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 정복자-129화 (129/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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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츠시마 다카시는 답답했다. 지금 정계는 헛된 자존심 따위와 어떤 정치적 술수, 꿍꿍이에 취해 무엇이 급한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공학부 출신으로, 기술 관료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고 방사능 문제가 터지자 이 분야에 대해 전문성을 가진 관료를 찾다 보니 그가 얻어걸렸다.

    대대로 국회의원 중진이 맡는 환경성 장관이 이례적으로 순수 기술 관료 출신인 그에게 돌아간 상황이었다.

    정치적 역량이 없는 만큼 정계는 모두 그에게 순종을 기대했고 본인도 처음에는 그에 따랐다.

    허나 최근 한국에서 방사능 제거 기술이 발명되자 그는 적극적으로 도입을 주장하고 다녔다.

    “장관님. 지금 한국의 협상단이 도쿄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서 기술을 도입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츠시마 다카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지야마 참의원은 싸늘하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번 제안을 거절하면 장관님은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명백한 협박에 마츠시마 다카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무슨 소립니까.”

    “제가 기회를 드리죠. 그들과 협상 테이블에 나서면 무조건 무상 도입과 기술 이전을 요구하세요.”

    “예?”

    무리한 요구였다. 한마디로 협상 결렬을 바라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참의원님. 그런 황망한 말씀을…….”

    “왜요? 따르지 않을 셈입니까?”

    “제 뜻은 이미 확고합니다.”

    마츠시마 다카시가 바라는 것은 수십 년 후에,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친손녀가 건강하게 자랄 땅으로 일본을 되돌리는 것뿐이다.

    “어허 이런…….”

    환경성 장관인 그는 협상 테이블에 무조건 나서게 된다. 함부로 자를 수도 없는 것이 그는 임명 당시에도 방사능 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어필하며 시민단체와 국민들에 대한 안심용 얼굴마담이었다.

    그런 그를 해임하면 내각은 권위에 큰 손상을 입게 된다.

    “이런. 어쩔 수 없군요.”

    후지야마는 혀를 차며 벌떡 일어섰다.

    “장관님이 마음만 조금 바꿨어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예, 예?”

    심상치 않은 기색에 당황한 마츠시마 다카시였다. 그런 그가 흉흉한 인기척에 뒤를 살피자 들어오면서 봤던 가게 주인이 살벌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헉. 가게 주인이…….”

    가게 주인부터가 원래 있던 사람이 아닌 모양이었다.

    단단히 함정에 빠졌다는 걸 직감한 마츠시마 다카시가 입술을 깨물었다.

    “날 어떻게 할 작정이요.”

    “장관님. 메밀 알레르기가 있으시죠?”

    “메밀? 설마…….”

    “예. 메밀가루입니다. 장관님은 우연히 찾아 들린 이 음식점에서 메밀가루가 반찬에 들은 줄 모르고 맛있게 밥을 드신 거죠. 안타깝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죽음이 될 겁니다.”

    나직이 죽음을 선언하는 후지야마 참의원을 보면서 장관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나, 나는…….”

    “장관님. 죄송합니다.”

    가게 주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사내가 벼락같이 뒤로 다가가 장관의 목을 손으로 찔렀다.

    그러자 축 늘어진 장관의 몸뚱이를 사내가 받히면서 메밀가루가 솔솔 입혀진 장아찌 반찬을 입에 가져가려 했다.

    그때였다.

    “동작 그만!”

    거센 고함소리와 함께 문짝이 반쯤 부서지면서 얼굴에 두건을 뒤집어쓴 장정 한 명이 튀어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당황도 잠시뿐. 곧 가게 주인으로 위장했던 남자가 주머니로 손을 뻗어 비도를 던졌다.

    “흐압!”

    날렵한 손속이 비도를 날려보낸 것과 거의 동시에 난입한 장정이 몸을 흘렸다.

    아슬아슬하게 비도를 피한 남자가 잽싸게 스텝을 밟으며 주먹을 뻗었다.

    겉보기에는 어퍼컷 한 방일 뿐인데 무슨 기교가 섞였는지 맞은 남자의 턱이 돌아가면서 그대로 몸이 허물어졌다.

    “후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자리에 남은 후지야마 참의원을 노려보는 남자.

    성진이 일본으로 남몰래 동행하면서 따로 지시를 주고받던 전직 ‘청소부’ 김형석이었다.

    “큭. 이 자식. 대체 무슨 짓이냐. 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하는 거냐?”

    경악한 후지야마 참의원의 말에 김형석은 유창한 일본어로 마주 대화해줬다.

    “살인 현장을 막았지. 그것도 현직 정부기관 장관을 살해하는 상황을 말이야.”

    김형석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후지야마 참의원은 어쩔 줄을 몰랐다.

    “칙쇼! 빌어먹을!”

    후지야마 참의원은 재빨리 문을 박차고 도망치려 했지만 아무리 평소 운동을 즐기는 그라 해도 북한이 길러낸 절정 수준 살인 기계로서의 전성기 기량을 되찾아가는 김형석을 따돌리기에는 너무도 지극히 느렸다.

    “잠깐 자 두라고.”

    후지야마 참의원의 뒤로 순식간에 다가간 김형석은 가볍게 수도를 찔러 넣었다.

    곧 의식을 잃고 허물어지는 후지야마 참의원의 몸뚱이를 보면서 김형석은 마츠시마 다카시의 증상을 살폈다.

    ‘수혈을 짚은 건가?’

    여러 가지 상태를 자세히 살펴봤지만

    정신만 잃도록 수혈만 짚어둔 게 틀림없었다.

    ‘자세한 혈 지식은 없지만, 수혈 정도라면 풀 수 있다.’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으며 한방학적인 간단한 응급처치와 잡기술 또한 처절하게 훈련받았고 그 결과로 반대되는 위기상황에서 수혈을 풀 수도 있었다.

    잠시 동안의 씨름 끝에 김형석이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의 수혈을 풀어내자 곧 그의 입가에서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눈꺼풀이 흔들리면서 정신이 돌아왔다.

    “우으윽…….”

    “정신이 드십니까? 장관님. 정신이 드십니까?”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이 의문스럽게 물었다.

    “누굽니까. 당신은.”

    “저는 이제부터 다카시 장관님을 보호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입니다.”

    “나를……. 보호한다구요?”

    “예. 그렇습니다.”

    대답하면서 김형석은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에게 벽 앞에 축 늘어진 후지야마 참의원을 보게 했다.

    “저 치가 장관님을 죽이려고 하는 걸 제가 막았습니다. 장관님. 이제부터 저와 함께하셔야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김형석의 말에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은 어느새 이성을 찾은 듯 차분히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후지야마 참의원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두건을 뒤집어쓴 당신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두건이 문제라면 지금 당장 벗어드리죠.”

    김형석은 두건을 벗어 재꼈다.

    그러자 본래의 젊고 말쑥한 얼굴이 드러나면서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뭡니까.”

    김형석이 장관의 말에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떨어진 정의의 사자라고 해두면 안 될까요? 장관님. 죄송하지만 이럴 시간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후지야마 참의원이 연락을 바로 하지 않으니까 곧 사방에서 벌떼처럼 살인 기계들이 몰려올 겁니다.”

    “뭐요? 카스미가세키(일본 정부기관 밀집지구)가 가까운 데서 살인기계들이 몰려 온다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발작적으로 부정하는 장관의 말에 김형석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금 상황은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음…….”

    엄연히 일본 국회의 참의원이나 되는 자가 그 하수인과 함께 환경성 장관인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기이하고 위험천만한 상황인 것은 사실이었다.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합니다. 후지야마 참의원은 장관님을 죽이려 했고 저는 장관님을 살린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으십니까?”

    “크응…….”

    “저를 따르지 않으시면 장관님은 저 후지야마 참의원 같은 사람의 손에 죽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후우…….”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잠시 서렸다.

    이윽고 고민을 마친 장관이 김형석을 살짝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을 아직 믿을 수는 없지만, 일단은 동행하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움직이세요.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끄응.”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은 아직 불편한 몸을 일으키면서도 걸음을 서둘렀다. 김형석이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을 호위하듯 사방을 경계하며 걸어나갔다.

    “안전한 곳이 나타나면 경찰을 불러주시오.”

    “경찰을 부르면 그 안에 장관님을 암살하려는 놈이 섞여 있지 않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뭐요?”

    “경찰을 불러드릴 수는 없습니다. 좀 더 안전한 곳이 확보되면 그곳에 장관님을 모시겠습니다.”

    일리는 있는 소리였다. 허나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은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 말은 나를 억류하겠다는 뜻인가?”

    “그런 뜻은 아니지만, 장관님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조치는 필요합니다.”

    김형석은 간곡한 어조로 장관을 설득하려 했다.

    이는 성진의 지시사항 때문이었다.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은 방사능 제거 기술 도입에 대해 대표적인 찬성파 기수였다. 핵심적인 인물인 그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심리적으로도 반감을 사면 곤란했다.

    ‘하지만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했으니 여차하면 기절시켜서 데려가는 수밖에.’

    김형석이 그런 상황을 각오하고 눈치를 살피는 사이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은 결정을 내렸다.

    “좋소. 일단 당신을 따라가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믿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형석은 고개를 조아리면서 마츠시마 다카시 장관의 길을 재촉하게 했다.

    *   *   *

    잠시 후. 국화꽃 문양을 그려 넣은 일본 순찰차 행렬이 사이렌 소리를 크게 울리며 뒷골목 근처를 에워쌌다. 미리 도착한 제복 경관들이 진을 치고 있는 와중에 사복형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진풍경을 연출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눈길이 있었다.

    카스미가세키 외곽의 고층 빌딩에서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백발 초로의 남자는 가볍게 푸념 섞인 짜증을 냈다.

    “후지야마 참의원이 그깟 일 하나 제대로 못 할 줄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법 똘똘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 크군요.”

    옆에서 말을 받는 남자 역시 백발일색이었지만 상대 남자에 비해 눈빛에는 형형한 정광이 어려 있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총재님. 총리는 우유부단한 자라서 환경성 장관의 헛된 생각을 반쯤 수락한 상태입니다. 방사능 문제에 대해 총리대신도 겁을 먹고 있는 상태입니다.”

    “후후. 총리대신은 애당초 그런 소심함 때문에 이용하기 좋아 앉혀놨지.”

    야마토 재건. 그 반백년의 기치를 생각하면서 정치일로를 걸어온 남자가 바로 이 백발 초로의 제1 여당 총재였다.

    그런 그에게 최근 한국의 방사능 제거 기술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조선의 아이들이 보내온 정보를 보셨겠지요? 남조선의 대통령은 방사능 제거 기술과 다케시마를 맞바꿀 심산이라고 합니다.”

    “다케시마라……. 안 될 일이지. 절대 안 될 일이오.”

    방사능 제거 기술을 미개한 조선이 어떻게 감히 손에 넣었는지는 몰라도, 그걸 빌미로 다케시마를 넘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총재는 정계의 상황을 총리대신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해 조정하면서 다케시마와 방사능 제거 기술이 협상의 저울대에 오르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다케시마는 우리 대일본이 야마토의 기지개를 켤 때 솟아날 칼침과 같소. 무기를 날카롭게 벼려도 모자랄 상황에 두려움에 지쳐서 다케시마를 넘겨주다니 아니 될 일.”

    “지금 조센진들이 다케시마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고는 하나 국제사회에 우리의 로비스트들이 침투력을 늘리고 있습니다. 조건이 무르익으면 한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는 법인데 다케시마를 벌써 조선의 땅으로 생각하다니 어리석은 짓이지요.”

    “인재가 없으니 내가 편히 정계를 은퇴할 수가 없구려. 이 야마토의 큰 꿈을 이어 펼쳐나갈 인재가 아직 없어.”

    “송구합니다. 총재님.”

    “환경성 장관은 반드시 처단해야 할 텐데 말이오. 총리대신이 괜한 고집만 피우지 않았어도 조용히 해임시켜서 처리하는 건데……. 쯧쯧. 아둔한 총리대신 때문에 사람 한 명이 죽는구려.”

    “그러게나 말입니다.”

    환경성 장관을 임명할 당시부터 총리대신은 늘 방사능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금번 방사능 기술 도입 협상도 총리대신의 의지로 진행됐을 뿐.

    야마토의 영광을 향해 갈 길이 먼 총재는 그런 총리대신의 작태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들을 정비해서 환경성 장관, 마츠시마 다카시를 꼭 추살하도록 하시오. 명심하시오.”

    “옛. 총재님.”

    엄격한 부동자세로 총재에게 예를 표한 뒤 손짓에 따라 남자는 물러났다.

    홀로 남은 총재는 그저 자신이 품은 야마토의 큰 뜻을 이어나갈 인재가 없음이 답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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