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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146화 (146/185)
  • <-- 146 회: 6권 - 일촉즉발 -->

    이와 동시에 자신의 일본 인맥을 자랑하며 자신감까지 표시했거늘 하재혁 회장은 연신 사방에서 조여드는 위기감에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한 말씀만은 지.켜.주.시.지.요. 어르신.”

    끊어 뱉듯 마지막 말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한 하재혁 회장의 말에 수화기 너머에서는 그 노인 특유의 느긋하고 야릇한 말투가 들려왔다.

    - 좋소. 당연히 지켜야겠지요. 하 회장. 이번에 상황이 나쁘게 흘러서 실망한 마음 내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 역시도 하 회장이 불안해하는 바에 십분 공감하는 바요.

    어르신은 하재혁 회장이 우려하는 바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역시도 성진과는 박천중 회장과의 일로 악연이 얽혀있는 몸이었다. 성진이 자신의 존재를 아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였지만 그가 아직까지 박천중과 같은 편에 서 있는 이상 언젠가 눈엣가시같은 박천중과 함께 치워버려야 할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 내 반드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한성진이 그 자를 치워버리도록 애쓰겠소. 내 약속드리지.

    어르신의 말에 하재혁 회장은 이전과는 달리 절대 마음을 풀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번에도 입에 발린 소리로 끝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지금 당하고 있는 상황이 너무 안 좋다보니 하재혁 본인은 일방적으로 손해만을 입고 있다고 판단이 들 정도였다. 

    때문에 어르신이 하는 말조차도 기본적으로 불신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성과를 보여 주십시오. 만약 이번에도 저에게 좋은 소식을 못 들려주신다면 그때는....”

    잠시 뜸을 들이며 숨을 몰아쉰 하재혁 회장은 분노가 섞인 음성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저와 어르신의 관계는 거기서 끊어진다고 봐도 좋으실 겁니다. 제가 어르신의 눈치를 살피고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많은 것들을 잃게 생긴 마당에도 눈치를 본다는 것은 도저히 안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엄포가 섞인 그 말에 수화기 너머에서는 숨을 몰아쉬는 것이 분명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 늙은이. 열 받은 게 분명하군.’

    하재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려 비웃음을 띄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다시 하재혁을 달래려는 듯 간곡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허. 이보시오 하 회장!

    “어르신. 저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하재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빌어먹을 늙은이! 어디 한번 두고 보겠어.’

    하재혁은 끊어버린 수화기를 노려보면서 이를 갈았다.

                        *     *     *

    끊어져버린 전화기를 붙잡고 노인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후-하. 감히 하재혁 이 놈이 나를 상대로....”

    노인은 분노로 가빠진 숨을 몰아 쉬었다. 아무리 국내 최고의 기업을 이끌고 있는 몸이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에게 이런 무례를 보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노인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나 다름없는 위치였던 하재혁으로부터 ‘어르신’이라는 존칭으로 불릴 정도이니 그 자신의 입지와 위상을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헌데 방금 하재혁은 그러한 암묵적인 예를 무시하고 자신에게 감히 시건방진 태도로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 보였다.

    명백히 노인을 향한 도발과 도전의 의사 표시가 분명했다.

    “이 자가 나를 상대로 척을 지겠다는 말인가?”

    하재혁은 분노로 이글거리려 하는 자신의 마음을 느꼈다.

    ‘이런 건방진!’

    허나 그와 동시에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심호흡을 들이켰다. 적들이 들끓는 무대에서 오랜 시간동안 이 지위를 지켜왔다. 흥분하는 순간 가장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노인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단은 실력을 보여 줘야 한다.’

    지금 상황이 조금 어지러워졌다고 해서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는 하재혁에게 한 수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일본이라면 내가 익히 잘 알고 있지. 후후. 한성진이라는 놈이 어찌 되고 나서도 감히 나한테 시건방을 떨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하재혁!”

    노인이 양 손을 강하게 움켜쥐자 두 주먹에서 자그마한 핏발이 돋아났다.

                        # *     *     *

    그 시각 성진은 김형석과 통화를 하면서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의 안부를 물었다.

    “장관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 예. 지금 막 잠드셨습니다.

    “하긴. 연로한 나이에 스트레스가 많았겠지요. 여간 난리가 아닌 날들이였으니까요.”

    - 예. 

    평지풍파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갑작스럽게 벌어진 위험하고 급박한 위협을 견디며 보낸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이었다.

    그저 식당에서 식사를 하러 들어갔을 뿐이었는데 살해 위협을 당하고  끌려다니시피 했으니 아직은 혼란스러운 기분일 것이다.

    - 그래도 며칠이 지나니 다소 안정된 듯한 모습입니다.

    “다행이네요. 잘 지켜드리세요. 어차피 일주일이라고 약속 드리기는 했지만 멀지 않았습니다. 곧 모든 상황이 끝나게 될 것입니다.”

    - 예. 회장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수고하세요.”

    막 전화를 끊으려는 성진에게 김형석이 다급히 말을 걸었다.

    - 저기 회장님. 앞으로 일이 생기면 연락을 드려야 할텐데 전화 추적이 우려 됩니다. 

    “지금 쓰고 있는 전화는 대포폰이 아닌가요?”

    성진이 김형석에게 미리 준비해 준 휴대폰은 대리 명의로 준비해놓은 여러 개의 대포폰이었다.

    혹시 모를 적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성진이 미리 안배해 놓은 대책이었다.

    하지만 김형석은 수준을 알 수 없는 일본의 막강한 전자전 능력과 추적 능력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 그렇기는 하지만 일본의 정보력이나 전자전 능력을 얕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일본이 가진 전자 추적 능력과 장비는 세계에서도 손 꼽을 수준이다. 그들의 추적기술과 능력에 대해서는 김형석이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던 시절에 늘 주입받던 내용들이었다. 

    - 계속 이런 식으로 연락을 주고 받으면 노출될 우려가 있을 거 같은데 따로 복안이 있으십니까?

    “아하. 김형석 씨가 뭘 걱정하는지는 대충 알겠습니다.”

    성진은 김형석의 우려와 걱정이 어떤 것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그런 김형석의 걱정은 정작 별 의미가 없는 기우였다. 

    “김형석 씨. 지금 내가 김형석 씨와 통화하고 있는 장비는 절대로 도청을 허락하지 않는 장비입니다. 지금 김형석씨에게 송신되고 있는 전파는 절대로 추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김형석씨로부터 수신되는 주파수 역시 일반적인 주파수가 아닙니다.”

    성진이 김형석에게 미리 지급해 놓은 대포폰에는 인공지능 팔찌의 나노 로봇이 심어져 회로를 조작해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보통의 주파수 추적이나 전자전 설비로는 성진과 김형석의 통화를 잡아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회장님만 믿고 차후에 안심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김형석은 성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성진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김형석만큼 막대한 혜택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거의 절망적인 심정으로 헤치며 돈에 갖은 오물을 묻히던 인생의 밑바닥에서 성진 덕에 그나마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확신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더욱 고마운 것은 성진이 마련해준 돈으로 가족을 구출할 희망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성진은 그런 김형석의 고마움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래요. 그러면 그렇게 알고 마츠시마 장관님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세요.”

    - 예. 명심하겠습니다.

    성진은 자신이 준비한 계획에 대해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 만사는 알 수 없는 법이라는 사실을 이번 일본행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다. 인공지능 팔찌의 감지 능력을 속이는 뇌파 발신기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위협한 일본의 고수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디서 난데없이 위급상황이 터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진은 김형석에게 더욱 당부할 수밖에 없었다.

    “김형석 씨. 혹시 모를 위험이 갑자기 닥치더라도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모든 것을 걸고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님을 지키겠습니다.

    “믿겠습니다.”

    - 예. 회장님.

    김형석의 약속을 듣고 성진은 전화를 끊었다.

    물론 어찌할 수 없는 위협이 닥칠 정도라면 김형석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겠지만 최소한 성진을 배반하고 자신이 맡기로 한 임무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리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이제는 성진의 든든한 오른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나중에 좀 더 큰 일을 맡아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성진은 맡고 있는 중책이 많다.

    물론 가장 확실한 해결수단이라면 성진 스스로가 나서는 일이겠지만 여기 저기에 많이 노출이 된 상태로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성진인 이상 따로이 무력을 투입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김형석의 존재가 그야말로 필수불가결하다.

    “좋아. 이제 슬슬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려볼까.”

    성진은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과 헤어지면서 제공했던 변장 용품에 나노 로봇을 은밀하게 심어뒀다. 

    곧 코와 입술을 통해서 들어간 인공지능 팔찌의 나노 로봇이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의 발신 장치를 내부에서부터 무력화시켰다. 

    현재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의 몸 속에서는 아무런 발신 신호가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지만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를 통해서 해당 발신 신호를 철저히 분석, 카피할 수 있었다. 

    때문에 성진이 원하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해당 발신 신호를 뿜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호가 성진에게 아주 확실한 기회를 제공해 줄 차례였다. 

    “이제 모든 상황에 대해서 확실한 매듭을 지을 때가 왔다.”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 상황을 좀 살펴봐.”

    -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의 주변 스캔으로 사방의 생명 반응과 대사 반응이 검출되었다. 성진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묵고 있는 객실과 주변 복도의 인물 상황들을 미리 입력해놓은 생체 정보에 맞춰서 훤히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잠든 밤이었지만 성진을 경호하는 국정원 경호요원이 문 근처 복도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대기 중이었다. 반쯤은 감시이기도 했다. 비록 약 50분 정도 위치 확인이 안 되는 일이 있었다지만 한번 갑자기 사라지고 나니 그것만으로도 국정원 요원들을 극심하게 긴장시키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쳐 흐르는 파행이었다.

    “어쩐다. 오늘 한번 더 그래야 할 거 같은데.”

    성진은 밤늦은 조용한 시각인 지금 외출을 감행할 작정이었다. 요원들은 성진이 방 안에서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성진은 그들 몰래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간단한 외출복과 변장 용품을 챙겨서 차비를 한 성진이 객실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즉시 인공지능 팔찌에게 명령을 내렸다.

    ‘인지 가속을 가동시켜.’

    - 알겠습니다 마스터.

    - 인지 가속 실행.

    그리고 성진은 객실 문을 열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양 끝의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 있었고, 성진은 그 사이에서 최대한 빨리 객실 문을 열고 빠져나와 다시 닫았다. 

    물론 성진의 눈에도 자신의 몸은 한없이 느리게만 보였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을 돌보던 사람들의 눈에 성진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 찰나의 번개와 같았다.  

    성진의 방 문 앞을 감시 중이던 국정원 요원도 마찬가지로 눈 뜬 장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진은 그 요원이 감시중이던 몰래 카메라의 데이터 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잡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 모습이 잡힌 모든 영상 데이터들은 전부 삭제하고 자연스러운 데이터로 꾸며놓도록 해.’

    - 알겠습니다 마스터.

    인공지능 팔찌는 은밀하고 고요하게 사라지는 성진의 모습을 호텔 내의 모든 감시 시스템으로부터 전부 삭제했다.

    그렇게 한참을 느릿느릿 걸어 나와 호텔을 완전히 빠져나온 성진은 그제서야 인지 가속을 멈추고 시간을 정상으로 되돌렸다.

    - 인지 가속 해제.

    - 모든 육체적 충격에 대해 자동 수복을 조정합니다.

    뒤틀리는 시야와 함께 다소간의 두통도 잠시, 육체의 고통을 잠시 느낀 성진은 자신이 호텔 근처로 타고 왔던 오토바이를 숨겨놓은 장소를 향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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