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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128화 (128/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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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장 입성

    “쿠소! 천만 엔짜리 도청기라는 게 결국 다운입니다.”

    일본 총리 직속 휘하 비밀작전그룹의 베테랑 쿠라타 슈헤이는 뼈아픈 신음을 흘렸다.

    상부에서 무려 개당 천만 엔이라 강조하며 어떤 감지 시스템으로도 감지가 안 된다는 최첨단 도청장치가 방금 삐- 하는 노이즈만 뿌리며 맛이 가버린 까닭이었다.

    “쿠라타.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다른 채널을 열어봐.”

    “카쵸(과장님). 전 채널 점검 3회차입니다. 하나라도 응답이 들어오는 채널이 없습니다. 전부 다운입니다.”

    “그래?”

    비밀작전그룹을 이끄는 과장 엔도 츠요시는 쿠라타의 보고에 헛웃음을 지었다.

    “첨단 시험기제라더니 결국 개당 천만 엔씩 날려버린 셈인가.”

    세계 최고 수준의 정밀 전자 공업능력을 보유한 일본이다. 엄청난 정밀성을 자랑하는 기기도 소량이나마 생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역량이 최고조의 성과를 발휘하기 쉬운 분야가 소량의 최첨단 성능이 요구되는 첩보 장비 분야다.

    이 분야에서 기관의 요구로 개발된 첨단 관련 기술이 상용 시장에 다운그레이드되어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거듭난다.

    지금도 도청기와 일부 극소형 마이크로 전자제품 분야는 일본이 최고 수준으로 대접받고 있었고 그 상위에 있을 일본 정보기관의 운용 장비들은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정밀성과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한다.

    “한국 친구들이 꽤 좋은 장비를 들여온 모양이군? 국가정보원은 이런 투자에 인색한 줄 알았는데……. 의외야.”

    잡기 쉬운 더미를 열 개씩 뿌려두고, 천만 엔짜리 진짜 도청기를 인테리어 내장재 안에 흔적 없이 심어뒀다.

    시험기제라 해서 어느 기관도 아직 감지장비를 개발하지 못할 거라 자랑하며 혁명적이라고 추켜세우던 도청기들이었다. 헌데 막상 실전에 투입하니 들어간 세금의 값어치를 한순간도 해내지 못하고 모조리 쇳조각으로 전락해버렸다.

    “어떻게 할까요? 과장님.”

    쿠라타의 지시 요청에 엔도 츠요시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제기랄. 이런 상황은 내 전공이 아니다. 나는 항상 충분한 지원이 있어야 제 실력을 발휘한다고.”

    햇볕에서 졸다 깬 듯한 얼빠진 표정. 그따위 표정을 하고 한탄하는 나이 40대의 과장을 보면서도 쿠라타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가 헤쳐 온 지옥을 열거하면 일본 정부가 훈장을 수십 개씩 안겨줘도 모자랄 지경이다. 게다가 그 끝자락의 일부는 쿠라타 본인이 직접 함께 체험했다. 

    “과장님. 엄살떠시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안 좋습니다. 정보를 한 조각도 못 얻어 가면 보고서에 뭐라고 쓰실 겁니까. 우리 직속 상사가 내각 총리라는 걸 좀 잊지 마십시오.”

    “제기랄. 일이 꼬이는구나.”

    뙤약볕에서 평온히 낮잠이나 자면 어울릴만한 맹한 얼굴을 한 40대 남자. 그리고 일본 내각 총리 직속 휘하 비밀작전그룹의 과장 엔도 츠요시의 입술이 비틀어지는 것만으로 별안간 요사한 살기가 어렸다.

    “기계가 안 도와주면 결정적일 때 몸으로 때워야지. 별수 있겠어?”

    *   *   *

    새로이 출범한 일본 정부 내각은 최근 급속도로 우경화되어가는 모양새였다.

    최대 이슈인 경제 침체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한 방사능 문제. 그리고 갖가지 사회 불만 요소가 팽창하고 있었다.

    이것을 현 내각은 민족주의와 애국심 키워드로 해결하려 들었다. 그래서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미화성 망언이 심심하면 터져 나왔고 이는 일본 자국민들에게는 큰 위안이 될지 모르나 분명하게도 식민지배를 기억하는 주변국 국민들에게는 큰 상처와 분노의 씨앗이 되었다.

    뜻있는 사람들은 적절한 자제를 청했지만 이미 치솟는 지지율의 단맛을 본 내각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 상황에서 성진은 일본 현지의 우경화 바람이 어느 정도인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어딜 가도 미디어나 TV에는 우익 진영을 대변하는 목소리뿐입니다. 좌익 계통의 지지율이나 입장은 많이 줄었거나 도리어 우경화가 되었어요.”

    외교부 출신 분석 담당자의 말에 다른 행정 관료도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사실 일본에 들어오기 전에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일본은 현재 우익 세력의 주장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성향이 강한 편입니다.”

    “그래요…….”

    성진은 관료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하는 척했지만 실상은 모두 다 익히 아는 내용이었다.

    그보다 성진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일본 정치가들이 꼼짝없이 성진의 뜻을 수락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한 수를 성진은 천천히 구상하고 있었다.

    ‘비리 정보 따위로는 일본 내각을 움직일 수 없다.’

    성진이 인공지능 팔찌에게 조사하게 한 일본 내각 구성원들의 비리 정보는 한 트럭은 쉽게 나왔다. 허나 그런 것을 가지고 일본 내각을 흔들 수는 없다.

    ‘일본은 국회의원들 비리에 너무 관대하다.’

    어마어마한 비리 횡령을 저질러도 몇 년, 아니 1년만 쉬고 환호와 지지 속에 복귀하는 국회의원이 수두룩한 곳이 일본 정계다.

    비리 기사가 뜨면 당장 구속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음 선거를 장담하기 힘든 한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가 일본이었다.

    ‘방법은 따로 있다.’

    당장 테이블에서 뻔한 분석 자료들을 늘어놔 봐야 이미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를 통해서 분석과 암기를 마친 자료들이었다. 그보다 성진이 주목한 것은 일본 정가 내부의 미묘한 알력관계였다.

    ‘나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일본 현지의 인물들. 바로 그들이 핵심이야.’

    성진은 관료들과의 회의에 경청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계획을 구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   *   *

    일본 도쿄도 23구 특별구 중 하나인 치요다 구. 일왕의 거처인 고쿄를 중심으로 일본 국회의사당과 최고재판소, 내각 총리대신의 관저가 밀집한 명실공히 일본의 정치 중심지다.

    당연히 나름 번화한 상가가 따로 있음에도 점심시간에 구석 골목을 헤집는 남자가 있었다.

    이 치요다구 거리의 구석 골목을 거니는 남루한 양복 차림의 50대 장년 사내.

    그는 한참 동안 골목길을 돌고 돌아서 가게를 하나 발견하고서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오~ 드디어 찾았구만.”

    그가 찾아 들어간 가게는 이름은 덜 알려졌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음식점 중 하나로 알려진 치요다구 뒷골목의 점심밥 장사를 하는 가게였다.

    소문을 물어물어 찾아간 그가 기대감에 젖어 가게 문을 열자 서른 남짓 되었을 듯한 가게 주인이 차분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예에.”

    중년 사내가 마주 인사하며 가게를 살피는데 문득 홀로 앉아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는 한 사람의 다른 손님도 없었다.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중년 사내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환경성 장관.”

    “아……. 오랜만입니다. 후지야마 참의원.”

    나이 40대의 혈기왕성한 젊은 국회의원인 후지야마 고노스케 참의원. 그리고 그 앞에 숨겨진 골목 음식점을 찾으러 나섰다가 보기 좋게 걸려든 환경성 장관 마츠시마 다카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제가 여기 올 줄 알았던 겁니까?”

    “죄송합니다. 장관께서 통 만나주시질 않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으음…….”

    가게를 전세 낸 채로 기다린 후지야마 참의원이 자리를 권하자 환경성 장관 마츠시마 다카시 또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저는 후지야마 참의원과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최근 일본 정계에는 한국이 개발한 방사능 제거 기술이 뜨거운 화두가 된 지 오래였다.

    의견은 곧장 두 가지로 갈렸다.

    한시라도 빨리 한국의 기업이 개발한 방사능 정화 기술을 받아들여서 국토를 정화해야 한다는 의견.

    그리고 한국의 방사능 정화 기술을 도입하는 건 급하지 않다는 식으로 도입을 지연하는 의견이었다.

    후지야마 참의원이 속한 정치 파벌은 처음부터 후자였고, 사실 처음부터 정계에는 후자의 의견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한국을 상대로 한 일본의 이상할 정도의 고집과 자존심이 전자의 의견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결국 한시바삐 한국의 방사능 제거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환경 문제에 대해 전문성을 지닌 과학자들과 관료들뿐이었다.

    기술 관료 출신의 환경성 장관 마츠시마 다카시 또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장관님. 지금 우리 일본은 한국의 기술 따위를 구걸할 만큼 위기 상황이 아닙니다.”

    “허!”

    마츠시마 장관은 코웃음을 쳤다.

    “후지야마 참의원님. 우연히 듣자하니 댁의 친조카들은 이미 미국으로 장기 유학을 떠났던데 지금 이 일본이 위기가 아니라면 이 땅에 남아서 같이 고락을 나누시지 그러셨습니까.”

    “하하……. 이거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조카들의 유학은 교육적인 목적으로 누이가 결정한 문제입니다. 저의 정치적인 판단이나 국가의 안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장관님.”

    “아하. 그러십니까.”

    마츠시마 장관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속으로 후지야마 참의원의 말에 질색을 했다.

    ‘냄새나는 물건 위에 뚜껑을 덮는다지……. 뻔한 거짓말을…….’

    이미 일본 고위층, 부유층 자녀들의 장기유학이 최근에 급증하기 시작한 추세였다. 방사능 문제에 대한 공포 심리가 대중들 사이에 퍼지지 않도록 억누르면서도 정작 재력이 충분한 계층에서는 자녀들을 해외로 띄워 보내고 있었다.

    “설사 후지야마 참의원님의 조카분들은 순수한 교육 목적이라 해도 이미 최근 새에 급증하기 시작한 조기유학 자녀 비율은 압도적인 수준입니다. 거기에다가 지금 방사능 문제는 절대 만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치미는 노기를 애써 가라앉히면서 마츠시마 장관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는 그에게 후지야마 참의원은 태연한 미소로 달래는 듯한 어조를 흘렸다.

    “장관님. 너무 마음이 급하셔서 그러신 거 아닙니까? 방사능 문제에 대해 지나친 기우를 품으신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참의원님. 고위험도의 방사능이 매년 발생한다는 건 그만큼 일본 전 국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진심이십니까?”

    “방사능, 원자력 문제를 주관하는 환경성 장관의 자리를 걸고 말씀드립니다. 기술 도입이 다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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