건넨 액수 못지 않게 심부름 센터와 각종 사람 찾는 일을 전문적으로 한다는 사립 탐정들을 대거 고용해서 영식의 어머니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 성진이었다.

김형석의 가족이 북한의 수용소에 있다는 정보는 확실하기 때문에 돈을 풀면 관련 장소를 드나드는 브로커들과 수용소의 수용자 명단을 확인하면 어떻게든 확인할 수 있는 범위만은 분명하기에 시도를 해볼 수는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구 수천만명의 자유로운 국가 대한민국에서 행방 불명이 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의외로 정말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성진에게 고용되었던 사립 탐정들과 갖가지 심부름 센터의 직원들은 곧바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을 했지만 영식의 부모님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방을 찾아 내는는 일은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한 두명에게만 맡겼다면 꾀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라고 의심을 할 수도 있지만 성진은 해당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을 동시에 고용해서 막대한 성과급으로 경쟁까지 유도했는데도 불구하고 뚜렷한 성과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일을 마무리하고 국내에 다시 들어간다면 영식이의 부모님을 찾는 일에 전력을 해봐야겠다.’

성진이 목표로 한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에는 윤진만 변호사를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성진은 아직 남은 육정철 대통령의 임기 동안 윤진만 변호사의 일은 자신이 원거리에서 적절히 지원을 해주고  영식이의 부모님을 자신이 직접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중요도로 치자면 다른 일이 훨씬 더 중요하겠지만 영식이의 부모님은 개인적인 약속이자 성진이 처음으로 거둔 사람이자 의동생인 영식이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참 기묘하군. 영식이를 거둘 때만 해도 그렇게 쉽게 내가 사람을 거두다니.’

애걸복걸하면서 무릎까지 꿇었던 다른 인물들, 예를 들면 정광호같은 인물은 성진이 개인적인 투자를 하며 업무적인 관계를 맺었을 뿐 결코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영식이를 거둘 때만 해도 성진은 처음으로 사람을 자신의 울타리로 거두던 시기였기 때문인지, 혹은 너무나도 불우하고 힘들어 보이던 영식이의 모습을 보고 측은지심이 생겨난 것인지 쉽게 자신의 의동생으로 삼지 않았던가.

‘그래. 이런 것이 인연의 기묘함이겠지.’

성진 스스로 받아줄 마음이 드는 존재. 철저하게 성진이 허락한 인연으로 시작되는 관계였다. 

그리고 영식은 성진이 직접 거둔 존재이자 인연이니만큼 영식이의 부모님만큼은 성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찾아줄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먼저 오늘 일부터 완벽하게 해결을 해야겠지.’

완벽하게 일을 마치리라 다짐한 성진은 욕실 문을 나서면서 서둘러 외출복을 챙겨 갈아입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